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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취방의 배수구는 21세기 판도라 상자였다

우당탕탕 자취생의 청소 일대기

등록 2021.03.17 15:47수정 2021.03.17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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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 ⓒ 정누리


내 방의 상태가 곧 내 마음의 상태라고 했다. 머리가 복잡한 날은 방에도 잡동사니가 즐비해 있고, 왠지 마음이 가벼운 날에는 방도 깔끔하다. 본가에 있을 때는 허구한 날 돼지 우리라며 잔소리를 들었던 내가 어느새 청소의 달인이 되어 있었다. 이번 글에서는 자취생들이 가장 피하고 싶은, 하지만 필연적으로 해야 하는 '청소'에 대해서 얘기해보고자 한다.


청소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 설거지, 분리수거, 바닥 청소, 빨래. 그 중에도 가장 장벽이 높은 것은 역시 '화장실 청소' 아닐까. 나는 맨 처음 샤워부스 밑의 배수구를 열어봤던 그 날을 잊지 못한다. 21세기의 판도라 상자였다. 머리카락과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샴푸 찌꺼기 등이 엉켜 있는 것을 보고 다시 덮어버리고 싶은 심정이 치솟았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하면 배수구 냄새는 심해지고, 바닥은 물바다가 될 터. 큰 찌꺼기를 걷어내 비닐봉투에 담고 배수구 트랩에 베이킹소다를 묻혀 칫솔로 박박 씻어주었다. 스테인리스 재질의 수도꼭지와 샤워기는 치약을 묻힌 뒤 씻어주면 물때가 말끔하게 사라진다. 타일 사이 물때는 젤로 된 곰팡이 제거제를 발라주는 것이 제일 효과가 좋았다. 다만 바를 때 타일 바닥에 물기가 없어야 한다.

변기도 치약을 묻혀 쓱쓱 싹싹. 약 1시간을 청소하고 나면 아주 새하얗고 말끔하다. 사실 락스를 쓴다면 가장 빠르게 해결되겠지만, 우리 집에는 가끔 강아지들이 들락날락거려 혹시나 싶은 맘에 덜 독한 약품을 쓰려 했다. 덕분에 청소 후 풍기는 치약 향기도 나름 괜찮다.

나는 청소 중에 화장실 청소가 가장 좋다. 전후 차이가 가장 극적이라 하고 나면 보람이 크다. 바깥일에 치여 잔뜩 먼지를 덮어쓰고 온 날, 깨끗한 욕실에서 몸을 정화하는 시간만큼 행복한 것이 없다.

근육통이 생기지만, 이렇게 뿌듯할 수가
 

유리창 청소 전 후 ⓒ 정누리

 
한 날은 유리창 청소를 했다. 친구는 자취방 유리창까지 닦는 사람이 어디 있냐며 혀를 내둘렀다. 집이 대로변에 있어 차들이 많이 지나가다 보니 먼지가 금방 쌓인다. 하늘이 맑은 날에도 뿌연 창문 탓에 제대로 감상하지 못해 아쉬워하는 도중, 기발한 아이템을 발견했다. 바로 자석 창문 닦이다.


자석이 내장된 스펀지 두 개를 이용하여 한쪽은 바깥 창을, 다른 쪽은 안쪽 창을 닦는 도구다. 이거라면 긴 유리창 밀대를 사용하기 힘든 작은 창문도 용이하게 닦을 수 있다. 거품을 많이 쓰지 않아 밑층에 물이 떨어질 염려도 없다. 도구가 도착한 날 당장 유리창 청소를 시작했다. 만만하게 봤는데 쉬운 게 아니었다.

우선 유리창을 너무 빨리 밀면 반대편 스펀지가 따라오지 못하고 툭 떨어지기 때문에 속도를 잘 조절해야 했다. 또한 창문에 먼지가 너무 많았는지 스펀지 이동 경로를 따라 얼룩이 생겨 여러 번 닦아줘야 했다. 자석 사이에 손이 끼면 상당히 아프기 때문에 이 또한 조심해야 한다.

너무 힘든 나머지 우선 네면 중 한 면만 청소를 완료했다. 팔과 배에 근육통이 생겼다. 하지만 깨끗해진 창문 너머로 맑은 하늘을 보니 뿌듯하다. 힘들어도 하길 잘했다.
 

냄비뚜껑 깨진 날 ⓒ 정누리

 
뜻하지 않게 청소를 해야 하는 순간도 있다. 어느 날, 친구가 집에 놀러 와 맛있게 밥을 먹었다. 친구는 대신 설거지를 해주겠다며 부엌으로 나섰다. 그 순간 퍽! 하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리니 냄비 뚜껑이 대리석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 있고, 친구는 놀란 표정으로 고무장갑을 낀 채 굳어 있었다. 부엌이 좁아 친구가 실수로 냄비뚜껑을 팔꿈치로 쳐서 그대로 떨어진 것이다. 집이 좁은 것을 누굴 탓하랴.

문제는 이런 상황을 겪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유리를 처리할 도구가 없다. 빗자루도 없고, 검색해보니 청소기로 빨아들이다 호스나 필터가 찢길 수 있다고 하니 그것도 안 된다. 상당히 난감했다. 할 수 없이 친구랑 나는 장갑을 끼고 손수 강화유리 조각을 봉투에 주워 담았다.

밤 11시,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고 테이프로 저 멀리 날아간 유리 파편을 찍어 눌렀다. 나중에 검색해보니 물을 묻힌 키친타올이나 부직포로 유리파편을 쓸어 담으면 잘 모인다고 한다. 나는 그 날 이후로 돌발 상황을 대비해 부직포 밀대를 꼭 구석에 모셔 놓고 있다.

먼지와 함께 쓸어담는 추억들 

친구가 집에 놀러 와 같이 잔 날, 친구는 아침 일찍 일어나 커튼을 치고 청소기를 돌리는 내 모습을 보면서 "너는 정말 깔끔한 것 같아"라는 말을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엄마에게 '정리 좀 해라'라는 잔소리를 이십몇 년간 듣고 자라왔는데, 그런 내가 깔끔하다니!

친구가 돌아가고 곰곰이 바닥에 앉아 생각해보았다. 결국 애착 아닐까. 내가 먹고 눕고 생활하는 이 작은 공간만큼은 깨끗하게 하고 싶다는 마음. 내 마음도 이처럼 가벼웠으면 하는 바람. 취미란에 '청소'를 적는 사람들을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앗, 바닥에 앉았더니 수납장 밑에 먼지가 보인다. 본능적으로 물티슈를 가져와 무릎을 꿇고 바닥 청소를 했다. 어릴 적, 할머니가 하도 무릎을 꿇고 바닥을 닦으시기에 밀대를 쓰시면 안 되냐 하니, '이래야 잘 닦인다' 하시던 말이 떠오른다. 똑같이 무릎을 꿇고 수납장 밑을 닦는 내 모습이 낯설고 우스꽝스럽다. 청소는 내가 걸어온 삶에 떨어뜨렸던 추억을 쓸어 담는 과정인가보다.
#청소 #자취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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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정누리입니다. snflsnfl83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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