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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헬렌 켈러는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책줍일기] 삶을 쟁취해 온 여성 21명의 생애... 장영은 지음 '여성, 정치를 하다'

등록 2021.03.26 19:01수정 2021.03.26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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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이라는 이름으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책더미 속에서 사심을 담아 알리고 싶은 책, 그냥 지나치긴 아까운 책을 오마이뉴스 라이프플러스 에디터가 골라 소개합니다.[편집자말]
지난 22일, 동아제약 홈페이지에 한 편의 사과문이 올라왔다. 제목은 '동아제약은 차별 없는 청년 일자리 창출에 앞정서겠습니다'. 최호진 대표이사 명의로 작성된 이 사과문은 '동아제약 성차별 면접 논란'에 대한 응답이었다.

최근, 동아제약은 신입사원 채용 과정에서 한 면접관이 여성 지원자에게 '군대 갈 생각이 있느냐', '군대를 가지 않았으니 남자보다 월급을 적게 받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등의 부적절한 질문을 던졌다는 사실이 밝혀져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사과의 대상을 '청년'으로 두루뭉술하게 표현했다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 한 기업이 채용 성차별 문제를 인정하고 공식적인 사과문을 내놓은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이같은 성취를 이끌어낸 중심엔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동아제약 성차별 면접 피해자 A씨다.


A씨는 채용 과정이 끝난 후, 한 채용 정보 사이트에 당시 면접의 문제점을 짚은 글을 올렸다. 이후 해당 글이 다시 회자되고 논란이 커지자, 그는 움츠러들거나 숨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섰다. 글쓰기 플랫폼 브런치를 통해 동아제약의 대응을 비판하고, 채용 성차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와 정치권이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그의 말하기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동아제약뿐만 아니라, 정부 관련 부처도 움직였다. 하지만 A씨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동아제약의 사과문이 올라온 당일, 이를 받아들이겠다는 소식을 전하면서도 이렇게 덧붙였다. 
 
비록 저와 동아제약 간의 일은 이것으로 마무리되지만, 저는 제 또래의 김지영들을 위해, 그리고 제가 아끼는 후배들과 동생들을 위해, 국가로부부터 '면접 과정 상의 성차별 질문 또한 남녀고용평등법 위반'이라는 것을 인정받고자 합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계속해서 나아가겠습니다.  (2021년 3월 22일, 브런치글)

"진짜는 지금부터"라고 강조하는 그의 단단한 문장들을 읽으며, 이곳이 바로 '정치의 장'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흔치 정치라고 하면 국회를 떠올린다. 정장에 금배지를 달고, 준엄한 얼굴로 법안을 통과시키거나, 치열하게 정쟁하는 의원들을 상상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없어도, 이 또한 정치다. 여성들에게 '배틀그라운드'는 따로 있지 않다. A씨는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바로 투쟁의 현장이고, 나의 말하기가 곧 정치라는 것을 스스로 보여줬다. 

스스로 자신의 몫을 찾기 위해 나선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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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정치를 하다 ⓒ 민음사

 
A씨처럼, 잃어버린 자신의 몫을 찾기 위해 나선 여성들은 수없이 많다. 지나온 역사가 그들을 제대로 호명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래서일까, 장영은 작가는 책 <여성, 정치를 하다>는 자신이 선 자리에서 치열하게 정치해온 여성 21명의 생애를 담았다.

제목에 정치가 들어가니 오해할 수도 있지만, 이 책이 소개하는 21명의 여성들은 단순히 직업 정치인에 국한되지 않는다. 물론 책은 앙겔라 메르켈, 마거릿 대처, 차잉잉원과 같은 여성 정치인들도 다루긴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정치하는 여성'의 범주는 생각보다 넓다.


저자는 책의 서두에서 "여성이 여성의 '몫'을 찾기 위해 수행하는 사회적 실천들을 정치적 행위'로 규정하고자 한다"고 밝히는데, 실제 책이 소개하는 이들은 화가, 가수, 법률가, 경제인 등으로 다양하다.

일반적으로 정치인이라기보다 운동가에 가깝게 호명될 법한 이들이 더 많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익히 알려진 인물을 정치인으로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해주며, 일상의 운동을 정치로 인식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헬렌 켈러다. 헬렌 켈러는 여전히 미디어나 위인전 등에서 '훌륭한 스승 앤 설리번을 만나 장애를 뛰어넘은 작가' 정도로만 소비된다. 하지만 이는 평생에 걸쳐 공정함을 외치며 활동해왔던 사회주의자이자 인권운동가인 그의 삶을 제대로 요약한 말이라고 할 수 없다. 

<여성, 정치를 하다>에 따르면, 헬렌 켈러는 자신의 장애가 존재의 본질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관심사는 여성 참정권 획득, 사형제 폐지, 전쟁 반대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했다. 또 마르크르와 엥겔스의 책 등 불평등 이론에 관심이 있기도 했다. 실제 그는 전 생애에 걸쳐 이러한 주제에 대해 얘기해왔다.

하지만 세상은 자서전 출간 이후 대학도 졸업하기 전에 유명인사가 된 헬렌 켈러를 끊임없이 호명하면서도 장애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극복 서사'만을 요구했다. 
 
1903년 발간한 첫 번째 자서전은 큰 명성을 안겨주었으나, 헬렌 켈러를 그만큼 '부자유스럽게' 했다. 강연 기획자들은 헬렌 켈러가 행사장에 '수수한 흰 드레스를' 입고 나타나기를 요구했다. 점자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야 할 때가 많았다. 헬렌 켈러의 말과 글을 물고 늘어지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그녀가 장애인으로서의 삶을 기록한 책이나 시집을 출간하겠다고 하면 반색을 하다가,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을 강도 높게 비판하거나 하루빨리 여성들이 참정권을 획득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비난이 쇄도했다. (p.193)

헬렌 켈러는 이미 삶을 통해 '몫 없는 자들에게 몫을 주는' 정치를 실천하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가 노동자들의 파업을 촉구하거나 미국의 1차 세계대전 참전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면 불편해했다.

세상은 헬렌 켈러가 그저 '대학을 나온 특별한 장애인'의 자리에 머물기만을 바랐다. 정치하는 여성, 정치하는 장애인의 모습을 상상하지 못해 벌어진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헬렌 켈러는 숨을 거두는 그날까지 이런 기대를 배반하고 자신만의 정치를 펼친다. 

가장 개인적인, 가장 정치적인 

이처럼 <여성, 정치를 하다>에 소개된 21명의 서사는 일면 비슷하면서 다르다. 여성의 역할과 활동 반경을 제하는 사회에 맞서 싸웠다는 점은 같지만, 그 저항을 견뎌내면서 이들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와 과업에는 차이가 있다.

좌절과 실패, 성공이라는 결론도 다르고, 이들에 대한 후대의 평가도 천차만별이다. 여성이었다는 점, 그리고 여성이기 때문에 겪어야만 했던 부당한 대우와 난관을 헤쳐냈다는 점들을 거둬내면 그저 다채로운 개인들이 남을 뿐이다. 

<여성, 정치를 하다>의 저자 장영은씨는 "여성 정치인들의 성취와 좌절을 평가하기 위해 이 책을 쓰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보다는, "왜 한 여성이 패배할 것을 알면서도 정치에 뛰어들었는지 그 이유를 짐작해 보고 싶었다"고 설명한다. 

다시, 선거의 계절이다. 시민을 대변하겠다지만 아직도 여성을 '엄마'나 '아줌마'로 호명하는 정치인들에게, 이 책을 동아제약 성차별 면접 피해자 A씨의 글과 함께 정독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선거판에 뛰어든 모든 이들이 가장 개인적인, 동시에 가장 정치적인 여성들의 서사에서 무언가 길어올릴 수 있길 바란다. 지난 세월 동안 진전을 이뤄낸 부분, 그리고 여전히 퇴행을 거듭하고 있는 현실의 문제들이 이 안에 다 담겨있다. 역사 속의 여성들과 현재의 여성들이 꿈꾸는 '진짜 정치'가 바로 여기 있다.

이들이 멈춰선 자리에서, 다시 나아가야 한다. A씨의 말처럼, "진짜는 지금부터"이기에.

여성, 정치를 하다 - 우리의 몫을 찾기 위해

장영은 (지은이),
민음사, 2021


#여성정치를하다 #장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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