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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당과 유성룡 만나

[[김삼웅의 인물열전] 호방한 자유인 허균 평전 / 8회] 허균은 스무 살이 안되어 사명당과 유성룡 등 당대의 명사들을 만나고 배우면서 성장한다

등록 2021.03.09 17:36수정 2021.03.09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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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당 동상 육환장을 든 사명당 동상. 사명당 기념관 앞에 서 있다. ⓒ 정근영

 
허균은 여러 분야에서 많은 행운을 타고 났다. 좋은 가문에 훌륭한 부모, 유능한 형들과 재능있는 누님 등 가족사와 더불어 작은형 덕분에 젊은 나이에 만난 이달을 비롯 불교계의 빼어난 선승 사명당과 명재상 유성룡 등 당대의 인물을 만나게 된 것이다.

허균이 사명당을 처음 만난 것은 열일곱 살이던 1586년 여름이다. 1544년 출생이니 허균보다는 25세 연상이고 작은형보다 7세 연상이었다. 불승의 신분인데도 사명당은 나이나 신분을 가리지 않고 각계 명사들과 두루 사귀었다.

사명당이 친교를 맺은 대표적인 인물은 박순(樸淳,1523~1589)ㆍ임제(林悌, 1549~1587)ㆍ노수신(盧守愼, 1515~1590) 등이었는데, 모두 당대의 뛰어난 인물이었다. 박순과 노수신은 모두 영의정까지 오른 고관이었고, 임제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 시인이었다. 나이로 판단할 때 박순ㆍ노수신과는 사제 관계에 가까웠고, 임제와는 친구 사이였을 것이다. 실제로 사명당은 노수신에게서 『노자』ㆍ『장자』ㆍ『열자』 등 제자백가서와 시를 배웠다고 한다.

허균은 사명당을 처음 만나던 때를 두고두고 기억한다. 26년이 지난 뒤에 사명당의 문집  머리말에서 첫 만남을 회고한다.

지난 병술년 여름에 나는 작은형을 모시고 있었다. 배를 타고 봉은사 아래에서 쉬고 있었는데 중 하나가 바삐 오더니 뱃머리에서 읍했다. 그의 몸은 헌칠하고 얼굴은 엄숙했다. 자리에 앉아 그와 함께 말해보니, 말은 짧았지만 그 뜻은 원대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물었더니, 종봉(鍾峰) 유정(惟政) 스님이라고 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사뭇 그를 좋아했다.

그날 잠은 매당(梅堂)에서 잤다. 나는 또 그의 시를 꺼내어 보았는데 그 소리가 맑고도 뜻이 높았다. 작은형이 몹시 칭찬하면서, "그는 당나라 아홉 중의 무리에 들 만하다"고 하셨다. 그때 나는 아직 어려서 그 시의 오묘한 뜻은 아직 알지 못했지만 혼자서 마음속에 간직해두고 하나도 잊지 않았다.(『사명대사집』)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의 역할을 익히 알려진 대로이다. 허균은 사명당에게서 불교의 가르침을 많이 받았다. 사명당은 불교뿐 아니라 문학에도 뛰어났으며 여러 방면으로 아는 것이 많았다. 그는 허균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었다. 허균은 사명당의 비문을 지으면서 '그와 형제같이 사귀었다(弟兄之交)고 썼다. (주석 6)



사명당의 안목은 예리했다. 허균의 경박성을 꿰뚫어보고 근신하라는 시 한 수를 지어주었다. 

 남의 잘잘못을 말하지 말게나
 이로움 없을 뿐만 아니라 재앙까지 불러온다네
 만약 입 지키기를 병마개 막듯 한다면
 이것이 바로 몸 편안케 하는 으뜸의 방법이라네. (주석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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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 유성룡 설득과 통합의 리더 유성룡의 초상 ⓒ 유성룡

 
허균이 뒷날 임진왜란의 국난을 극복한 명재상 유성룡을 만난 것은 역시 작은형을 통해서 사명당과 얼추 비슷한 시기였다. 유성룡이 1542년 생이어서 허균보다 27년 연상이었다. 『선조실록』의 「유성룡 졸기」편은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명예가 날로 드러났으나, 아침 저녁 여가에 또 학문에 힘써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서 조금도 기대거나 다리를 뻗는 일이 없었다. 사람을 응접할 때는 고요하고 단아하여 말이 적었고, 붓을 잡고 글을 쓸 때에는 일필휘지(一筆揮之)하여 뜻을 두지 않는 듯하였으나 문장이 정숙(精熟)하여 맛이 있었다. 여러 책을 박람(博覽)하여 외우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한 번 눈을 스치면 환히 알아 한 글자도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 

유성룡은 50살 때에 좌의정이 되었고 이조판서를 겸임하였다. 허균과 만났을 즈음은 부제학 시절이다. 작은형과는 오래 전부터 교유하고 있었다. 그는 청렴강직한 성품이어서 정쟁의 참상에 분개하여 관직을 내려놓고 낙향하였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선조의 특명으로 군권을 장악하는 병조판서를 겸임하는 영의정에 제수되었다. 전란기에 그의 역할을 익히 알려진 대로이다. 

허균은 스무 살이 안되어 사명당과 유성룡 등 당대의 명사들을 만나고 배우면서 성장한다. 그가 처음으로 관직에 출사했을 때의 직속 상급자가 유성룡이었다.  


주석
6> 허경진, 앞의 책, 87쪽.
7> 앞과 같음.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호방한 자유인 허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허균 #허균평전 #자유인_허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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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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