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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도 방송국도 제약회사도... 대체 왜 이럽니까?

[신소영의 사소하지 않은 수다] 성차별 사례에 남을 또 하나의 사건

등록 2021.03.15 07:59수정 2021.03.15 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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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개봉한 영화 <삼진그룹영어토익반>에서 웃기지만 웃을 수 없었던 장면이 있다. 여직원들이 커피를 타는 장면. 아침마다 책상 정리를 하는 장면, 그리고 8년을 온갖 잡무를 떠 안으며 일했는데 다른 남성 직원들로부터 "애들"이라고 불리던 장면. 아마 그 장면들을 보면서 25년전 상황에 공감하는 여성들이 많았을 것이다.
 

ⓒ 롯데 엔터테인먼트

 
고졸이든 대졸이든 여성은 보조적 업무, 잡무를 맡아서 하던 때가 있었다. 나도 당연히 그랬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막 입사했을 때 부장은 "쌕쌕이 뽑아와" 하면서 동전을 던지기 일쑤였고, 알지도 못한 채 식사자리에 끌려 나간 적도 있다. 가서는 이상한 방석집이어서 기함을 토하기도 했다. 책상을 닦는 것도 일상이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질문이 생겼다.


'왜 자기 책상을 자기가 치우지 않지?'
'왜 차를 자기가 직접 마시지 않고 시키지?'
'왜 손님이 오시거나 했을 때 차 심부름은 여성이 해야 하지?'

그런 질문들이 올라올 때마다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결심했다. 내가 만약 관리자가 된다면 절대 시키지 않겠다고.

팀장이 되고 나서 드디어 때가 왔다. 사장님께서 우리팀 막내 직원에게 자꾸 커피 심부름과 개인 잡무를 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더 두고 봐선 안 되겠다 싶었지만 사장님께 건의를 한다는 건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 며칠 동안 말을 고르고 골라서 사장님께 말씀드렸고, 다행히 사장님은 받아들여 주셨다.

호칭도 문제였다. 사회 초년생 때 한 국장님이 나를 "신양아~"라고 부르는 바람에 소름이 끼친 적이 있다. 나보다 연배가 높은 분이니 참아야 하나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건 이해의 차원이 아니라 존중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터에서 내 존엄은 내가 지켜야겠다 싶어서 정중하게 요청을 드렸다. 그때도 얼마나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는지 모른다.

지금은 그런 갈등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운 나이가 되었지만, 돌아보면 업무에서부터 호칭까지, 참 많이도 싸웠다. 어디 나만의 일일까. 수많은 여성들이 영화속 여성들처럼 고군분투했을 것이다. 113년 전 여성들이 기본권을 주장하면서 싸움을 시작했던 그날처럼 말이다.


"여성의 날 꼭 필요한가" KBS 라디오 진행자 발언

여성의 날이 지난 8일이었으니 일주일 정도 지났다. 그날 재미있는 기사가 났다. 라디오의 한 진행자가 여성의 날을 언급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여성의 날... 이런 날이 꼭 필요한가. 여성으로서 편하게 살고 있는 요즘..."

그런가 하면, 나는 한 남성에게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

"왜 '남성의 날'은 없어요?"

아마도 여성의 날이 왜 만들어졌는지 잘 모르셨던 모양이다. 여성은 기본권을 위해 싸웠고, 어렵게 그 권리를 쟁취했다. 그리고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남성은 그런 걸 위해 싸울 필요가 없었잖아요. 그냥 주어졌으니까요."

이 말에 그 남성은 다행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날, 한 제약회사에서 이루어진 성차별 면접에 대한 글을 접했다. 면접 당시 다른 남성 지원자 2명과 달리 여성 지원자는 병풍 취급을 당했다고 한다.

게다가 인사 담당자는 남성 지원자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어느 부대에서 근무했는지, 군 생활 중 무엇이 가장 힘들었는지, 군 생활 중 무엇을 배웠는지"를 물은 뒤, 여성 지원자에게는 "O씨는 여자라서 군대를 가지 않았으니 남자보다 월급을 적게 받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 동의하냐"라는 말에서부터 "군대 갈 생각이 있냐"고 까지 물었다는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여성들의 면접 경험담이 봇물 터지듯 터졌다.

"미투 때문에 여자 뽑을 생각 없는데 불러봤다."
"결혼할 생각이 있냐?"
"여자들은 결혼하고 애 낳고 금방 회사를 관둬서 문제다."


아직도 그런 데가 있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여성들은 여전히 이런 질문과 말들을 듣는다. 남성들은 한 번도 받지 않은 불편하고 부당한 질문들 말이다.

2018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발표에 따르면(20세~49세 2000명 대상 조사), 구직 경험이 있는 여성 중 44.2%가 채용과정에서 성차별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남성 응답자 22.4%의 2배 가까운 숫자다.

특히 여성 지원자는 결혼과 출산 계획(58.6%), 결혼, 출산 뒤 계속 회사에 다닐 것인지 여부(60.2%) 등에 관한 질문을 남성 지원자보다 2배 이상 많이 들었다. 이외에도 커피 심부름 등 외적 업무수행에 관한 질문도 남성보다 많이 듣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가 흔히 스펙으로 불리는 학력, 자격증, 경력 같은 것을 제외하고, 보통 성별이나 나이로 차별이 이루어진다. 지금까지 보도된 것만 찾아봐도 수두룩하다.

성차별 사례, 기사만 찾아봐도 수두룩
 

ⓒ elements.envato

 
KB국민은행에서는 신입행원 채용과정에서 여성을 덜 뽑기 위해 남성 지원자의 접수를 대거 올려준 성차별 채용을 했다(2018년 3월 22일 SBS기사). 같은 학력, 스펙과 나이라도 여자에겐 커트라인이 더 높고, 점수가 조작된 것이다.

은퇴 나이도 훨씬 이르다. 예를 들어 국정원의 경, 남성은 유지보수 업무 직군 상한연령을 57세로 둔 반면, 여성 직군은 정년을 43세로 정해서 부당한 차별이라는 대법원의 판단을 받은 바 있다(2019년 11월 10일 연합뉴스 기사 참고, 여성 직군 정년 43세로 정한 국정원.. 대법 "남녀차별로 위법").

여자면 비정규직으로만 채용하기도 한다. 대전 MBC는 2018년 신입사원 정규직 공채를 하면서 채용공고에는 '성별제한없음'이라고 되어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남자 아나운서 자리'인 것을 누설하지 말라는 함구령을 내렸다. 대전 MBC 여성 아나운서는 모두 정규직이 아니었다.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지역 MBC 여성 아나운서 대부분은 프리랜서나 계약직으로 고용되어 있다(2019년 10월1일 프레시안 "여성 아나운서라서 비정규직이라고요?" 참고).

그러나 현실에 대한 인식은 사뭇 다르다. 작년 9월 대한상공회의소의 여성 노동자 300명, 기업 인사 담당자 300명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노동자들은 71%가 '회사 생활 전반에서 상대적으로 불리하다'고 답했지만 인사 담당자들은 81%가 '성차별이 없다'고 답했다.

그런데 어쩌나. 얼마 전 한 제약회사 면접에서 버젓이 성차별이 벌어진 것을. 상황이 이러한데 앞서 라디오 진행자의 말처럼 '요즘 여성들은 편하게 잘 살고 있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것이 과연 한 인사 담당자의 개인 일탈이었을까.

참고로 이 인사 담당자는 지난 9일 '면접 과정에서의 부적절한 언어 사용으로 인한 업무 태만, 회사 질서 문란 초래 및 직원 품위 손상'을 이유로 보직 해임과 정직 3개월의 처분을 받았다.
 
#여성의날 #성차별 #삼진그룹영어토익반 #성차별 면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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