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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배우 복혜숙, 그 파란만장한 인생

[윤중강의 인천국악로드] 인천 용동권번 출신 그녀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등록 2021.03.06 11:32수정 2021.03.12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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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국악 이야기는 다른 문화·역사에 비해 덜 알려진 편이다. 인천시민들의 가슴속에서 울고 웃고, 신명나게 놀았던 인천국악의 숨은 이야기들을 연재한다.[기자말]

영화 <흑백> 출연 당시 복혜숙의 모습 ⓒ 한국영상자료원

 
용동큰우물을 지날 때면, 여배우 복혜숙(1904~1982)이 떠오른다. 충남 보령 태생으로 알려진 복혜숙은 어떻게 인천에 온 것일까? 복혜숙과 용동권번에 관한 소문은, 1930년대 당시에도 끊임없이 돌았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인천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다.

복혜숙은 1982년에 타계했는데, 본인 스스로 인천에서의 어린 시절을 처음 소상히 말한 것은 1981년이다. 이를 통해서 복혜숙이 용동권번에 적을 두고 활동한 것을 숨기려 했다기보다는, 복혜숙에게 인천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였다는 걸 알게 된다.


복혜숙 가족이 인천에 온 것은 하와이 이민과 관련이 있다. 1903년 8월 6일, 하와이 이민 모집 공고문이 나붙었다. 인천에서 출발한 하와이 이민자의 다수가 내리교회 교인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혜숙의 아버지(복기업)도 이 때 인천에 오게 되고, 이미 기독교(서학) 신자였다.

복혜숙은 조산으로 인해 미숙아로 태어났고, 그녀의 가족은 인천에 와서 하와이로 이민가길 희망했다. 그러나 하와이에 한인(조선인)의 숫자가 늘자, 일본이 규제를 한다. 복혜숙 가족은 이민을 간다는 일말의 기대감으로 살아가던 중, 설상가상 세 살 위의 언니를 잃게 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인천으로 옮겨와 살 때였다. 하루는 어머니가 눈깔사탕을 사다 주었는데 나는 내 것을 다 움켜쥐고 언니 것도 마저 내 놓으라고 떼를 썼다. 하도 보채고 우니까 나보다 세 살 위인 언니는 먹던 사탕을 마루에 던져 놓고 나가 버렸다. 그런데 잠시 후 밖이 어수선하더니 누가 우물에 빠졌다고 웅성웅성했다. 마루에 누워 계시던 어머니가 뛰쳐나가고 얼마 있다 장정들이 물에 흠뻑 젖은 언니를 안고 들어왔다." (1981년 4월 16일자 <동아일보>)
 

용동큰우물. 용동큰우물의 글씨는 강화 출신의 서예가 박세림이 썼다. ⓒ 윤중강

 
신문기사에는 '용동큰우물'으로 기록돼 있지는 않지만, 크리스천이 된 복혜숙 가족이 하와이 이민을 꿈꾸며 교회(내리교회)에 다녔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그 우물은 교회의 길 건너편에 있던 용동큰 우물일 것이라고 인천토박이면 당연하게 여긴다.

용동큰우물은 인천광역시 민속문화재 제2호로 지정됐고, 간판은 강화 출신의 서예가 박세림(1925 ~1975)이 썼다. 내 어린 시절(1960년대)에도 용동큰우물은 여러 사건사고와 연관이 있었다.

복혜숙과 인천권번
       
복혜숙이 인천권번에 기적을 둔 것은 사실일까? 지금 우리가 국악의 범주에서 얘기하는 기예(技藝)를 배워서 활동했을까? 복혜숙은 생전 이에 관해선 뚜렷하게 얘기한 바 없으나, 모두 사실이다.


용동권번의 공식적인 이름은 소성예기권번(邵城藝妓券番)이나, 일상에선 용동권번(龍洞券番)으로 통했던 그 곳(인천부 용리 171)의 예기(藝妓) 명단에 복혜숙이란 이름이 보인다. 복혜숙이 용동권번에서 활동한 배경엔, 연극과도 연관이 있다는 일설도 있다.

토월회의 인천 공연이 끝나고 수입을 내지 못하자, 여자단원 복혜숙이 인천 여관방에 잡혀, 돈을 벌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권번을 중심으로 활동을 했다는 얘기가 전하나, 신빙성이 적다.

신극단체 토월회가 인천에서 공연을 한 것은 사실인데, 요즘말로 대박이 났다. '장가들기 싫어' 등의 작품을 공연(1925년 12월 22일~23일 빈정 가부기좌) 했는데, '쌀쌀한 눈바람에 추위를 불구하고, 정각 전부터 입추할 여지가 없이 대만원의 성황'이었다고 기사가 전한다. (1925년 12월 24일 <조선일보>)

복혜숙과 관련한 매우 악의적인 기사도 있다. '인기도 한 때인가. 복혜숙양, 탈선으로 다른 배우에게 영향이 많다'란 제목의 기사가 있다. YY生이란 필명으로 쓴 가십기사는, 요즘이라면 인격모독으로 고소감이다.

"아름다운 꽃봉오리가 곱게 피어오르나, 얼마 되지 않아서 보잘 것 없이 시들어버리는 것"으로 시작한 기사는, 중간에 '연기파 배우' 복혜숙은 결코 스크린에 맞지 않는 얼굴이라는 외모적 판단부터 시작해서 "최근에 소식을 들어보면 (중략) 인천에서 기생노릇을 한다하니 양을 아는 사람은 탄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고 있다.

이 기사는 복혜숙 개인을 넘어서, 인천용동권번의 예기들이 들고 일어나서 문제를 삼을 만하다.

용동권번의 소리선생, 전광태
 

용동권번의 예기 사진. 이 사진에 나온 인물중 전광태가 있을 것도 같다. ⓒ 윤중강/자료사진


용동권번의 예기들은 어떤 기예를 익혔을까? 스승은 누구였을까? 확실하게 알려진 사람이 있다. 전광태(全光泰) 선생이다. 생몰연대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으나, 주소지는 '인천부 용리 171번지'로, 지금 용동권번이라고 새긴 돌계단이 있는 곳이다.

전광태는 1930년대에 용동권번에 기거하면서, 예기들에게 시조창(時調唱)과 좌창(坐唱)을 가르쳐 주었다. 전광태는 경성방송국(JODK, 1937년~1940년)에 다수 출연했다. 장일타홍을 비롯해서 용동권번 기생을 대동하고 출연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서 활동하는 사람 중에는, 용동권번에서 전광태에게 시조를 배웠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실제 베운 것으로 추정되는 장일타홍도, 복혜숙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용동권번 자체를 얘기하지 않기에, 전광태 선생은 더욱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광태 선생이 용동권번에서 기예를 가르쳤다는 사실은, 중국 연변의 연변가무단(1956년)의 기록 속에 남이있다. 신옥화(1919년 전주군 태생)는 14세 때 용동권번과 인연을 맺는다. 인천에서 전광태 선생에게 특히 가곡, 가사, 시조 등을 집중적으로 익히면서, 전통성악의 이론까지 배웠다.

대략 3년의 세월이었으며, 1936년 용동권번(당시 '인화권번' 명칭 사용)을 졸업하게 된다. 그는 조선의 몇 곳에서 예기로 활동했음을 알 수 있으며, 함경북도 회령(1944년)에서 활동한 이후, 해방 전후에 중국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연변가무단과 연변예술학교에서 활동하면서, 인천(인화권번)에서 익힌 시조를 그곳에서 알려줬다. 스승 전광태에게 배운 '청산리 벽계수야'(황진이 시조)가 대표곡이었으나, 아쉽게도 중국의 문화대혁명(1966년)으로 인해서 시조창을 부를 기회를 잃게 됐다.

전광태로부터 시작한 인천의 용동권번의 노래의 맥은 크게 알려지지 못했으나, 그나마 전광태-장일타홍 등의 방송출연을 확인하고, '전광태~신옥화'의 사사계보는 그나마 연변지역을 통해서 전해지고 있어서 다행이다.

무대를 잃은 뒤, 인천으로 돌아오다

다시 복혜숙으로 돌아가보자. 복혜숙이 인천에 어떻게 다시 오게 됐는지는 소상히 알 순 없다. 생전에 그는 여기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복혜숙과 용동권번을 최초로 공식적으로 발설한 것은 안석영(1901~1950)이다.

"무대를 잃어버린 혜숙은 다시 생활고에 쫒겨 인천으로 가게 됐다. 인천에서의 그의 생활은 너무도 퇴보적이었고, 소극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인천으로 가자 무대와는 등을 지고 연극과는 담을 쌓고 말았으니 배우 혜숙은 차차 지위도 명예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영화와 연극을 떠난 복혜숙의 안타가운 심정을 안석영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그렇다면 복혜숙은 인천에서 좌절만 하고 지냈을까? 아니다. 안석영의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러나 어디를 가나 쉴 줄 모르는 그의 활동은 드디어 용동권번(龍洞券番)의 여자 취체역(取締役)까지 맡아 권번 내의 모든 제도와 설비를 개혁했지만, 여배우로서의 북혜숙은 인기를 잊어버리게 되었음은 어찌할 수 없는 대세였다." (1939년 6월 3일 <조선일보>)

복혜숙은 자신의 과거 예기생활의 경험을 바탕으로, 용동권번에서 많은 예기들의 신임을 얻어서 취체역(대표)까지 하게 됐다. 그러나 매우 안타깝게도 복혜숙은 생전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다.

기생에 대한 사회적 인식, 예기(藝妓)를 제대로 대우하지 못한 시대였기에 그랬을 것으로 추측된다. 만약 복혜숙의 생존 당시 이런 사실을 알려질 수 있었다면, 복혜숙은 '우리나라 최초로 권번의 여성대표'를 맡은 인물이 아닐까 싶으며, 최초의 여성대표를 배출한 곳이 인천의 용동권번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복혜숙 여사의 평생의 절친은 판소리명창 박록주(1906~1979)이다. 두 살 터울의 그들은 어린 시절에 만나서 평생을 함께 지냈다. 콜롬비아레코드의 심청전 '상·하'는 콜롬비아관현악단의 반주로 영화극이란 이름으로 취입 했다.

김영환과 복혜숙의 내레이션과 박록주의 창으로 구성된 유성기음반(1930년)이다. "넌 내 마누라하면 꼭 좋겠다." 박록주를 만난 복혜숙의 첫마디였단다. 두 사람은 서로를 평생 영감 마누라라고 불렀다. 박록주는 복혜숙에게 "영감 목소리는 창(唱)하기에 딱 맞다"고 했고, 실제 박록주는 복혜숙에게 틈이 나면 남도창(南道唱)을 가르쳐주었다. 복혜숙은 그간 이런 저런 삶의 경험을 통해서, 전통적인 소리에는 이미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다.
 

복혜숙이 출연했던 작품 <역습>(1936) ⓒ 한국영상자료원


  

복혜숙(오른쪽)이 출연했던 작품 <반도의 봄>(1941년) ⓒ 한국영상자료원

 

인천 출신 여배우로 활약했던 복혜숙은 용동권번관 관련한 소문이 끊임없이 나돌았다. ⓒ 윤중강/영화 자료사진

 
인천, 그리고 복혜숙

생전 복혜숙은 '새타령'의 가사가, 1970년대부터 잘못 불리고 있음을 지적했다. 원래 남도창 '새타령'은 '쌍거쌍래 (雙去雙來)로 날아든다'의 가사이나, 새타령이 가요풍 신민요가 되면서 쌍거생래, 쌍쌍의 새가 함께 오고 함게 간다는 내용이, '쌍긋쌍긋 날아든다'로 바뀐 것을 안타깝게 지적했다.

복혜숙은 생전에 연극과 영화 활동을 했고, 비너스다방도 경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배우활동을 하면서 가진 휴지기와, 다방 등을 경영했던 시기도 보다 정확히 할 필요가 있다. 복혜숙에 관한 일반적인 기록에는 '인천'과 '용동권번'에 관한 기록은 전혀 없다.

생전 '인천'이라는 지역에 대한 복혜숙의 생각을 떠올린다. 어린 시절의 아픈 상처가 있는 곳이기도 했고, 결코 지속적일 수 없었던 배우 생활 가운데 몇몇 이유로 해서 권번생활을 했던 것도 인천이었다.
 

용동권번이 있던 자리에 남아있는 용동권번 표지석 ⓒ 윤중강


결국 용동권번의 기생들의 '맏언니'로서 예기들의 권익 증진을 위해서 '대표직'을 받아들이고, 여장부적인 기질을 발휘했던 복혜숙을 떠올린다. 용동권번의 대표역을 잘 마치고, 경인선에 오른 복혜숙의 심정은 어떠했을가? 용동큰우물과 용동권번, 그리고 그 주변의 여러 곳을 떠올리면서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났을지도 모른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세상의 인식도 바뀌었다. 어쩌면 저 하늘에 계신 '영원한 여배우' 복혜숙 여사께서도 자신의 삶을 정확히 기록해주길 바라고 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인천시 인터넷신문 'i-View'에도 실립니다. 글쓴이는 윤중강 문화재위원(국악평론가)입니다.
#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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