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4.19 11:38최종 업데이트 21.04.19 11:38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7년이 지났지만 진상규명은 여전히 진행중입니다. 이런 가운데 참사 현장에서 살아남은 이들과 이들을 지키려는 가족들조차 아직도 매일 악몽을 꾸며 고통 속에 살고 있습니다. 세월호 생존자 중 '파란바지 의인'으로 알려진 김동수씨 가족 인터뷰를 통해 세월호 생존자와 그 가족이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생생히 전해드립니다. 이번 글은 큰딸 김예람씨의 이야기입니다.[편집자말] 저는 1993년 3월생입니다. 5~6살 때 어린이집에서 낮잠을 자지 않고 혼자 미끄럼틀에서 놀거나 선생님들 옆에서 놀던 기억이 있어요. 그리고 이사를 자주 했던 기억. 어릴 때 이사를 자주 했어요. 주민등록을 떼보면 주소지가 정말 많더라고요. 제주 함덕에서만 다섯 번 정도 이사를 했으니까 다 합치면 열 번 이상 이사했던 것 같아요. 어렸을 때 아빠에 대한 기억은 그렇게 많지 않아요. 워낙 바쁘셔서. 예전에 횟집 할 때, 수산코너 할 때 기억 약간. 화물차 일할 때도 집에 들어오는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같이 지낸 기억이 거의 없었어요. 아빠는 원래 말도 적었어요. 저도 말이 별로 없어서 특별한 기억이 별로 없어요. 아빠와 시간을 가장 많이 보낸 건 제가 초등학교 육상부 있을 때예요. 초등학교 4학년 때 함덕에서 표선으로 이사 갔다가 다시 함덕으로 돌아왔어요. 학교에서 육상부를 모집하기에 얼떨결에 육상부에 들어갔고 대회까지 나가게 됐어요. 그런데 육상부 코치가 전문적으로 교육받은 분이 아니어서 훈련이 체계적이지 못했어요. 어쩌다가 아빠가 학교에 오셔서 또래 육상부 아이들을 무료로 가르치게 됐어요. 아빠가 과거 마라톤 선수를 했거든요. 결국 우리 육상부가 대회 나가서 우승도 하게 됐어요. 당시에 저는 북제주군 대표로 뽑혀 도 대회에 나가 입상까지 했어요. 사실 달리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정확히는 아빠와 연습하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대회 훈련 준비할 때 아빠는 밤에 운동을 나가자고 해요. 대흘이라는 곳에서 함덕까지 오는 길이 있는데 밤에는 가로등도 없는 깜깜한 길이에요. 불빛이 없으면 그야말로 칠흑같이 어두워요. 그 도로를 밤에 달리는 거예요. 제가 달리면 아빠와 동생은 차에 타서 라이트 불빛을 비춰줘요. 그 라이트 불빛에 의지해 앞으로 달리는 거죠. 만약 뛰는 속도가 늦춰지면 저를 앞질러서 그냥 달려가요. 제가 그 차를 못 따라가면 저를 놔두고 저만큼 가버리는 거예요. 그럼 저는 무서워서 울면서 뛰어요. 진짜 엄청 울었어요. 아무것도 안 보여요. 그렇게 연습해서였는지 몰라도 처음 대회 나갔을 때는 꼴찌 했던 제가 그다음 대회에서 동메달도 따고 은메달도 따고 했어요. 육상 훈련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처음에는 대표로 나가서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것이 굉장히 좋았어요. 그리고 운동할 때만큼은 아빠 목소리가 잘 들리더라고요. 예전에 역전마라톤에도 나간 적이 있어요. 용담해안도로를 다섯 구간으로 나눠서 남학생 3명, 여학생 2명이 나눠서 뛰는 대회예요. 제가 4번째 구간을 맡아서 뛰는데 도로를 달리니까 사람들이 도로에 나와서 응원하느라 엄청 시끄러웠어요. 그 와중에 다른 사람 목소리는 안 들리고 아빠 목소리밖에 안 들려요. "뛰어! 빨리 쳐!" 이런 소리만 들려요. 아빠가 응원하던 소리만 기억나요.

딸들이 원하면 무조건 오케이

아빠는 사람마다 스타일을 파악해서 잘 가르쳐 줘요. 운동했던 아이들 중에는 우리 집에까지 찾아와서 운동 가르쳐 달라고 한 아이들도 많았어요. 그때는 아빠가 함덕 킹마트에서 일할 때라 일도 바쁜데 아이들 오면 다 가르쳐 주더라고요. 그렇게 자상한 사람이에요. 특히 아빠는 딸들이 뭔가 하고 싶다고 하면 전폭적으로, 무조건 지지하는 사람이에요. '안 돼'가 없어요. 딸들이 하고 싶다 하면 무조건 오케이 하는 사람이에요. 한 번은 제가 합창단을 너무 하고 싶었거든요. 초등학교 4학년 때 저희 집이 표선에 있었는데 CBS 합창단 연습이 있을 때마다 아빠가 운전해서 표선에서 제주시 터미널까지 태워다 줬어요. 딸이 합창단을 하고 싶다니까 1시간 넘는 그 길을 매번 태워다 주고 태워오고 그렇게 해 주는 거예요. 초등학교 4학년부터 중학생 때까지 합창단을 했는데 아빠가 태워다 주고, 합창단 연습 기다렸다가 다시 태워서 표선으로 가곤 했어요. 제 기억으로 집이 부유하지 않아 경제적으로는 힘들게 살았지만 우리를 기죽지 않게 키우려고 노력하신 것 같아요. 엄마는 제 생각에는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에요. 제가 정말 닮고 싶은 사람이 엄마라고 할 정도로 엄마는 정말 현명해요. 특히 딸과 아빠의 관계를 중간에서 잘 연결해 줘요. 친구들만 봐도 아빠가 말이 별로 없으면 아빠하고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우리 집은 그렇지 않았거든요. 예를 들어 어릴 때 제가 뭔가를 사고 싶다고 하면 엄마는 꼭 아빠가 사주도록 했어요. 엄마는 살짝 악역을 맡았다고 할까요. 뭔가 사고 싶다고 하면 아빠가 안 된다고 할 분은 아니었지만, 꼭 아빠가 아이들 원하는 것을 해주게 하셨어요. 지금 아빠와의 관계는 엄마의 노력이에요. 중간에서 정말 많이 애써주셨어요. 시험 기간이 끝나면 아빠 화물차 타고 같이 배 타고 나가서 육지에 갔다가 오고는 했어요. 동생은 여기저기 다닌 것을 다 기억하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잘 기억을 못 해요. 저는 어릴 때부터 차만 타면 자는 버릇이 있거든요. 그 화물차가 굉장히 편해요. 운전석 뒤에 누울 수도 있게 되어 있는데, 두세 사람 누울 정도로 넓었어요. 거기서 몇 시간도 자요. 아빠도 말이 많지 않고, 저도 말을 잘 안 해요. 그래서 같이 화물차를 타고 다녀도 그렇게 특별한 기억은 없어요. 그래도 같이 다녔다는 기억은 참 많아요. 집에서도 엄마, 아빠, 저 이렇게 밥을 먹으면 엄마가 75%, 제가 24%, 아빠가 1% 정도 이야기해요. 그렇게 말을 하지 않아도 어색하다거나 아빠와 친하지 않다는 느낌은 없어요. 운동할 때 빼고는 아빠는 말을 많이 하지 않아요. 아빠는 필요 없는 말은 굳이 하지 않거든요. 친구들은 부모님이 잔소리 많이 한다고 하는데 아빠는 그런 잔소리도 없어요. 공부를 못한다, 시험지 가져와라 이런 말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어요. 저도 막 그렇게 말을 잘하는 성격이 아니거든요.

소방관 되겠다고 다짐했지만

어릴 때부터 경찰·소방 일을 하는 게 꿈이었어요. 경찰이 되고 싶어서 고등학교 때 경찰 관련 공부를 했어요. 그런데 그 해에 제주도에서 여자 경찰을 너무 적게 뽑았어요. 그래서 뽑힐 가망이 거의 없어 보였죠. 그때 한라대학교 야간 대학교 학생회장을 맡고 있던 삼촌이 한라대학교 응급구조학과를 소개해 줘서 진학하게 되었죠. 입학해서 보니 생각보다 정말 재밌었어요. 고등학교 때는 함수 같은 공부를 해도 막상 실생활에서 써먹을 데가 없어서 공부가 재미없었는데, 응급구조학과는 배울수록 너무 재밌는 거예요. 사람을 살리는 일이니 배워두면 좋기도 하고요. 소방관이 되더라도 응급구조사로 일할 수 있고, 병원에 들어가더라도 그곳에서 응급구조사로 일하면서 먼저 환자들을 돌볼 수 있으니까 뭔가 뜻 깊은 일이더라고요. 대학에서 진짜 열심히 공부했어요. 2학년 때까지도 해수욕장 안전요원 아르바이트를 할 정도의 여유는 있었는데, 3학년 때부터 병원·소방 실습을 하느라 아르바이트할 시간이 없었죠. 병원 실습은 정형외과·응급실·수술실·중환자실 이렇게 나눠서 한 달씩 실습을 나갔어요. 중환자실에서는 중환자들을 돌보고 수술실에서는 수술하는 것을 참관했어요. 소방서 실습은 소방차 타고 같이 나가는 거예요. 소방서 구급차 실습할 때에는 함께 차에 타고서 환자 심폐소생술을 해요. 소방서 실습할 때 꼭 소방관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한번은 초등학생 아이가 119에 신고를 해서 출동한 적이 있어요. 신고 내용은 아빠가 넥타이로 목을 맸다는 것이었어요. 출동해서 상황을 수습하고 환자를 병원에 내려주고 돌아오는데 정말 뿌듯하더라고요. 환자를 직접 마주할 때는 힘들지만 병원에 입원시키고 나면 그렇게 뿌듯하더라고요. 그래서 실습할 때는 너무 재밌었어요. 사고 현장을 보는 건 힘들지만 결국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더욱 소방관이 되고 싶었죠. 그렇게 재밌게 응급구조학을 배우던 저에게 시련이 찾아왔어요. 갑상선 수술을 하면서 공부하기가 어려워진 거예요. 실습도 다 채우지 못해서 중환자실만 3개월 실습을 나갔어요. 나중에 세월호 참사 나고 나서 아빠가 아파 병원 응급실 갈 때마다 저희 동기들이 있더라고요. 아빠 일 터져서 응급실 가면 제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동기들이) 상황을 다 알죠.
함덕 집에 살 때였는데 해수욕장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몸살이 나기 시작했어요. 이것저것 치료해 봐도 차도가 없고 시간이 지나 겨울이 되었는데도 너무 더웠어요. 겨울에 반팔을 입을 정도로 몸에서 열이 났어요. 결국 노형오거리 서울외과 의사 선생님을 찾아갔는데 제 목을 보시더니 빨리 큰 병원에 가보라고 하시더라고요. 큰 병원에 갔더니 갑상선기능항진증이라는 진단이 나왔어요. 병원에서 지어준 약을 먹었는데도 잘 낫지 않더라고요. 처음에는 수술하지 않으려고 운동도 했어요. 원래 항진증은 체중이 빠지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저는 반대로 체중이 엄청나게 느는 거예요. 아빠가 운동시키려고 오름 같은 곳을 데리고 갔는데 거기서 제가 토하고 얼굴도 하얗게 질려 버렸어요. 그래서 아빠가 저를 병원에 데려갔더니 병원에서 딸 살리고 싶으면 빨리 수술해야 한다고 했어요. 엄마가 바로 수술을 결정했죠. 수술을 할 때는 후유증이 심하게 남을 줄 몰랐어요. 제주대학교 병원에서 수술을 했어요. 수술 후에 칼슘이 떨어지는 후유증을 앓게 되었는데 칼슘이 적어지면 몸에 마비가 오기 시작해요. 손과 발, 얼굴 전체에 마비가 와요. 마비가 지속되면 숨을 쉴 수가 없을 정도예요. 그래서 수술 후에도 정상적으로 퇴원을 하지 못했어요. 약도 듣지 않을 정도로 통증과 마비가 심했어요. 보통 사람들 먹는 칼슘 약의 2~3천 배를 먹어도 칼슘 수치가 올라가지 않아요. 마비가 시작되면 뭐랄까, 팔다리가 잘리는 느낌? 오그라드는 느낌? 그러면서 팔다리를 칼로 써는 통증이라고나 할까요? 마비가 시작되면 누군가 옆에서 팔다리를 막 주물러줘야 했어요. 통증으로 사지가 찢겨나가는 느낌이었어요. 한 번은 칼슘을 잘못 맞아서 혈관이 막혀 또 수술하기도 했어요. 칼슘 약을 먹으면 4~5일 화장실을 못 가는 부작용도 있어요. 저 같은 후유증은 외국에서도 몇 건 안 되는 희귀한 사례래요. 이걸 치료하려면 외국에 나가서 치료받아야 한대요. 물론 돈도 몇 억 원이 들어간다고 하니 엄두도 못 내죠. 갑상선 약과 칼슘 약은 평생 먹어야 한대요. 갑상선은 호르몬 문제라 조금만 피곤해도 힘들고, 머리도 막 빠지고, 잘 붓기도 했어요. 원래 학교도 1년을 못 가고 했는데 교수님들이 편의를 많이 봐주셨어요. 평일에는 실습 가고 주말에는 입원하고 그랬어요. 그렇게 수술 후 회복하고 치료하던 중에 세월호 참사가 터진 거죠. 갑상선 수술을 받고 그해 12월 응급구조사 국가고시를 준비했어요. 그러고 나서 다음 해 소방관 시험을 또 준비하고 있었죠. 그때 마침 할머니가 다치셔서 우리 집에 와 계셨다가 가셨어요. 고모도 다치셔서 할머니에 이어 집에 와 계셨죠. 동생은 학교 가고 엄마와 아빠는 일 다니니 결국 제가 할머니나 고모를 돌봐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할머니 밥 차려드리거나 화장실 가실 때 모셔다 드리고 하니 시험공부가 제대로 될 리가 없죠. 그때가 졸업하고 처음 소방시험 볼 때였으니까요. 첫 소방시험 보던 그 해에 세월호 사고가 일어났어요. 정확히는 소방시험 보기 전전날 세월호 참사가 났어요. 그래서 시험 보러 가지 않으려고 했어요. 다른 사람들은 막판 스퍼트를 올려 공부할 때 저는 아빠 생사를 걱정해야 했고, 아빠 건강에 신경 써야 하다 보니 시험 보는 의미가 없었어요. 그래서 소방시험을 포기하려고 했는데 동기들이 시험 보러 가자고 자꾸 설득해서 결국 시험을 보기는 했죠. 시험을 보긴 했는데도 그냥 좀 아빠 생각이 많이 나더라고요. 아빠 성격이 엄청 여리다는 것도 알고 있고, 워낙 아이들을 좋아하는 아빠인데 그런 일을 겪고 나니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더라고요. 세월호에 아빠가 타고 있다는 것은 엄마 전화를 받고 알았어요. 아침에 시험공부하고 할머니 아침을 챙겨드리고 있는데 엄마에게 뉴스를 보라는 전화가 왔어요. 아빠가 세월호에 탔는데 그 배가 지금 침몰하고 있다고 하는 거예요.
* 세월호 생존자들에게 힘이 되어주세요. 여러분이 주시는 '좋은기사원고료'는 전액 피해생존자와 그 가족들의 구술 채록 작업에 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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