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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녀에겐 '투사'였던 순자씨,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가족을 돌보려 한평생 고생했던 애틀란타 총격 사건 피해자를 추모하며

등록 2021.03.23 15:49수정 2021.03.23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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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딩 사이트 '고 펀드 미'에 올라온 순자씨와 손녀의 과거 사진. ⓒ 고펀드미 갈무리

 
'(애틀란타 총격) 사건의 희생자 중 한 명인 故 김순자(69) 씨는 1980년대 당시 남편 및 두 자녀와 함께 한국 서울에서 미국으로 이주했다. 김 씨의 손녀에 따르면 그는 많은 아시아계 이민자들과 마찬가지로 영어를 거의 할 줄 몰랐다고, 편의점 직원이나 야간 청소부, 접시닦이 등 고된 육체노동을 쉬지 않았으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서울신문.2021.3. 22 "우리 할머니는 천사였어요" 기억해야 할 한인의 삶 중
 
순자씨에게.


당신보다 나이도 적고, 얼굴도 모르는 생면부지의 제가 당신을 감히 순자씨라고 부르는 것을 용서하세요. 하지만 난 당신을 왠지 순자씨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신문기사를 읽고, 신문에 난 손녀와 얼굴을 나란히 하고 찍은 당신의 젊은 시절을 보았을 때 난 당신을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신이 어떤 연유로 80년대에 미국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지 그 연유는 잘 모르지만, 알 것 같기도 합니다. 분명, 자식들을 잘 키우기 위해서였겠죠. 보다 좋은 환경에서, 꿈을 펼칠 수 있는 그곳으로 건너갈 수 있도록, 당신은 자식들의 징검다리가 되어주고 싶었을 겁니다. 푸른 초원이 펼쳐져 있고, 선량한 사람들이 사는 그곳으로 갈 수 있도록, 거센 물결에 당신의 몸을 굳세게 뉘였을 겁니다. 나를 밟고 지나가라고.
   
어쩌면 우리 모두의 부모님은 자식들의 징검다리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먼 이국에서 당신이 겪었을 차별과 증오, 신산함과 외로움, 쓸쓸함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한낱 '타향살이의 어려움' 정도로 뭉뚱그려져 다가갈 테지요.

당신의 손녀는 '고 펀드 미'에 올린 후원 요청글(링크)을 통해 당신이 '동시에 2~3개의 직업을 가지고 있어서 마치 투사(Fighter) 같았다'고 회상했습니다. 그리고 '이민자로서 할머니가 원했던 것은 할아버지와 함께 늙어가며, 당신이 누리지 못했던 삶을 자녀와 손자가 누리는 걸 지켜보는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순수한 마음이었고 자신이 아는 한 가장 사심이 없던 사람이라고요. 그래서 당신 이름은 '순자'였는지도 모릅니다.

흔하면서 흔치 않은 그 이름, 순자


제가 신문에서 당신의 이름을 보았을 때 떠올린 또 다른 '순자씨'는 마침 읽고 있었던 황정은의 소설 <연년세세>에 나오는 순자씨였습니다. 그 소설에서도 순자씨가 두 명 나옵니다(작품 속 중심인물인 '이순일'은 본래 이름은 이순일이지만, 누구나 그녀를 '순자'라고 불렀다).

황정은 작가는 '사는 동안 순자, 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자주 만났다. 순자가 왜 이렇게 많을까? 이 책은 그 질문에서 시작되었다'라고 했습니다. 그 글을 읽고 저는 떠올려봤습니다. 제 주변에는 순자, 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동창들부터 엄마의 친구들 이름까지 죄다 훑어보았지만 '순자'는 없었어요. 참 흔하면서도 흔치 않은 이름이구나, 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등장인물 '순자'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봤음직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어요.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할아버지 손에서 자랐지만, 이내 고모네 집의 '식모'로 들어갔던 순자. 쫓기듯 결혼해서 온통 자식들 뒷바라지에 몸이 가루가 되도록 일하던 순자.

자식들 다 키워 출가시켜 놓고도, 뒷바라지 하느라 딸네 집과 위 아랫집에 살면서 '두 번째 아침상을 차리고, 손주들 어린이집 등원을 도운 뒤 위아래 층을 오가며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는' 순자씨의 모습에서 우리 엄마가 보였어요. 그리고 누군가의 엄마도.

소설 속에서는 순자와 딸이 한 전통시장에서 목격했던 순댓집 안주인이 묘사됩니다. 그녀는 뜨거운 순대를 썰면서 앗 뜨거워 앗 뜨거워, 손을 뗐다가 도로 내리기를 반복하며 순대를 썹니다. '아주머니, 그 뜨거운 것을 평생 만지고도 여전히 그것이 뜨거우냐'고 순자는 그렇게 물으려다 말았다지요.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가슴 속에서 뜨거운 물같은 게 왈칵 차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마 당신도 저렇게 일을 했겠지요. 앗, 뜨거워, 앗 뜨거워... 하면서. 하지만 끝내 그 뜨거운 것을 놓을 수 없었던 것은 자식새끼들 때문이었겠지요.

충분히 '위대한'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소설 속에서 순자의 아들 '한만수'는 뉴질랜드에 정착을 합니다. 한국에서는 번번한 직업도 갖지 못하다 우연히 뉴질랜드로 가서 만족스럽게 잘 사는데요. 그곳에서 사귄 오클랜드 백인 할아버지가 고국에 있는 어머니에게 드리라면서 금 펜던트를 줍니다.

귀국한 한만수가 그 선물을 순자에게 전달하면서 그 노인의 메시지도 함께 이야기하는 부분이 나오는데요. 그 노인이 만수에게 전한 메시지는 '어머니는 위대하다, 당신은 위대하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순자의 딸은 그 메시지를 듣고 모욕감을 느낍니다. 마치 왕이 신하에게 뭔가를 하사하는 듯한 분위기였다면서요.

하지만 순자는 '어머니는 위대하다, 당신은 위대하다'라는 오클랜드 백인 노인의 전언을 듣고 눈시울을 붉힙니다. 아마 한평생 밥 짓고 일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그렇게 동동거리며 살아오면서 자신이 위대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그런 말을 들어본 적도 없었을 테니까요. 이역만리 알지도 못하는 노인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비록 3자의 입을 거친 것이라 해도, 감격스럽지 않았을까요.

한국 이민자의 삶을 다룬 영화 <미나리>가 세계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고, 이로 인해 이민자의 삶에 대해서 환기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언론에서는 이야기하지만, 영화와 현실은 다른 것일까요. 모든 이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인종 차별, 혐오가 아직도 독버섯처럼 존재하는 이 세계에서는 영화 속 주인공들이 그리고 당신이 꿈꾸었을 그 이상향이 아직은 아득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순자씨.

참 흔하면서도 흔치 않은 이름. 살면서 누구 한 명 해코지 한번 했을 것 같지 않은 이름. 앞으로 '순자'라는 이름을 보면 당신을 기억할 것 같습니다. 머나먼 타향에서 자식들을 잘 키우고 건사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당신은 충분히 '위대한' 당신. 그리고 고마운 당신. 당신을 한 번도 본 적도 만난 적도 없지만 왠지 당신은 참 순하게 사셨을 거 같습니다. 고통 없는 그곳에서 이제 편히 쉬소서.

연년세세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은이),
창비, 2020


#애틀란타 총격사건 #연년세세 #인종차별 #혐오 #순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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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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