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다 그렇지" 외할머니는 나의 안식처였다

[서평] 유타 바우어의 '고함쟁이 엄마'

등록 2021.03.15 09:15수정 2021.03.15 09:30
0
원고료로 응원
a

책 고함쟁이 엄마 ⓒ 비룡소

 
어렸을 적 사무치도록 서럽게 혼이 난 기억은 별로 없다. 늘 외할머니가 계셨다. "됐다. 아~들이 다 그렇지. 담부터 안 할끼제? 엄마한테 빨리 잘 몬했다 캐라. 됐다 마." 대단한 잘못도 큰 실수도 할머니 등 뒤에 숨으면, 이렇게 일단락되었다.

오빠와 내가 사춘기로 접어들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부모님은 늘 우리에게 당부하셨다. "할머니 혈압 높은 거 알지? 큰 소리 나지 않게 잘해라."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요동치는 외할머니의 혈압은 우리에게 더 단단한 방패막이가 되어주었다. "시끄럽다마! 고마해라. 머리 아푸다. 쟈들 담부터 안 그럴끼다. 맞제?" 엄마의 부글거리는 속도, 장모 앞에서 얼굴 붉히기는 힘든 사위, 아빠의 화도 꾸역꾸역 평온을 되찾을 수밖에 없었다.


연년생 두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살았다. 식탁의 모서리는 아이의 이마를 시도 때도 없이 강타했다. 감기에 걸릴까 신겨놓은 양말은 질주하는 아이에게 날렵한 스케이트 날과 같았다.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무슨 사고를 치나 불안했다.

그렇게 전전긍긍하고, 아이들에게 소리를 꽥꽥 질러대면서도 늘 외할머니 생각을 했다. 할머니 등 뒤에 숨을 수 없는 아이들. 홀로 서 있는 아이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지는 말아야지 하면서. 조부모와 함께 사는 아이들은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같다.

엄마는 소리를 질렀고, 나는 흩어졌다

<고함쟁이 엄마>는 두 펭귄의 이야기다. 새끼 펭귄을 삼켜버릴 듯이 부리를 쫙 벌리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엄마 펭귄. 그 소리에 깜짝 놀라 새끼 펭귄의 온몸은 산산이 흩어진다. 머리는 우주로 날아가고 몸은 바다에 떨어지고 날개는 밀림으로.

아이를 키우며 종종 치밀어 오르는 나의 화는 정확한 이유도 없다. 한도 끝도 없는 육아의 고단함, 잘함은 없고 계속 꾸준히 더 잘해야만 한다는 강박이 짓누른다. 그러다 터지는 순간에는 가장 약자인 아이가 도화선이 될 뿐이다. 나의 순간적인 분노가 아이를 갈기갈기 찢어버린다니. 귀여운 새끼 펭귄이 내 눈물샘을 폭파해버렸다.


이 책은 유아 그림책으로 분류되어 있지만 부모 교육에서 교과서처럼 인용되는 엄마를 위한 책이다. 우리 집 두 아이는 어느새 훌쩍 커서 고등학생이 되었다. 아직도 영어 단어를 다 외웠는지 확인해야 하냐며, 정신 차리면 고등학교 시절 다 가겠다고 다그치는 내 말에 아이의 두 눈은 여전히 새끼 펭귄의 그것처럼 슬프다. 광활한 우주 공간에서 버림받은 아이의 그런 눈이다.

몸통이 떨어져 나간 새끼의 두 발은 사하라 사막까지 몸의 조각을 찾으러 간다. 펭귄의 두 발처럼 내 아이도 허허벌판에 홀로 서 있다 생각하니 한없이 미안해진다. 그리고 나의 영원한 안식처였던 외할머니의 등이 생각난다. 세상 두렵지 않게 나를 지켜 주었던 든든한 그 할머니의 등 말이다.

안식처는 회복의 공간

초등학교 시절 오빠와 돼지저금통 배를 갈라 거금을 다 써버리는 대형 사고를 치고 집 밖으로 쫓겨난 적이 있다. 할머니도 손 쓸 수 없는 규모의 사고라 이가 덜덜 떨리도록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지나가도록 오랜 시간이었다.

아마 그런 일들이 수없이 많았을 거다. 그럼에도 내가 그리 서럽다 여기지 않는 것은 언제나 돌아가서 위로받을 수 있는 할머니가 있었기 때문이다. 할머니 품으로 들어가면 쓰라린 상처는 곧 아물고 아팠던 기억조차 별 게 아닌 게 되었다.

어느새 엄마 펭귄은 새끼 펭귄의 조각을 모아 꿰매고 있다. 엄마의 품에 기댄 새끼의 두 눈은 이제야 돌아왔다는 안도감을 보여준다. 멀쩡해진 두 발을 보며 폴짝폴짝 뛸 기세다. 그리고 엄마는 겸연쩍지만, 다행스럽다는 얼굴이다. 안타깝던 내 마음도 진정이 된다. "아가야, 미안해"라는 엄마 펭귄의 말은 우리 외할머니의 등 같다. 이제 다 괜찮아졌다고 말하는 것처럼.

코로나19로 집마다 고성이 난무한다. 돌밥돌밥(돌아서면 밥, 또 돌아서면 밥), 온라인 수업으로 엄마는 사나워졌다. 착했던 엄마는 고함쟁이 엄마가 되었고, 고함쟁이 엄마는 더 큰 고함쟁이가 되어간다. 그렇다고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닌데 말이다. 이 그림책을 보며 잠시 쉬자. 그리고 깊고 뜨거운 사랑을 다시 꺼내 보자.

고함쟁이 엄마

유타 바우어 글.그림, 이현정 옮김,
비룡소, 2005


#고함쟁이 엄마 #코로나19 #펭귄 #동화 #그림책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검찰 급했나...'휴대폰 통째 저장', 엉터리 보도자료 배포
  2. 2 "그래서 부끄러웠습니다"... 이런 대자보가 대학가에 나붙고 있다
  3. 3 재판부 질문에 당황한 군인...해병대 수사외압 사건의 퍼즐
  4. 4 "명품백 가짜" "파 뿌리 875원" 이수정님 왜 이러세요
  5. 5 [동작을] '이재명' 옆에 선 류삼영 - '윤석열·한동훈' 가린 나경원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