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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학점제를 만병통치약처럼 선전하는 이들에게

[주장] 고교학점제, 공부와 진학 강요하는 구시대 교육의 세련된 반복

등록 2021.03.06 16:16수정 2021.03.06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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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는 지난 2월 17일 ‘고교학점제 종합 추진계획’을 발표했다. ⓒ 교육부

 
교육부가 지난달 17일 '고교학점제 종합 추진계획'을 발표한 후 여러 가지 평가가 나왔다. 2017년 11월 27일 교육부가 처음 고교학점제 추진 방향과 연구학교 운영 계획을 발표했을 때부터 교육계에서는 기대와 우려가 교차했다.

2월 17일 보도자료에서 교육부는 고교학점제를 "학생이 공통과목 이수 후, 진로·적성에 따라 과목을 선택하여 이수하고, 이수기준에 도달한 과목에 대해 학점을 취득·누적하여 졸업하는 제도"라고 규정했다.

교육부 정의에 따르면 고교학점제 핵심은 두 가지다. 학생의 과목 선택과 과목별 이수 기준 충족이다. 지금도 과목 선택을 최대한 늘리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결국 고교학점제의 가장 큰 특징은 이수 기준을 더 까다롭게 바꾸는 데 있다.

이수 기준은 학년 진급과 졸업 요건이다. 지금은 학생이 출석해야 하는 날의 2/3 이상 학교에 가면 학년이 올라가고 졸업할 수 있다. 하지만, 고교학점제가 시행되면 출석 일수를 채우는 것에 더해 과목 점수가 40점을 넘어야 한다.

처음부터 학년 진급을 막는 유급을 하고 졸업을 시키지 않는다면 사회적 파장이 커질 것이다. 교육부도 이점을 염려했는지 영어 단어 Incomplete의 첫 글자 I등급을 받은 미이수 학생은 보충수업을 하면 된다고 밝혔다. 미이수 과목을 다음 학기나 학년도에 다시 수강하는 유급은 "장기적으로 도입을 검토"하겠다고 미뤘다.

논란인 고교학점제 성공 여부, 우리 여건 적합성 정도, 대학입시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하기 전에 할 일이 있다. 교육부가 밝힌 고교학점제 정의에 들어있는 두 가지 핵심 내용에 대한 논의가 우선돼야 한다.

고등학교에서 진로 결정을 꼭 해야 하나?
 
"학생이 공통과목 이수 후, 진로·적성에 따라 과목을 선택하여 이수하고, …" - 교육부 2월 17일 보도자료
 
교육부는 학생의 과목 선택을 진로와 연계한다. 안타깝게도 고등학교에서 진로 결정은 대학 진학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교육부는 고교학점제 종합 계획 발표 보도자료 첫머리에 '고교학점제 연구·선도학교 사례' 세 가지를 소개했다. 다음은 그 가운데 두 가지다.
 
"국제고 진학이 꿈이었지만 집 근처 고교학점제 연구학교가 있다고 해서 입학했다. … 2학년 문예창작과 영미문학 수업을 통해 글 쓰는 힘을 기를 수 있었고, 외국어로도 글 쓰는 꿈이 생겨, 3학년에는 스페인어와 교육학을 들을 예정이다. (수도권 A고 학생 심OO)"


"특히 고1부터 적성을 탐색하고 진로 관련 폭넓은 학습 경험 덕에 2021학년도 대학 진학률이 늘고, 졸업 후에도 진로를 이어가겠다는 학생들이 많아졌다. (비수도권 B고 교사 정OO)" - 교육부 2월 17일 보도자료
 
두 가지 사례의 공통점은 진로와 과목 선택의 연결이다. 진로가 진학과 맞닿아 있다는 점도 비슷하다. 두 번째 사례는 대놓고 적성과 진로 탐색을 대학 진학에 직접 연결했다. 첫 번째 학생 사례도 자세히 보면 크게 다르지 않다. '외국어로 글 쓰는 꿈'을 가지고 스페인어를 듣겠다고 밝힌, 국제고 진학을 고민했던 학생이 대학 진학과 거리가 멀다고 보기는 어렵다.
 
"진로를 너무 일찍 정하라고 한다. 나는 진로를 못 정했다. 그런데 '진로가 뭐냐?', '어느 대학 무슨 과를 가고 싶냐'고 자꾸 묻는다. 나이 들어서 바꾸는 사람도 있는데, 고등학교 2학년이 아직 진로가 없다고 무슨 큰 잘못인 것처럼 말한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이야기하는 시간에 한 학생이 쓴 내용이다. 학생이면 당연히 학교 공부를 해야 하고, 이왕이면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사회에 퍼져 있다. 그러다 보니 학생을 보면 공부 이야기를 꺼내고, 고등학생을 보면 희망 대학과 진로를 묻는다. 사회와 학교가 이른 나이에 진로를 결정하도록 닦달한다.

고교학점제는 진로 결정을 전제로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설계했다. 그런데 과연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에게 진로 결정을 강요해도 괜찮은가? 고등학교 시기에 진로를 결정하지 않으면 잘못이냐고 되묻는 학생의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가?

진로 결정이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모든 학생에게 진로를 결정하라고 분위기를 만들고 교육과정을 설계해 강제하는 일은 전혀 다른 차원의 심각하게 따져볼 문제다. 성적 상위권 학생들, 부모의 경제적, 문화적 자본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학생들은 일찍부터 자기 미래 직업을 결정한다. 진로를 위해 선행학습을 하고, 각종 수업 이외의 체험을 디자인하며 학교생활기록부를 채운다.

교육부가 보도자료에서 굳이 국제고 진학을 고민했던 학생의 말을 옮긴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교육부 고교학점제 계획도 결국 공부 잘하는 학생, 이른바 '인 서울'이나 'SKY' 진학 학생을 가장 염두에 두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교육 당국이 정책 설계 단계에서부터 진로 결정을 하지 못한 학생, 공부 이외의 다른 진로를 고민하는 학생, 진학 이외 다른 선택을 생각하는 학생들을 소외시킨 것이다.

이른 진로 결정 강제는 현실과도 거리가 있다. 영화 <기생충>을 만든 봉준호 감독,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쓴 조남주 작가의 대학 전공은 사회학이다. 여러 권의 글쓰기 관련 책을 쓴 작가 유시민의 전공은 경제학이다. 자주 이름이 오르내리는 유튜버들이 고등학생 시절 지금의 직업을 정해놓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수많은 사람이 나이가 들어서 진로를 바꾸고 새로운 꿈을 꾼다. 사회 변화에 따라 새로 생긴 직업을 선택할 수도 있고, 생각지 못한 곳에서 자신의 길을 찾을 수도 있다. 진로를 변경하거나 자신의 적성을 늦게 찾는 일이 결코 흠이 될 수는 없다.

40점 못 넘으면 학교 다니는 의미 없나?
 
"이수기준에 도달한 과목에 대해 학점을 취득·누적하여 졸업하는 제도" - 교육부 2월 17일 보도자료
 
교육부가 밝힌 고교학점제 정의에 들어있는 두 번째 핵심 내용이다. 과목별로 40점이 넘어야 진급이나 졸업을 할 수 있다. 학교에 꼬박꼬박 나가더라도 한 과목이라도 40점이 안 되면 졸업할 수 없다. 공부를 못하면 학교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교육부가 진급과 졸업을 막는 유급제도 시행을 장기 검토 과제로 미뤘지만, 고교학점제 정의는 학교 졸업의 제일 중요한 조건으로 '공부'를 내걸었다. '학교는 글자 그대로 배우는 곳이니, 공부를 못하면 학교는 의미가 없다'라고 주장하는 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쉽게 동의하기 어려운 의문이 뒤따른다. 학교는 공부만 하는 곳인가? 점수가 낮으면 배움이 없는 것인가?

우리 사회는 코로나19를 겪으면서 학교의 목적과 역할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확진자 수가 날마다 수백 명씩이지만 교육 당국은 학생 등교를 확대했다. 작년과는 다른 모습이다. 국민 대다수도 이런 방향에 동의한다. 왜 코로나19 확산 1년 만에 학교는 가지 말아야 할 곳에서 되도록 가야 할 곳으로 바뀐 것일까?

코로나19로 학교가 문을 닫으면서 학원이나 인터넷 강의와 다른 학교만의 목표와 역할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학교는 교과 공부만 하는 곳이 아니다. 온라인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비록 마스크를 쓰고 있더라도 친구들이나 선생님과 만남이 주는 중요한 교육적 의미와 영향이 있다. 관계 맺기와 공동체 생활이 주는 배움이 존재한다. 교과 공부도 협력적 관계와 소통이 이루어질 때 더 잘 이루어진다.

점수는 배움의 수준을 표현하는 한 가지 방법일 뿐이다. 그것도 정확하지 않은 수단이다. 학생이 사회 현상을 이해하는 기본 개념과 원리를 잘 알고 특정 사례에 정확하게 적용할 수 있다고 해서 사회 교과의 중요 목표인 민주적인 시민이 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점수는 높지 않아도 삶으로 체득한 노동법의 내용과 한계를 누구보다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학생도 있다. 사람이 가진 다양하고 복잡한 지적 능력을 교육과정 성취기준 도달 여부로 판단할 수 없을 때가 훨씬 더 많다.

그나마 교육과정이라는 것도 불완전하다. 삶과도 거리가 있다. 새로운 분야나 특정 학문의 새로운 이야기를 전혀 담고 있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교육과정에 진리가 녹아 있지도 않다. 교육과정 결정 과정에서 매번 교수들을 포함한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손익계산에 따라 자신이 속한 분야를 더 많이 넣으려고 서로 목소리를 높인다. 과목이 새로 만들어지거나 이름을 바꾸는 일도 흔하다. 때로는 정권이나 자본의 주장이 강하게 반영되기도 한다.

기준 자체가 불완전하다는 말이다. 학업성취 수준이 40%가 되면 졸업해도 되고, 39% 이하이면 안 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어떻게 교육적인 접근인가? 점수만 놓고 따지더라도 10점에서 30점으로 향상된 학생의 학업성취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인가?

모든 학생이 정해진 기준만큼 성취하도록 배움을 이끌어가는 것이 교사의 책임이라는 주장은 성립할 수 있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점수가 모자라니 다시 배우라고 강요하거나 학교를 나갈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많은 교육적 문제를 안고 있다. 졸업 요건을 강화하고 특정 기준에 미달하면 배움을 인정하지 않는 고교학점제는 '공부 강요'의 세련된 버전이다. 아무리 아름답게 포장하더라도 '공부와 진학을 강요하는 구시대 교육'일 뿐이다.

배움은 강요로 이루어질 수 없다. 공부 강요를 통해 점수를 높일 수는 있을지 몰라도 배움의 재미를 느끼게 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 중·고등학생들의 학업성취 수준은 세계 최고인데, 흥미는 바닥이라고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 새로운 교육, 교육 혁신의 목소리가 크게 들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교육부는 2월 17일 보도자료에서 "고교학점제 도입은 … 우리나라 고등학교 교육의 근본적 패러다임 전환을 위한 핵심 국정과제"라고 밝혔다. 고교학점제로 대학입시 경쟁교육의 상징인 고등학교 교육을 근본적으로 바꾸겠다는 야심 찬 포부다. 학교혁신에 관심을 보이던 일부 학자들도 비슷한 주장으로 고교학점제를 찬양하곤 한다.

하지만 진로 결정과 공부를 강제하는 교육으로는 배움을 끌어낼 수 없다. 세계 최고 수준의 학습 노동에 시달리는 학생들의 삶은 더욱 고단해질 수밖에 없다. 고등학생은 좀 편안하게 친구들이나 선생님들과 현재의 삶을 즐기면 안 되는가? 미래를 꼭 준비해야 하는가? 점수 40점이 안 된다고 '불완전하다(Incomplete)'라는 낙인이 찍혀야만 하겠는가? 이것이 진정 우리가 바라는 새로운 교육인가?

'꿈'이 가정환경을 드러내는 표식인 사회 바꿔야!
 
"청소년들에게 누가 무슨 꿈을 꾸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가정배경'과 '계급적 지위'를 알려주는 하나의 지표이자 표식으로 기능한다."
 
김수정·차영화·최샛별이 2020년에 "불평등한 미래: 청소년의 '꿈', 지위 표식이 되다"라는 제목으로 <한국사회학>에 발표한 글 일부다. 진로를 결정하라고 진로에 따라 과목을 선택하는 권리를 주겠다고 호들갑을 떨기 전에, '꿈'이, '진로'가 자신이 속한 계층을 드러내는 사회를 바꾸는 것이 먼저여야 하지 않을까?

우리나라 학생들이나 청년들이 진로를 결정하지 못해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기회를 한 번만 주고 넘어지면 다시는 일어설 수 없게 짓밟고 벼랑으로 내모는 사회 시스템 때문에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공교육은 학생들에게 충분히 고민하고 생각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 실패할 기회를 만들어 줘야 한다. 그것이 국가의 책임이다. 고교학점제는 안 그래도 조급하게 내몰리는 학생들을 더 세게 떠밀 가능성이 크다.

고교학점제를 주장하는 교육부나 교육청 정책 결정자들과 학자들은 입시 경쟁교육으로 힘들어하는 고등학생들을 안타깝게 여긴다고 말한다. 학습 노동에 찌들어 자신의 적성을 찾지 못하고 진로를 결정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걱정한다는 그들의 진심까지 의심하고 싶지는 않다. 공부가 힘든 학생들에게 가장 큰 도움은 부담을 줄이고 쉬면서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이다. 또 다른 방법으로 진로 결정과 공부를 강요하는 것은 고교학점제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문제라고 지적한 행위를 반복하는 짓이다.

문득 수십 년 전부터 학점제를 시행하고 있는 우리나라 대학들이 배움에 충실하지 못하다거나 기업에 휘둘려 학문을 팽개치고 있다는 이야기가 자주 들리는 이유가 궁금해진다. 학점제를 교육 문제를 해결하는 만병통치약처럼 선전하는 이들에게 부탁한다. 제발 학점제로 운영되는 대학생들의 삶을 한 번 들여다보면 좋겠다. 공부와 취업 준비에 더해 학비 마련을 위한 아르바이트까지 하느라 그들의 하루하루는 너무 고단하다.
#고교학점제 #교육부 #진로 결정 강요 #40점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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