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위한 작은 불씨, 화백회의

[서평] 토론의 전사 10: 화백회의와 직접 민주주의

등록 2021.03.10 09:31수정 2021.03.10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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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신고리 원전 5, 6호기 건설 공사의 중단 여부를 둘러싼 공론화 과정은 우리나라 토론 역사에 한 획을 그을 만한 사건이었다. 대선 공약 사항이었던 원전 공사 중단이 3개월간의 공론화 과정을 거쳐 공사 재개로 뒤집어진 것이다.

공론화 과정에서 일종의 '국민 대표'로 선정된 471명의 시민참여단은 2박3일 간 합숙 토론을 하며 원전 건설 공사를 중단할 것인지 재개할 것인지를 토론했다. 그리고 정부는 이들의 결론을 수용했다. 이는 국민 토론을 통해 정부 정책을 결정한 첫 경험이자, 숙의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개념을 탄생시킨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토론 교육의 시조새 격인 유동걸 선생이 토론이라는 화두와 처음 만난 것이 2000년 여름 고등학생들의 원탁토론대회였음을 생각하면, 우리 사회 토론 문화의 놀라운 성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사회적 갈등의 해소나 정책 결정에 주민 참여를 위한 공론화의 시도는 이미 2000년대부터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나 국가적 차원에서 공론화를 정책 결정에 도입한 것은 현 정부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 공론화 과정은 그 효과와 한계에 대한 숱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이제 막 성년에 진입한 우리 사회 토론 문화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드러내 주는 것이기도 했다.

일찍이 참여정부 시절 노무현 대통령이 제기한 토론공화국의 부활이랄까, 토론을 국정 운영의 기반으로 삼고자 한 현 정부의 노력은 다시 대학입시제도 개편 공론화로 이어졌다. 400명의 시민참여단이 학습과 토론, 의견 조사를 거쳐 대입 제도 개편 권고안을 정부에 제출했다. 그러나 이 토론은 신고리 원전 때보다 더 많은 논란을 낳았다.

지방정부에서의 공론화 사례도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다. 갈등을 봉합하고 사회적 합의에 도달한 경우를 찾기가 쉽지 않다.

토론을 통한 숙의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와 환호도 잠시, 이제 더 이상 토론은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지 못하는 것 같다. 토론 프로그램은 지루하고 토론 대회는 뻔한 주제에 맥이 빠져 있다. 학교에서는 '토론을 가르쳐 놨더니 애들 말발만 늘었다'는 한탄이 들린다. 토론의 가치, 토론이 열어주는 가능성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토론의 전사 10: 화백회의와 직접 민주주의' 책 표지 사진 ⓒ 한결하늘

 
책 <토론의 전사10> 저자 유동걸 교사의 문제의식도 이와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유동걸 교사는 이 책의 1부에서 이렇게 말한다.
 
"토론의 이상적 기능을 완벽하게 구현하는지는 아직 의문이지만 토론을 통해서 합리적인 의사소통과 바람직한 문제 해결 능력을 찾아내기 위한 노력은 확산 일로에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진정한 토론의 시대는 오지 않았습니다."

"토론은 아직 미풍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태풍이 되어 토론을 통해서 진짜 자기 목소리를 발견하고 타인의 의견을 경청하는 존중과 배려의 문화가 꽃피기를 기원하며 그날을 향한 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2009년부터 전국국어교사모임에서 토론 연수를 기획, 진행해 왔으며 2012년 토론의 불모지와 같았던 우리 사회에 '토론의 전사 1'을 내놓으면서 토론 교육의 물꼬를 텄던 저자. 이번 책으로 그의 '토론의 전사' 시리즈는 10권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번 책 역시 우리 사회의 토론 문화가 봉착한 문제적 상황에 대한 가장 즉각적인 응답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가 걸어왔던 길이 우리나라 토론 교육의 역사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동안 토론의 가치와 의의를 신뢰하고 그 외연을 넓히기 위해 저자가 기울여 온 노력만큼이나 우리 사회 토론의 지평은 넓어졌다. 수많은 토론 관련 단체가 생겨났고, 토론 모임, 토론 연수, 토론 프로그램, 토론 대회, 토론 관련 서적 등 토론을 접할 수 있는 기회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아졌다. 원탁토론은 물론, 용어도 낯설던 디베이트 토론도 교육 현장에서는 이제 일상적인 교육 활동의 일부가 되었다.

그런데도 지금 우리 사회에서 토론은 여전히 어려워 보이고, 토론 문화는 근본적인 한계에 부닥친 것 같다. 이 책의 저자는 바로 그러한 한계를 출발점으로 삼아 새로운 화두를 건네고자 한다. 놀랍게도 그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고도 낯선 이름, 화백회의이다. 그렇다, 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 신라시대의 화백회의.

책은 전체 3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의 제목은 '토론에서 화백으로, 민주주의에서 직접 민주주의로'. 그리고 그 1부는 '서구식 토론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화백 회의로'라는 소제목으로 시작한다. 이 책이 우리에게 어떠한 해답을 주고자 하는지 그 의도와 방향이 읽히는 대목이다.

저자는 토론대회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서구식 대립 토론, 즉 디베이트에 대한 경계가 고민의 출발점이었다고 한다. 디베이트의 대결성, 경쟁성, 일방성, 공격성이 우리 사회의 토양에 적합하지 않다는 문제의식인 것이다. 디베이트를 주축으로 하는 한국의 토론 교육이 교육적으로 바람직한가에 대한 의문을 품어 오던 나로서는 화백회의가 그 대안이 될 수 있을지까지는 몰라도 저자의 문제의식에 동의하는 바이다.

화백회의에 대한 가장 간단한 설명은 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것이다. "신라 때에, 나라의 중대사를 의논하던 회의 제도. 의결 방법은 만장일치제로, 처음에는 경주의 육촌(六寸) 사람들의 회의였으나 뒤에는 진골 이상의 귀족들의 회의로 변하였다."

이 회의 제도의 가장 특징적인 점은 만장일치제라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주의의 기본 원칙은 다수결의 원칙. 물론 소수 의견의 존중이라는 조건이 따라붙지만 현실에서 이를 조화시키기는 쉽지 않다.

디베이트는 찬반 의견이 논박의 과정을 거치면서 한 의견의 손을 들어 주는 것이고, 다수결의 원칙 역시 토론의 과정에서 양적 다수를 설득하는 쪽의 손을 들어 주는 것이다. 그런데 만장일치라니? 그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다수의 의견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는 점이 다수결의 맹점이라면, 승복하지 않는 소수에게 발목 잡혀 탁상공론만 하게 될 수도 있는 만장일치제의 결점은 어찌할 것인가.

화백회의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거의 없다고 한다. 따라서 많은 부분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 여백을 메꿔 나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화백회의를 2021년의 우리 사회에 불러들이는 까닭은 이 회의 방법이 기존의 토론 모형에 비해 철학적 깊이가 있고, 한국적 전통 위에 있으며, 의사 결정 과정에서 소외되는 사람 없이 참가자 모두가 의견을 내면서 최선의 방안을 찾아가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저자는 화백회의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드라마 '선덕여왕'을 호출한다. 드라마 속 화백회의 장면을 예화로 취해 문제는 만장일치냐 혹은 다수결이냐 하는 제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최대 다수의 합을 이끌어내는" 데 있다고 말한다.

2부는 실제적인 화백회의의 현장들을 소개함으로써 뜬구름 잡기 같은 화백회의가 과연 무엇인지, 그 절차와 방법, 정신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 핵심은 화백회의가 기존의 토론 모형들에 비해 "토론 과정을 포함하면서 발문-브레인 라이팅-토의-토론-협상-조정 등이 다양하게 얽혀 있어 가장 고차원적이면서도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토론 모형"이라는 것이다.

3부는 화백회의의 현장 응용편으로, 초등, 중등 교실 수업에서의 사례를 비롯한 다양한 화백회의의 장면을 보여준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이 3부이다. 2부까지 읽고도 여전히 화백회의라는 뜬구름이 손 안에 잡히지 않아 조바심이 나던 차에 3부의 초등, 중등 사례를 접하게 되면 갑자기 심 봉사 개안하듯 눈앞이 밝아지는 느낌이 든다. 추상적으로만 다가오던 화백회의가 교실에서 구현되는 모습을 통해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생물로서의 화백회의를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자, 다시 처음의 문제의식으로 돌아가 보자. 책의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말한다. "이 시대에 토론이, 화백회의가 민주주의의 촛불 혁명을 살리는 작은 불씨가 되어 뭇 사람들의 심장을 울리는 양철북이 되기를" 바란다고. 이 책을 읽고 나처럼 화백회의를 교실에서 구현해 보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기 시작한다면 책을 쓴 저자의 의도는 성공한 것일 듯하다.

저자는 화백회의를 통해 자신이 찾아 헤매던, 가장 바람직하고 이상적인 토론의 원형에 도착했다고 말한다. 저자의 확신에 다 공감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이 책이 '토론이 해낼 수 있는 일'에 대한 새로운 논의의 출발점이 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토론의 전사 10 - 화백회의와 직접민주주의

유동걸 (지은이),
한결하늘,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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