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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를 민회로 바꾼다면? 올바른 언어를 써야하는 까닭

[내가 쓴 '내 인생의 책'] '소준섭의 정명론'

등록 2021.03.09 13:54수정 2021.03.10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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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언어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낸다. '개념'의 언어적인 외피(外皮)가 곧 '말(語)'이다. '언어(言語)'의 '언(言)'이란 '직접 말하는 것'을 가리키며, '어(語)'란 '의론하고 반박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언어라는 도구에 잘못이 존재하게 되면 개개인의 삶과 사회 전체에 걸쳐 커다란 문제점이 초래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올바른 언어에 대한 선택과 사용 그리고 이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사회적 약속 이행의 시작이다.

언어는 우리의 사고방식을 규정한다

언어란 개념을 담는 그릇으로서 언어 생활은 인간의 사고방식을 구체적으로 규정한다. 어떤 한 특정한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그것이 우리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은 상상 외로 크다.

서울 9호선에 가면 '급행'열차를 탈 수 있다. 그런데 이 '급행'이란 말은 그렇지 않아도 매일 같이 '빨리 빨리'를 외치며 숨 쉴 틈조차 없을 만큼 사는, 아마 세계에서 가장 바쁘게 몰리면서 살고 있는 한국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급하게 만드는 데 일조하는 용어다. '비상구(非常口)'라는 용어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이 '비상구'는 대부분 전혀 '비상(非常)'하지 않고 보통 출입하는 문일 뿐인데, '비상구'라는 아주 특수한 명칭을 붙여놓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굳이 급하고 불안한 마음을 갖게 만든다.

만약 '국회(國會)'를 '민회(民會)'라는 이름으로 바꾼다면, 그로 인해 커다란 변화가 발생하게 될 것이다. 또 '대통령'이라는 명칭을 원어 president 그대로 '의장'으로 바꾼다면 우리 사회에 적지 않은 변화가 올 것이다.

'명칭'과 '내용'이 부합되지 못하면 농단되고 왜곡된다 
 

책 '정명론' 표지. ⓒ 어젠다

 
필자가 올바른 말과 정확한 명칭, 정명(正名)에 주목하고 <정명론>이란 책까지 낸 까닭은 바로 필자가 근무하던 일터의 현실에서 비롯됐다. 사람들은 국회도서관이 무슨 위상을 지니며 어떤 기능을 수행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심지어 도서관 직원들도 모르고 국회의원들도 모른다.

국회도서관이란 한 마디로 일반 도서관이 아니라 의원들을 지원하기 위한 입법지원기구다. 의회도서관의 모델인 미국 의회도서관은 연구원이 사서를 지휘하는 구조다. 그러나 우리 국회도서관은 거꾸로다. 연구 분야 직원들은 하위에 놓인 채 승진도 할 수 없다. 이래서는 명실상부한 국회도서관일 수 없다.


국회사무처에는 '전문위원'이 존재한다. 그런데 우선 '위원'이라는 용어는 국회법 제48조(위원의 선임과 개선) 및 동법 제60조(위원의 발언) 조항에서 명백히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본래 국회의원만을 지칭하는 용어로서 국회의원 이외의 국회 조직 내부의 공무원이 '위원'이라는 명칭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또 이들 '전문위원'은 외부의 전문가가 아니고 순환 근무하는 국회 공무원이다. '전문'이란 명칭은 부합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부합되지 않은 명칭을 토대로 해 마침내 국회 구조에서 군림한다. 법원의 비선실세로서 법원행정처도 크게 이슈화됐었다. 국회사무처나 법원행정처는 그 이름 그대로 당연히 사무 및 관리(administer)라는 그 본연의 업무에 충실해야 한다. 거꾸로 이른바 '비선실세'로 음지의 권력이 된다면, 그 조직은 농단될 수밖에 없고 결국 조직은 왜곡된다.

명(名; 이름)과 실(實; 내용)은 올바르게 부합해야 한다. 이름, 명(名)과 내용, 실(實)이 부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일종의 '상표 사기'다. 우리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언어들이 사물의 '실질'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않은 채 은폐하거나, 허장성세의 추상적이고 개괄적이며 모호한 빈말, 이른바 허언(虛言)과 공론(空論)이 언어생활의 주류를 이룬다면, 사회구성원들의 생각과 감각은 조잡해지고 혼란스럽게 돼 결국 전체 사회가 왜곡될 수밖에 없다.

언어는 민족 정체성과 국가 주권의 중요한 요소

용산 국방부 옆에는 '국방컨벤션'이란 건물이 서 있다. 그런데 이 '국방컨벤션'이라는 말과 민족 정기를 갖춘 자주적 군인의 이미지는 양립하기 어렵다.

언어는 민족 정체성(identification)의 중요한 기준이다. 왜냐하면 공통의 언어가 민족 성원 간의 의사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대전제(大前提)이며, 동시에 언어란 구성원들의 정체성 및 사고방식 그리고 심성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민족문화란 말, 즉 언어를 바탕으로 하여 이룩되는 것이며, 말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고서는 민족문화와 민족정신이 제대로 설 수 없다. 자국어의 지위에 대한 재확인은 국가의 하나 됨을 상징하고, 언어는 그것이 지니는 사회에 대한 지배력을 토대로 하여 시민 생활에 있어 모든 사람의 완전한 통합을 이끄는 힘으로 작용한다. 그리하여 언어는 국가 주권의 주요 구성요소이며 사회연대를 위한 중요한 조건이 된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 언어의 사회성을 강조하면서 일본식 용어들이 결국 우리 언어 발전에 도움이 됐다는 주장도 나온다. 일본의 조선 침략과 식민지 지배가 한국의 산업화와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의 '언어판(言語版)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그러나 일본에 대한 언어의 의존 혹은 종속 현상은 비단 과거의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현재진행형이다. 지금도 '최애(最愛)' '재택근무' '택배' 등의 일본 용어들이 직수입되어 사용되고 있다. 특히 일본에서조차 부정적 이미지가 강한 '덕후'라는 말이 우리 사회 도처에서 무분별하게 사용되고 있는 현상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올바른 언어를 선택하여 사용하고 또 노력해나가는 것은 우리 시대 '깨어있는 시민'에 부여된 중요한 임무다.
#소준섭 #정명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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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관계학 박사, 국회도서관 조사관으로 근무하였고, 그간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 등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해왔다. <이상한 영어 사전>, <변이 국회의원의 탄생>, <논어>, <도덕경>, <광주백서>, <사마천 사기 56>등 여러 권의 책을 펴냈다. 시민이 만들어가는 민주주의 그리고 오늘의 심각한 기후위기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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