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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 고혹, 미혹... 이게 이런 뜻이었어?

알수록 더 흥미진진한 모국어의 세계

등록 2021.03.04 10:07수정 2021.03.04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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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치면서 배운다'(Teaching is learning), '가르침으로써 배우기'(Learning by teaching)이란 말이 있다. 다른 사람을 가르쳐본 사람은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가르치면서 애매하게 알았던 것을 정확하게 알게 되고 그렇게 가르쳐본 내용은 다시는 잊어버리지 않는다.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때보다 능동적으로 출력, 재생할 때 기억이 강화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한국어에 대해 가장 많이 배우는 사람은 학생들이 아니라 바로 나.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뜻을 대충 알고 쓰던 단어를 다시 찾아보면서 몰랐던 어원을 알고 놀라는 일이 많다. 얼마 전, 한국어가 고급 수준인 한 학생에게 한국 속담과 관용구를 따로 가르치던 중이었다. (이 학생은 첫 수업 시간에 유창하게 자기 소개를 하길래 '한국어를 아주 잘하네요!'라고 칭찬했더니 '에이, 선생님! 비행기 태우지 마세요'라고 답해 나를 경악시켰다.)


"아주 바쁠 때 '눈코 뜰 새 없다'라는 말을 써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처럼 쓰면 돼요. 눈과 코를 뜰 틈도 없이 바쁘다는 뜻이에요."

설명을 하는 순간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눈과 코를 감을 새도 없이 바쁘다면 또 모를까, 바쁜데 왜 눈을 뜰 수가 없다는 거지? 눈은 그렇다 치고, 코를 어떻게 뜨고 감는다는 거지?

눈을 끔벅끔벅 하고 있는 학생을 앞에 두고 5초간 일시정지 자세로 있었다. 그리고 학생에게는 다른 문장들을 읽어보라고 하고 그 사이에 바로 찾아보았다.

찾아보니 역시 다른 뜻이었다. 우리 얼굴의 눈, 코가 아니라, 그물의 눈(mesh)과 코(knot)를 뜬다(knit)는 의미였다. 원래 물살이(생선)을 잡는 중간 중간 찢어진 그물을 손질해야 한다. 그런데 생선떼가 너무 몰려와 잠시의 틈도 낼 수 없을 만큼 바쁘다면 눈코를 보수할 새가 없다 하여 나온 관용구였다. 나도 학생에게 이 표현을 가르치지 않았으면 앞으로도 평생 모르고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매혹, 고혹, 미혹


프랑스어 '엉셩떼 Enchanté(e)', 스페인어 '엔깐따다/도 Encantada(o)'는 '만나서 반갑습니다'라는 뜻이다. '매혹된' '황홀한'이란 뜻의 영어단어 enchanted와 어원이 같다. 농담을 하자면, 프랑스어와 스페인어에서는 처음 만난 사람보고 무조건 '당신을 만나서 황홀합니다' '당신에게 매혹되었습니다'라고 뻐꾸기를 날리는 셈이다. 처음 만난 프랑스인이 '엉셩떼'라고 인사한다고 해서 어원 그대로 해석해서 '나에게 매료되었다는 뜻인가?'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

학생들에게 '매혹되었다, 매력적이다, 매료되었다' 등의 단어 뜻을 설명해주다가, 내가 이 단어의 속뜻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찾아본 결과는 뜻밖이었다! 매혹, 매력, 매료의 '매'는 숲 속에 살면서 사람을 홀리는 괴물 이매魑魅에서 나왔다. 그리고 이매는 전혀 매력적으로 생기지 않았다.
  

일본 민담집 百鬼夜講化物語에 실린 이매의 모습 사람을 홀리는 도깨비 이매의 모습은 별로 매력적이지 않다. ⓒ Wikipedia

 
그렇다면 '고혹적이다'란 말의 기원은 무엇일까? 이 또한 상상을 뛰어넘는다.
고(蠱)란 글자는 그릇(皿)에 벌레(虫) 세 마리가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릇 속 벌레라는 뜻이다. 그런데 보통 벌레가 아니다. 독이 있는 지네, 뱀, 전갈 등을 한 그릇에 가둬놓고 서로 싸우게 하여 승자가 패자의 독을 흡수하게 한다.

그렇게 모든 독이 최종 승자에게 농축되면 그 승자를 애벌레에게 먹이로 준다. 그러면 그 애벌레는 그 모든 독을 다 갖게 된다고 보았다. 이렇게 저주 흑마법에 쓰려고 만든 농축독 애벌레가 바로 고(蠱)이다. 물론 전설적인 이야기이고 실제 그렇게 여러 종류의 독을 다 가진 애벌레를 만들기는 불가능하다. (자연계에 독 있는 먹이를 먹어서 그 독을 자기 몸에 농축시키는 동물들이 있기는 하다.)
 

독을 먹어서 농축하는 푸른갯민숭달팽이 해파리독을 먹어서 농축하는 푸른갯민숭달팽이 blue dragon가 실존 동물 중 蠱의 개념과 가장 비슷한 것 같다. 상상 속의 蠱를 그냥 굼벵이 모습이었겠지만, 블루 드래곤은 실제로 고혹적인 모습이다. ⓒ Sylke Rohrlach/Wikimedia

 
무려 갑골문부터 나온 오래된 글자이다. 무협지에도 자주 나온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한의대 수업 시간에 (전립선염이나 간경화, 소화기 암 등) 극심한 통증과 부종을 낳는 병을 고(蠱)의 독이 들어간 것처럼 아프다는 의미로 고병(蠱病)이라 배웠던 기억이 난다. 그 '고'가 '고혹적'의 '고'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고혹적이란 말은 벌레독으로 저주에 걸어 사람을 홀리는 것처럼 매력적이란 뜻이다.

그럼 미혹은? 미(迷)는 길을 잃게 한다는 뜻이다.

단어를 어원 그대로 해석하는 사람에게 뻐꾸기를 날리는 장면을 상상해보았다.

"매혹적이시네요."
"내가 도깨비처럼 생겼다고?"
"아뇨.. 고혹적이라고요;;;"
"내가 전갈, 뱀, 지네 독 품은 벌레처럼 생겼다고?"
"아뇨. 저를 미혹한다고요."
"길을 잃게 하는 미로 괴물이라고? 내가 미노타우르스라는 거야?"


신기루의 뜻도 찾아보기 전까지는 미처 몰랐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막연히 신기루蜃氣樓가 신기한 가루, 가물가물한 아지랑이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신蜃은 상상 속의 거대한 조개 또는 이무기라는 뜻이다. 거대한 조개가 내뿜는 입김으로 생기는 환영(illusion)의 건물이 바로 신기루다.

제대로 모르고 살았지만 찾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던 단어들을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새삼스럽게 알게 된다. 모국어가 더 입체적이고 흥미진진하게 느껴진다. 내일은 또 어떤 것을 알게 되고 놀라게 될까?
#한국어 #매혹 #고혹 #신기루 #미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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