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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강물'처럼 살아갑니다

조던 스콧 글, 시드니 스키스 그림의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

등록 2021.03.23 10:35수정 2021.03.23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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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그림책은 아직 글읽기가 익숙하지 않은 어린 아이들을 위해 '그림'을 곁들인 짧은 글책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그림책'은 아이들만이 아니라 어른들도 읽는 신선한 시각적 매체로 다가옵니다.

그림과 글이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감성적인 울림'이 그 어느 때보다도 메마른 삶을 살아가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 주효한 '처방전'이 되었기 때문이겠죠. 바로 그 '감성적인 처방전'으로 권하고픈 그림책이 있습니다. 조던 스콧 글, 시드니 스키스 그림의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입니다.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 ⓒ 책 읽는 곰

 
소나무의 스-가 입안에 뿌리를 내리며 혀와 뒤엉켜 버려요. 
까마귀의 끄-는 목구멍 안쪽에 딱 달라붙어요.
달의 드-는 마법처럼 내 입술을 지워버려요. 
나는 그저 웅얼거릴 수 밖에 없어요.

말을 더듬는 소년이 있습니다. 소년은 자신들을 둘러싼 낱말들의 소리를 들으며 깨어나지만 정작 그 말들을 입 밖으로 꺼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입은 낱말들로 가득차지만 말이 되어 나오지 않습니다. 말하기에 자신감을 잃은 소년의 존재는 점점 흐트러지고 뭉개져갑니다.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 ⓒ 책 읽는 곰

 
오래 전에 말을 더듬던 한 소녀에 대한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말을 더듬어 어려움을 겪던 소녀는 알고보니 글자가 역순으로 인식되는 '난독증'이었던 것으로 드러납니다. 난독증을 치료한 소녀는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지요. 어떤가요? 이 영화에서처럼 우리 역시 '말을 더듬는다'고 하면 '치료'와 '정상'적인 상태로의 복귀를 먼저 떠올리지 않나요? 소년의 언어 치료사 선생님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유창하게 말하는 것'을 목표로 삼으셨습니다.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 ⓒ 책 읽는 곰

 
그런데 소년은 '유창하게 말하는 것'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그 당당한 강물을 생각해요.
물거품이 일고 /소용돌이치고/ 굽이치다가/ 부딪치는 강물을요.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 

강물은 '굽이 굽이' 흘러갑니다. 산골짜기에서 샘솟는 물이 유장한 강물이 되어 흐를 때까지 책 속의 표현대로 '물거품이 일고/ 소용돌이 치고/ 굽이치고/ 부딪치며' 흘러갑니다. 유유히 흐르는 듯 보이는 강물은 그 안에 이런 '역동적인 갈등'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많은 작가들이 '강'을 빌어 우리네 인생을, 삶이 주는 고뇌를 논했겠지요. 소년 조던을 강으로 데리고 간 아버지 로이 스콧은 아들에게 말합니다.
 
'너도 저 강물처럼 말한단다.'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는 보다 나은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이 가지는 보편적 욕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보다 나은 존재가  되고 싶은 만큼 인간은 늘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아들러는 바로 그 '부족'하다고 느끼는 '열등감'이야말로 인간이 노력하고 성장하고자 하는 원동력이 된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열등감'을 성장의 발판으로 삼는대신 거기에 사로잡히면 '열등컴플렉스'라는 병적인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소년 조던은 친구들 앞에서 말을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는 열등감으로 인해  '배속에 폭풍이 일어나고 두 눈에 빗물이 가득차 오르는' 고통에 빠져듭니다. 아버지 로이 스콧은 조던을 짖누르는 열등감의 물꼬를 '강물'을 통해 터주셨습니다. 

장애를 대하는 다른 시선 

훗날 시인이 된 소년은 말합니다. 말을 더듬는 사람들은 단순히 말을 더듬는다고 말해버리기 힘든 다른 방식으로 말한다구요. 단어와 소리와 몸을 가지고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복잡한 그만의 노동의 행위를 한다구요. 만약 소년의 남다른 감각을 '유창함'이란 세상의 잣대에 우겨 넣으려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우리는 캐나다의 대표적 시인 조던 스콧을 만날 수 없었을 겁니다.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처럼 최근에 들어서 '장애'에 대한 인식을 '제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집니다. 애초에 '장애'라는 것이 '완전한 그 무엇'을 전제로 한 개념인 만큼 불완전한 존재로서 '장애'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부터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애초에 '정상'이나, '완전한 존재'의 기준이 있기는 한 걸까요? 


책의 후기에서 저자는 각자의 말하는 방식에 귀 기울여 보라고 권합니다. 멈추거나 머뭇거리지 않는지, 자주 실수하고 단어를 잊어버리지 않는지, 단어를 고르는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지, 말하기가 꺼려지지는 않는지.

글을 쓰며 살아가는 처지이지만 저만 해도 점점 단어를 떠올리는데 어려움을 느낍니다.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을 만나면 "그, 있잖아"라는 대명사로 대화를 채워가곤 합니다. 아마도 저처럼 나이들어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말, 혹은 글에 대해 어려움을 느낄 것입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청소년 열 명 중 한 명이 글을 읽을 줄 알아도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문해력'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말이나 글뿐만이 아닙니다. 알프레드 아들러가 열등 컴플렉스 개념을 창안할 때만 해도 신체적 열등감이 주요한 화두였습니다.

하지만 현대에 올수록 신체적인 열등보다는 오히려 정신적이고 사회적인 열등감으로 부터 비롯된 병리적 컴플렉스가 더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아서 그렇지 사람들은 저마다 알고보면 '열등감 덩어리'입니다.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말투부터 태도까지 많은 열등감으로 인해 저마다 '고통'을 받습니다.

저만해도 멀쩡한 데가 없습니다. 시신경 장애로 인해 한쪽 눈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앉았다 일어서려면 저절로 '아이구' 소리가 튀어나올 만큼 관절이 말썽입니다. 마음을 다잡아 지내려 하지만 호시탐탐 우울증이 제 마음의 빈 공간을 비집고 들어오려 합니다. 끝도 없어요. 

어디 저뿐일까요. 하지만 우리는 그럼에도 살아갑니다. '물거품이 일고 /소용돌이치고/ 굽이치다가/ 부딪치지만 흘러가는 강물처럼 말이죠. 친구들 앞에서 '강물처럼 말해요'라고 얼굴을 붉히던 소년 조던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어보는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https://blog.naver.com/cucumberjh 에도 실립니다.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

조던 스콧 (지은이), 시드니 스미스 (그림), 김지은 (옮긴이),
책읽는곰, 2021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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