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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의 성자' 노무라 모토유키가 한국 60번 방문한 사연

한 달 넘게 이메일로 노무라와 대화 진행... 한국 빈민선교 위해 일한 그의 생애

등록 2021.03.29 15:17수정 2021.03.29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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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라 모토유키 ⓒ 노무라 모토유키



지난 2016년 필자는 '한국 기독교의 '변절'... 김진홍·박홍 그리고 명동성당' (http://omn.kr/l2s3)이란 글을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바 있다. 그런데 지난 2월 이 기사를 읽었다며 일본에 거주하는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가 내게 연락이 왔다. 노무라는 내게 보낸 이메일에서 "김진홍은 변절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그랬습니다. 김진홍의 본모습을 한국 언론에서 드러내 주면 좋겠습니다"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필자는 김진홍보다는 노무라가 살아 온 길에 대해서 더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지난 2월 2일부터 3월 16일까지 수차례의 이메일 교환을 통해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조명했다.

어려서부터 재일동포 차별 목격한 노무라 모토유키  
 

노무라 모토유키 ⓒ 노무라 모토유키



노무라 모토유키는 1931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가 살던 동네에는 가난한 재일동포와 그 자녀들이 많았다. 동네 일본아이들은 한국인들을 멸시하고 조롱하는 노래를 부르며 놀았다. 5살쯤 되었을 때 그는 동네 일본아이들이 한국아이들을 멸시하고 차별하는 것에 분노와 반발감이 들기 시작했다.

1938년 그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동네 대부분 한국아이들은 가정이 빈곤해 생활고로 일하러 다녀야 했기에 초등학교에도 다닐 수 없었다. 그의 동네 한국아이들 중 단 두 명만 초등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두 명의 한국아이들은 학교에서 일본아이들에게 수없이 왕따와 놀림을 당했다. 그는 그런 일본아이들에게 심한 분노감을 가졌고 반면 그 두 명의 한국아이들과 더 친하게 지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진주만 공습에 이어 남태평양에서 미국, 영국, 네덜란드 등과 전투를 벌였다. 그 후 일본은 말레이시아를 침략해 고무 생산지를 점령했다. 그리고 그 기념으로 고무공을 만들어 일본 학교 학생들에게 선물로 나눠주었다. 당시 고무공은 고가의 것이었다. 그러나 노무라와 같은 반에서 배우고 있던 두 명의 한국 학생들에게는 고무공이 배당되지 않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당시 일본정부는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교복을 무료로 배포했다. 그러나 이 교복의 배포도 한국 학생들은 제외되었다. 일본정부는 심지어 어린 재일동포 학생들에게조차 철저한 차별정책을 벌였다. 


당시 10살 소년 노무라는 일본정부가 한국인에 대해, 특별히 아이들에게조차, 노골적인 차별정책을 펴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이 부당한 차별을 보며 노무라는 비록 모국이지만 일본정부의 너무도 협소한 정책에 대해 큰 분노를 품게 되었다. 더욱이 일본아이들은 한국아이들을 놀리고 야유하는 노래를 부르며 다녔다. 이런 과정을 겪으며 그는 일본사회가 무엇인가 많이 잘못되었다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한편, 2차대전으로 일본이 전시체제로 접어들면서 학교수업은 군사훈련으로 대체되어갔다. 그래서 그전까지는 공부를 잘했던 그는 점점 학업, 즉 군사훈련에 대해 관심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그가 중학교에 들어가도 일반 수업은 없고 매일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다. 전쟁이 깊어감에 따라 물자부족으로 식료품도 나날이 감소했다. 그러자 일본정부는 일본인들에게만 배급을 주고 재일동포는 배급을 주지 않았다. 이에 재일동포들은 아사를 면하기 위해 잡초까지 먹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미국에서 겪은 인종차별
 

노무라 모토유키 ⓒ 노무라 모토유키


 1945년 8월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하고 미국이 일본을 점령했다. 그러자 일본인들은 재일동포들은 더욱 심하게 내놓고 '3등시민'으로 대하며 차별하고 혐오하기 시작했다. 이때 그는 한국에서 일본으로 유학 와 있던 김오남을 만났다. 김오남은 전라북도 출신이었다. 한국에서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김오남은 큰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다. 또 한국 유학생으로 일본에서 숙소나 직장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래서 그는 김오남에게 숙식을 제공 해주며 언젠가 한국을 방문하겠노라고 마음먹었다.

한편, 평소 동물을 좋아하던 노무라는 1950년 도쿄대학 수의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대학에서 마취제가 부족해 동물들을 마취제 없이 해부하고 실험하는 것에 그는 큰 충격을 받고 수의학을 전공한 것에 큰 후회와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53년 말 그에게 미국 유학길이 열렸다. 그래서 그는 도미해 전공을 수의학에서 신학으로 바꿨다. 그 후 미국 켄터키성서대학, 남동부기독교대학, LA바이올라종합대학, 페퍼다인대학원 등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안수를 받은 후 1961년 유학간지 8년 만에 일본으로 돌아왔다.

미국에서 8년간 유학생활은 노무라가 일본의 재일동포 차별문제를 더 깊이 피부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 그는 장학금을 받았지만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접시 닦기 등 여러 '알바'를 해야 했다. 2차대전과 6.25전쟁 또 1955년 시작된 베트남전쟁 때문에 그런지 당시 그가 만난 다수 미국인들에겐 반일감정, 반중감정, 반베트남감정이 강했다. 그래서 그는 미국 백인들로부터 종종 유색인종에 대한 심한 인종차별을 처음으로 겪었다. 그 와중에 그는 테러사고를 당해 왼쪽 신장을 잃는 수술을 받기도 했다.

그가 미국에 처음 갔을 때인 1953년 말 그는 버스의 좌석에 백인석과 흑인석이 따로 있는 것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뿐이 아니라 화장실, 수영장, 체육관, 식당 등도 모두 인종별로 구분되어 있었다. 그는 흑인도 백인도 아닌 몸이었기 때문에 어느 쪽 시설을 이용해야 할지 상당히 난감했다. 그는 미국에 살면서 미국은 맥아더 장군이 점령국 일본에서 선전하고 있던 이상적인 나라는 아닌 것을 실감했다.

그가 공부하던 켄터키의 작은 성서대학에서 1954년 9월 신학기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학생들 중에 흑인은 한 명도 없었다. 어느 날 그는 동네 교회의 수요일 저녁예배에 참석하고 싶어 대학으로부터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교회를 찾았다. 큰 무거운 교회 문을 밀고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키가 큰 한 백인남성이 그에게 다가오며 이렇게 물었다. "네가 동네신문에 소개되었던 '쪽발이 소년(Jap boy)' 인가?"

노무라는 기독교인이 자신을 '쪽발이(Jap)'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래도 공손하게 "Yes, Sir. 네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백인남성은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는 '쪽발이'를 수용하는 교회는 아니다! 당장 나가!(Get out!)"라며 소리쳤다. 그러면서 키가 작은 그의 목 셔츠의 목덜미를 꽉 쥐며 그를 문밖으로 내던져버렸다. 그는 미국의 무서운 인종차별을 피부로 체험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에 사는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에게 받는 차별문제를 더욱 깊이 실감하게 되었다.

빈민선교를 하면서 만난 김진홍 목사 
 

노무라 모토유키 ⓒ 노무라 모토유키



1961년 미국유학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온 후 그는 재일교포 차별문제에 더 깊이 적극적으로 관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본인들의 재일교포 차별에 대한 사죄의 마음으로 마침내 1968년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했다. 한국에서 청계천 빈민가 등을 방문한 그는 한국의 노동자와 서민들이 받는 고통에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의 빈민선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3년 그는 한국의 도시산업선교회를 방문해 자신이 빈민을 위해 봉사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도시산업선교회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박정희 정권하에서 긴급조치에 의해서 감옥살이를 했던 사람들이었다.

이후 도시산업선교회의 한 관계자는 그를 활빈교회로 안내해 주었다. 그곳에서 그는 김진홍(1941~ ) 목사와 만났다. 그는 당시 한문과 영어단어로 김진홍과 간신히 의사소통을 했다. 김진홍은 "한국의 많은 교회는 지금 거의 미국교회로부터 경제원조를 얻고 있지만 활빈교회는 자립·자활·자양·자전도를 하고 있다"며 자랑스러운 듯 그에게 말했다. 그런 활빈교회를 위해 노무라는 연대활동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김진홍은 그에게 활빈교회를 위해 카메라, 전기면도기, 악기, 학생교재, 의료품 등을 구해달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일본, 독일, 호주 등에서 모금활동을 벌이고 추가로 자비를 털어 김진홍에게 카메라 몇십대, 독일제 전기면도기, 수 톤의 의료품, 학생들을 위한 교재 등을 구입해 전달했다. 

그리고 김진홍을 믿고 얼마의 후원금도 주었다. 나는 노무라가 지난 1968년 처음 한국을 방문한 이래 청계천 빈민가를 방문한 뒤 충격을 받고 그 후 한국을 60여 번 방문하며 빈민선교활동에 나섰던 것을 확인했다. 또한 노무라는 독일, 호주, 일본 등에서 모금을 해 20여 년간 2천여 명의 청계천 아동을 위한 급식제공, 자활공동체 탁아소건립 등의 구제활동을 펼쳤다.

그는 그동안 빈민선교를 위해 "한국으로 보낸 돈이 7500만 엔(약 8억 1500만 원) 정도"라고 말했다. 노무라는 지난 2006년 청계천의 사진과 서울 지도 등 1970년대 청계천에 대한 자료 800여 점을 서울시에 기증했고, 지난 2013년 서울명예시민이 되었다. 그리고 지난 2015년 서울에서 노무라는 제1회 아시아 필란트로피 상을 받았다.
#노무라 모토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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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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