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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을 했다는 이유로... 국군이 수복한 뒤 그들은 죽었다

김포군 양촌면 민간인학살 피해자 유족 정봉운-최용선

등록 2021.04.10 11:42수정 2021.04.10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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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연맹 사건을 다룬 영화 영화 <레드 툼> 스틸 ⓒ <레드 툼>

 
1950년 10월 대한민국 군·경의 수복을 앞둔 경기도 김포군 양촌면 좌익 활동가들은 분주히 움직였다. 김포군 양촌면 인민위원장 김〇〇은 사회주의자로, 전쟁이 터지기 전인 1949년에 전향해 보도연맹에 가입하기도 했다. 6.25 발발 후 북한군 점령(인공) 시절에는 인민위원회 활동을 하다가, 수복 직전 결국 월북을 택했다. 마을에 계속 남아 있다가는 수복한 군·경에게 화를 당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양촌면 인민위원회 간부 2명이 월북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죽음을 면치 못한 이도 있었다. 인민위원회 활동을 한 김동철은 수복 직전 서울로 피신했지만 김포경찰서 경찰에게 검거돼 학살당했다. 

인민위원회에 몸 담은 사람 중 일부는 전혀 다른 선택을 했다. 카멜레온처럼 좌익에서 우익으로 돌변해 '치안대'를 조직한 후 군·경 수복과 동시에 예전에 인민위원회에서 함께 활동한 동지나 부하들을 '부역자'로 잡아들였다. 김진국(가명)은 양촌지서에 소를 갖다 바치기도 했다.

마을 이장과 반장을 했다는 이유로

하지만 치안대원들이 부역혐의를 했다며 잡아온 이들은 기껏해야 마을에서 이장 일을 한 게 전부인 사람들이었다. 인공 시절 마을 이장은 '리인민위원장'으로 불렸는데 직함만 보면 무시무시하지만 어느 시대 어느 정권이든 행정조직은 필요한 법이다. 

한국전쟁 발발 후 대한민국 정부가 밀려나고 북한군이 점령했지만 북한군 아래에서 자발적으로 감투를 쓰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때문에 북한군은 전쟁 이전에 마을에서 이장(구장)을 한 이들을 억지춘향 격으로 마을 인민위원장에 앉혔다. 

6.25 전 김포군 양촌면 수참리(현재는 김포시 통진읍 수참리) 이장을 한 최인덕과 수참리 안말 반장을 한 정경순이 그런 경우다. 그들은 기껏해야 양촌면 인민위원회 간부들의 심부름을 했을 뿐이었다. 수참리 인민위원장 최인덕도 양촌면 인민위원회 간부 김동철의 심부름을 한 죄(?)밖에 없었다. 군·경이 수복한다는 소식에도 최인덕과 정경순은 도망을 가지도 않았다. '내가 죽을 죄를 진 것도 아닌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군경이 수복하자 양촌면 치안대원들은 수참리 최인덕의 집에 들이닥쳤고 최인덕을 군용 전화선으로 묶어 지서로 연행해 갔다. 최인덕이 연행된 데에는 전쟁 전 김진국과의 사감(私感)이 작용했다는 증언이 있다. 최인덕의 손자 최용선(1941년생)은 "김진국씨가 6.25 전 부동산 문제로 법정에 서게 됐는데 할아버지가 증인을 섰어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김진국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어요. 그게 나쁜 감정으로 남아 수복 후에 김진국이 지서에 할아버지를 밀고했다고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며칠 후에는 최인덕의 두 동생도 검거됐다. 최인준은 김포면으로 피난 가던 중 바리미 부근에서 치안대에게 연행됐다. 그는 바리미고개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미군 차에 실려 김포경찰서로 보내졌다.(진실화해위원회, 『2008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최인만은 양곡지서로 붙들려갔다. 수참리 안말의 반장이었던 정경순은 1950년 10월 10일경 양곡지서에서 왔다고 밝힌 치안대원들에게 끌려갔다.

항고에 밥 담아 지서로 날라

최인덕의 손자 최용선은 항고(반합)에 밥을 담아 지서로 갔다. 반합 뚜껑에는 할아버지 이름 '최인덕'을 큼직하게 썼다. 소년은 까치발을 하고 유치장 안 할아버지에게 말을 건넸다. "할아버지, 저 용선이에요." "응, 왔구나. 쪼금 있으면 나가니까 내 걱정 말거라." 말소리를 들은 순경이 호통을 쳤다. "이놈, 얼릉 꺼지지 못해!" 고함 소리에 기겁을 한 최용선은 부리나케 도망갔다.

옆 마을의 정봉운(1942년생) 역시 양곡지서로 잡혀간 아버지 정경순에게 주먹밥을 날랐다. 정경순의 아내 전후임은 남편이 걱정돼 집에 있을 수만은 없었다. 지서와 긴밀했던 김국진을 찾아갔다. "남편이 어떻게 될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금방 나옵니다." 김국진의 말에 전후임은 조금은 안심이 됐다.

최용선과 정봉운이 양곡지서로 주먹밥을 나른 지 일주일 정도 된 어느 날, 지서 순경이 그 둘을 보고 "이제는 밥해올 필요 없다"고 말했다. 그들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고 순진하게도 '이제 내보내 줄라나 보네'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최용선은 밥이 그대로 들어있는 반합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최용선의 어머니 임은예가 "야야, 왜 밥을 그냥 갖고 왔냐?" 하자 최용선은 지서 순경이 한 말을 전했다. 그 소리를 들은 임은예는 "아이고! 아버님"하며 곡을 하기 시작했다. 시아버지 최인덕이 학살됐음을 직감한 것이다. 
 

학살지(한강변 갯벌) 앞에서 학살지 앞에 선 유족. 좌측이 최용선, 우측이 정봉운 ⓒ 박만순

 
군·경 수복 후에 부역 혐의로 양촌지서에 연행된 이는 약 60여 명이었다. 유치장이 꽉 차 지하 방공호에 구금된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구금된 지 일주일 정도 지나 양곡지서와 양곡중학교 뒷산과 여우재, 한강변에서 학살됐다. 최인덕은 양촌면 봉성리의 한강 갯벌에서 죽임을 당했다. 봉성리 사람들이 알려주어 최인덕 집안에서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정봉운이 집안 어른들과 함께 지서에 가니 경찰은 "양곡중학교 뒷산으로 가보라"고 했다. 뒷산에는 죽은 사람들의 팔 다리가 여기저기에 있었다. 경찰과 치안대는 사람을 죽이고 흙으로 다 덮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정봉운은 아버지 정경순의 시신을 수습할 수 없었다. 경찰들이 총을 들고 막아섰기 때문이다.

중앙정보부 시험에 낙방

훗날 건국대학교 경영경제학과를 졸업한 정봉운은 중앙정보부 시험을 쳤다. 다행히 2차 신체검사까지 합격했다. 마지막 관문은 3차 신원조회였다. 그때부터 정봉운은 좌불안석이었다. 혹시나 아버지 관계 일로 문제가 되지 않을까 생각에서다. 그래서 이돈해 국회의원실의 사무장을 찾아갔다. 이돈해(1916~1994)는 김포·강화를 지역구로 하는 제6대(1963~1967년) 공화당 국회의원이었다. 사무장은 "잘 봐달라"는 정봉운의 부탁에 흔쾌히 "걱정하지 마라"고 했다.

그런데 '혹시나' 했던 일은 '역시나'가 되었다. 3차 신원조회에서 불합격된 것이다. 정봉운 집안의 고통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정봉운의 조카가 육군사관학교 시험에서 합격하고도 마찬가지로 신원조회에 걸려 낙방했다.

사실 정봉운은 중앙정보부 시험에서 걱정보다 기대가 더 컸다. 그도 그럴것이 아버지 정경순이 불행하게 생을 마감하긴 했지만 정봉운은 순탄한 삶을 살았다. 어머니 전후임이 김포평야의 논 60마지기(1만 2천평)를 머슴 2명을 두고 농사 지었기에 학교를 다니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그는 양곡초등학교, 김포중학교, 통진고를 나와 건국대학교에 입학했다.

대학 재학 중에는 공군에 입대, 헌병대에 근무했다. 당시 정봉운은 '전투비행단 체육대회'에 출전해 1등을 했는데, 4명이 한 조가 되어 완전군장을 하고 뜀박질하는 경기였다. 100팀이 출전했는데 그가 속한 조가 1등을 한 것이다. 부상으로 3박4일 휴가가 나왔다. 여기에다 전대장(戰隊長)이 정봉운에게 "너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물었다. 전대장은 공군에서 단보다는 작고 대대보다는 큰 단위 부대의 최고 책임자를 말한다.

정봉운은 전대장에게 "VIP 행사요원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VIP 행사요원은 대통령과 국내외 주요인사의 해외순방과 국내 입국시 안내를 맡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해서 정봉운은 1964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을 순방할 때와 1964년 12월 24일 로버트 케네디(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의 국내 방문시 행사요원 일을 했다. 그는 VIP 행사요원으로 복무하면서 학업에 열중했다. 그렇기에 제대 후 건국대를 졸업하고 중앙정보부 시험에 응시했을 때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는 냉혹했다.

'진실규명 결정문' 확대 복사해 붙여놔

정봉운은 아버지 일을 반세기가 넘게 '쉬쉬'하고 살았다. 본인이 중앙정보부 시험에서 불합격하고 조카가 육군사관학교 시험에 낙방한 이후로는 더욱 위축됐다. 그는 2005년 과거사법이 제정되자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국가는 정봉운의 아버지 정경순이 국가 공권력에 의해 불법적으로 학살당했다고 규명했다. '진실규명 결정문'을 받은 정봉운(79,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홍도동)은 하늘을 날 것 같았다. 반세기 만에 아버지의 명예가 회복된 것이다.

그는 진실규명 결정문을 확대 복사해서 안방에 붙여놓고 조카를 비롯한 집안 식구들에게도 나눠주었다. 이제는 아버지 이야기하는 것이 떳떳해졌다. 인터뷰 말미 최인덕의 손자 최용선(80, 경기도 의정부시 신곡동)은 "우리와 같이 억울하게 가족을 잃은 이들이 이번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에 많이 신청해 억울함을 벗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인민위원장 #치안대 #양곡지서 #한경변 #중앙정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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