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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신혼의 맛, 쌉싸름한 분노의 맛... 여기 다 있네

[봄의 맛] 남편에 대한 애증이 담긴 이웃의 봄맞이 요리 '화전'

등록 2021.03.26 21:59수정 2021.03.26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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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나무 생강나무에 꽃이 펴야 봄이 온거다. ⓒ 오창경

 
"산에 생강나무 꽃이 피기 시작해야 진짜 봄이 오는 겨. 이제 생강나무에 물이 오르기 시작했으니 며칠 새에 꽃이 필 겨. 봄나물도 생강나무 꽃이 핀 다음부터 먹어야 맛이 난다니께."


우리 동네에서는 겨울과 봄의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 기준이 생강나무꽃이었다. 내가 볼 때는 매화 봉오리가 터져야 봄이 불려 나오는 것 같은데 우리 동네 어르신들은 생강나무꽃이 먼저라고 하신다. 아무려면 어떤가. 봄이 이만큼 왔는데.

마냥 늘어지는 봄기운에 상큼한 나물 맛이 당기기 시작하는 타이밍이다. 햇볕이 따뜻한 곳에 쪼그리고 앉아서 하품에 겨운 꽃 타령을 하는 봄날이 왔다. 마냥 늘어지기만 하는 봄날의 나른한 기력을 쫓아내기에는 상큼하고 쌉싸름한 봄나물이 제격이다.

시나브로 봄나물이 구미에 당기는 때이다. 초록빛 새싹이 올라오는 것들은 다 뜯어다가 나물로 무쳐 먹고, 꽃이 핀 것들은 다 따다가 화전으로 지져 먹고 싶어진다. 봄은 겨울을 이기고 땅에서 막 올라오는 것들의 아릿한 야생의 맛조차 맛나게 해준다.

달콤한 신혼의 맛

"뭐여? 염생이(염소) 밥상이여?"
"한 숟가락만 먹어보랑게요. 괴기(고기) 반찬이 안 부럽당게요."



새각시가 산으로 들로 다니며 나물을 뜯어다가 봄을 통째로 밥상에 올렸더니 새신랑이 이러더란다. 각시는 얼른 뜨거운 밥 한 숟가락에 나물 몇 가닥을 얹어 신랑에게 먹여주었다. 그렇게 달달한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운 신랑은 산에 나무 하러 갔다. 돌아와 아궁이 부엌에 지게를 내려놓는 신랑의 손에는 참꽃(진달래) 한 다발이 있었다.

"혹시 화전 만들 줄 아는가? 나 화전 좋아하는디..."

사랑 고백이라는 결혼에 이르는 절차도 모르고 혼인을 했을 우리 할머니 시절의 어린 신랑은 어린 신부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린 각시는 진달래를 화병에 꽂으려다가 말고 아직 소년의 모습이 역력한 신랑의 붉어진 얼굴을 보았다.
 

진달래 진달래가 피고 있다. ⓒ 오창경

 
"그냥 다 봄날 낮잠 자다가 꾼 꿈같다니께. 지난 세월이...."

요즘 부쩍 한숨이 많아진, 나의 나이 많은 시골 절친인 K여사를 구슬려 신혼시절을 불러오기 하는 중이다.

"그래서 그날 진달래 화전은 해 드셨어요?"

시어매가 숨겨놓은 꿀단지에서 꿀도 한 종지 훔쳐다가 소년 같은 신랑과 소녀 같은 각시가 꿀을 찍어 먹었던 그 날의 화전은 겁나게 맛났다고 했다. 평생 그 맛을 잊지 못할 정도로 맛났다.

"양지 쪽에는 진달래가 피기 시작하는데 꽃 따다가 오늘은 화전이나 해 먹을까요?"
"난 화전은 안 먹어."

"그래도 우리 동네에서 으뜸가는 솜씨라던데 저한테는 화전 만드는 법은 전수해 주실 거죠?"

말은 세상 사는 것이 다 귀찮다고 하면서도 찹쌀가루와 화전 재료를 준비해 놓으면 K여사의 눈빛은 살아났다.

"화전은 찹쌀가루에 더운물로 개야(반죽해야) 혀. 번철에 지질 때 불 조절이 가장 힘들어. 센 불로 하면 절대 안 되는 게 화전이여."

그러나 K여사는 그 달콤했던 신혼의 화전 이후 평생 화전을 먹지 않았다. 이유가 있다.

분노와 인내의 맛
 

화전. 옥분여사의 레시피대로 지져낸 화전. 진달래, 생강나무꽃, 제비꽃으로 장식을 했다. ⓒ 오창경

 
수줍음이 많고 조용한 성격이었던 신랑은 꿀맛 같은 신혼이 끝나기도 전에 군대에 갔다. 늠름한 장정이 되어 군에서 돌아온 신랑은 어이없게도 꽃바람을 몰고 다녔다.

"유부남 따라 댕기다가 신세 조지는 줄도 모르고... 언년들 하고 허구헌날 싸돌아 댕기다가 병을 얻으니께 나한테 오드랑게. 그러고 3년도 못 살고 가 버렸잖여."

K여사에게 화전은 애증의 맛이었다. 꿀을 찍어서 먹었던 화전처럼 평생 달달하고 쫀득할 줄 알았던 결혼 생활은 씀바귀처럼 쓴맛이 더 깊었다. 신혼에 처음 신랑과 먹었던 화전만 첫사랑의 맛이었다. 가슴에 바람구멍을 안고 밖으로만 돌며 살았던 신랑을 미워하지는 않았다. 신랑을 따라다니던 '그년들'이 더 미울 뿐이었다.

"이 댁 가풍이 제사 상에 찰전(찹쌀전)이 빠지면 안 되는 겨. 찰전은 따실 때보다 식었을 때 깊은 맛이 나지. 앞뒤로 골고루 익혀서 마지막에 꽃잎을 찰싹 붙여야 혀. 안 그러면 꽃 색깔이 안 좋아."

찹쌀가루에 더운물로 반죽을 하는 화전을 예쁘게 지지고 꽃잎도 철썩같이 잘 붙여서 동네에서 불려 다니는 솜씨였건만, 화전을 좋아한다던 신랑은 K여사의 곁에는 찰지게 붙어 있지 않았다. K여사 신랑의 바람은 어쩐 일인지 봄에 더 극성이었다. 봄바람을 타고 꽃들이 있는 길만 찾아다녔다.

화전놀이는 여자들의 몫이었다. 억센 겨울이 지나 꽃이 피고 물이 오르는 나무처럼 춘정이 겨워질 즈음, 동네마다 여자들을 공식적으로 놀게 해주는 날이 있었다. 한 해 동안 독박 육아와 가사노동에 들일까지 해야 하는 여인들에게 전통적으로 허락된 날이었다.

남정네들은 남정네들끼리 여인네들을 여인네들끼리 농사를 시작하기 전에 동네를 벗어나 봄나들이를 다녀오는 풍습이 있었다. 산 속의 놀기 좋은 계곡으로 놀러가서 화전도 지져 먹고 떡도 나눠 먹으며 노는 날이었다.

"언년(어느 년)한테 가서 화전 지져달라고 하며 꽃을 들고 댕기는 꼴을 내가 봐 버렸당께."

화전(花煎)놀이 하러 갔다가 화전(花戰)을 치르고 돌아왔던 그날 이후 K여사는 평생 화전을 먹지 않았다. 화전한테 분풀이를 하며 살았다. 맛나게 먹어 줄 신랑을 기다리며 화전을 지져댔다. K여사의 화전은 분노의 레시피였으며 인내의 맛이었다.

"바깥으로만 돌며 별미를 다 먹어봤어도 내 화전 맛만 한 것은 없었다는구먼."
 

진달래 진달래 ⓒ 오창경

 
음식을 먹으면서 느끼는 감각적 자극은 평생 뇌에 저장된다고 했다. K여사의 신랑도 신혼의 화전 맛을 잊지 못한 거였다. 역마살로 정처 없이 떠돌았어도 찹쌀과 꿀처럼 단순하고 소소한 맛이 주는 위안과 기억이 그를 돌아오게 한 것이었다.

야생 꽃을 음식으로 만들어 먹기에 가장 좋은 계절은 봄이다. 봄이 지나고 나면 식물은 억세지고 독성이 생기기도 한다. 그중에서 봄꽃으로 지지는 화전은 눈이 즐겁고 약이 되는 음식이다. K여사의 분노의 레시피 효과가 지금도 통할까?

봄날의 수다가 봄볕처럼 따스한 날이었다.
#진달래 #화전놀이 #생강나무 #씀바귀 #봄나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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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부여의 시골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조근조근하게 낮은 목소리로 재미있는 시골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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