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어머니와 한집살이를 시작했습니다, 30년만에요

팔순 노모와 육십 앞둔 장남이 다시 살게 되기까지

등록 2021.03.21 19:53수정 2021.03.21 19:53
2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팔순의 어머니께서 갑작스레 병을 얻으셨습니다. 남은 가족이라 해봐야 천지 간에 당신과 나, 둘 뿐입니다. 병중의 어머니를 홀로 둘 수는 없어 제가 모시거나, 혹은 어머니가 절 데리고 살거나 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우린 실로 30여 년 만에 다시 한 지붕 아래 살게 됐습니다. 어머니와 곧 이순을 앞둔 아들이 삐걱대며 사는 이야기를 통해 세대 간 소통과 화합의 길을 모색해보고자 합니다.[기자말]
어머니의 위기


'모든 도시의 뒷골목에서 살인과 패싸움이 벌어질 것 같은 울컥울컥한 무더위(<여수의 사랑> 중)'. 소설가 한강은 어느 여름의 더위를 이렇게 표현했다.

2018년의 여름은 더 심했다. 그 해는 계절이 사람을 살해하려는 듯했다. 그 무지막지한 더위가 막 조짐을 보이던 5월의 어느 날, 출근해 자리에 앉기도 전에 다급하게 전화기가 몸을 떨었다. 어머니의 가장 가까운 친구 분이었다. 서로 번호만 알았지 통화 해 본 적은 없는데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일까, 의아하면서도 왠지 불길했다.

"엄마가 이상해. 말을 더듬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버지께선 뇌경색으로 돌아가셨다. 당신도 말이 어눌해지는 증상으로 발병 사실을 알렸다. 하지만 우린 그게 그건지 몰랐다. 그저 기력이 떨어지니 말도 그러시는 줄만 알았다. 대처가 늦었다. 바로 병원에 모시고 가지 못한 건 평생 한으로 남았다. 어머니마저 그럴 수는 없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집으로 뛰어가 병원으로 모셨다.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현실이 된다. 어머니도 같은 진단을 받으셨다. 의사 선생님께선 다행히 초기고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으니 입원해서 치료와 검사를 병행하자고 하셨다. 당연히 그러마고 했는데, 어머니께선 느닷없이 입원 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셨다. 된장 담그다 말고 왔으니 마저 마무리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어이가 없었지만 그게 우리 어머니였다.


가까스로 입원은 하셨지만, 보호자가 없었다. 후보는 나밖에 없었는데, 하필 그때 큰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었다. 사정을 헤아린 어머니 친구 분께서 흔쾌히 보호자를 자청하셨다. 너무 감사했다. 손을 덜어드릴 간병인도 구했다. 그 두 분 덕에 마음 편히 일 할 수 있었다. 어쩌다 문병을 가면 어머니는 뭐 하러 왔냐며 내쫓기 바쁘셨다. 그렇게 우린 남이나 같았다.

며칠 후 주치의께서 보자고 하셨다. 그는 어머니의 뇌경색 증세가 심장 이상으로 시작된 것 같다고 하셨다. 4개의 심장 판막 중 하나는 크게 상해 못쓸 지경이고, 다른 하나는 반쯤 굳어 시급히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심장판막증이었다. 고령에 전신마취를 하고 가슴을 크게 열어야 하는 대수술이지만 더 미루면 생명에 위협이 될 수도 있다니 마음이 급해졌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어머니께 그 말씀을 드렸다. 당신은 내 얘기를 마치기도 전에 수술 안 하시겠다고, 특히 이 병원에선 못하겠다고 하셨다. 사실 그건 나도 그랬다. 우리는 그 병원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었다. 지난 1년 사이 아버지와 동생이 잇따라 그곳에서 세상을 등졌다. 어머니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됐다.

나는 서울의 큰 병원으로 옮기자고 제안했다. 어머니께선 순순히 그러마고 하셨다.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다행히 병원과 의사선생님을 소개받고 예약을 했다. 두 달이나 기다려야 했지만, 주위에선 그나마도 다행이라고들 했다. 하긴 이 동네 종합병원도 예약이 어렵다. 병원은 언제나 초만원이었다. 세상엔 아픈 분들이 그렇게나 많았다.

신뢰를 잃은 아들
 

수술실 어머니는 심장판막증을 진단받으셨다. 수술은 무려 9시간이 걸렸다. '수술실'과 '통제구역'이란 단어는 수 천 번도 더 읽었다. ⓒ 이상구

 
그 병원에서 다시 검사해 봤지만 결과는 같았다. 어머니는 내심 수술 받지 않아도 되겠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눈치였다. 속히 수술을 해야 된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다른 도리는 없었다. 아이처럼 안 하면 안 되냐고 칭얼대듯 묻는 어머니께 주치의는 다소 강경했다. 어머니는 곧 체념하셨다.

7시간 정도 걸릴 것이란 수술은 예상보다 길어졌다. 수술 중간에 대기실로 나온 집도의께서 어머니 심장에서 제거했다는 판막 조각들을 보여주었다. 마치 시커멓게 죽은 손톱같았다. 저 작은 조각들이 한 사람의 목숨을 좌우한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오후 5시가 다 돼서야 어머니는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당신은 그리로 옮겨지고도 한참동안 깨어나지 못하셨다. 하얗게 질린 얼굴과 잔뜩 불안한 표정을 한 채 억지로 잠이 든 당신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아렸다. 얼마나 무섭고 힘들었을까.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머니는 20분쯤 지난 후에야 눈을 뜨셨다. 그런데 나를 보시며 "누구세요? 여긴 어디죠?"라 대뜸 물으셨다.

너무 놀라 주저앉을 뻔 했다. 혹시라도 수술의 충격으로 정신줄 놓으신 건가, 했다.  하지만 간호사들께선 섬망 때문이니 안심하라고 일러주셨다. 연로하신 분들이 갑자기 환경이 바뀌거나 수술한 후 마취에서 깨어나며 흔히 보이는 증세라 했다. 그 말씀대로 어머니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셨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중환자실은 면회가 까다롭다. 15분씩 하루 두 번이다. 집에서 병원까지 왕복 네 시간이다. 그 많은 시간을 길에서 버릴 수는 없었다. 나는 옷가지며 침낭 따위를 싸들고 보호자 대기실의 옹색한 벤치에서 먹고 자며 간병했다. 어머니는 볼 때마다 집에 가라 성화셨지만 내심 기다리시는 것 같았다. 어쩌다 조금 늦게 들어가면 '안 오는 줄 알았다'며 안도하시곤 했다.

일반 병실로 옮기고 나선 또 어머니 친구 분이 보호자 역할을 해주셨다. 어머니도 나보다 그게 편하다 하셨다. 어느덧 퇴원이 임박했다. 생각해 보니 집에 아무도 없었다. 초기지만 뇌경색에 심장수술을 했고, 지독한 관절염으로 거동마저 불편하신 분을 혼자 둘 수는 없었다. 나라도 함께 있어야 했다. 어머니께선 썩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하는 수 없이 그러자고 하셨다.

살던 오피스텔을 세놓고 세간살이는 모두 처분했다. 원룸살이라 그나마도 단출했다. 책도 웬만한 건 다 중고책방에 넘겼다.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는 양 가방 두어 개만 달랑 들고 들어서는 모습을 보고 어머니는 짐은 그게 다냐, 어떻게 그러고 살았냐 물으셨다. 아버지께서 쓰시던 방에 짐을 풀고 본격적으로 어머니와의 한집살이를 시작했다. 실로 30년만의 해후였다.

그 날 저녁 어머니는 죽을 드시겠다고 하셨다. 동네 식당에서 포장된 죽을 사와 어머니와 마주 앉아 첫 식사를 했다. 썰렁한 집안에 덩그마니 늙은 모자가 앉아 밥을 먹는 풍경이 참 어색했다. 어머니는 식사 끝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난 이번에 널 다시 보게 됐다. 이런 사람인지 몰랐다." 그건 무슨 말씀일까. 내가 전엔 어떤 사람이었다는 걸까.

그건 이랬다. 당신 장남의 평소 행실로 봐선 발 벗고 나서 서울 큰 병원에 입원시켜주고, 한데서 자면서 간병하고, 집으로 들어와 보호자를 자청할 줄은 몰랐다는 거였다. 자식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내가 진짜 할 줄은 몰랐다는 거였다. 나는 그만큼 신뢰를 잃은 망나니 아들이었다. 아, 평화로운 공존의 전제는 신뢰인데, 우리 사이엔 그게 없는 거였다. 갑자기 앞이 막막했다.
#모자 #어머니 #장남 #한집살이 #해후
댓글2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2,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캐나다서 본 한국어 마스크 봉투... "수치스럽다"
  2. 2 100만 해병전우회 "군 통수권" 언급하며 윤 대통령 압박
  3. 3 300만명이 매달 '월급 20만원'을 도둑맞고 있습니다
  4. 4 시속 370km, 한국형 고속철도... '전국 2시간 생활권' 곧 온다
  5. 5 두 번의 기회 날린 윤 대통령, 독일 총리는 정반대로 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