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보험료 계속 냈는데도 건강보험에서 배제되었습니다

산재보험과 건강보험의 사각지대에 갇힌 산재 노동자들

등록 2021.03.30 19:13수정 2021.03.30 19:14
5
원고료로 응원
a

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사진 ⓒ 연합뉴스

 
암 요양병원에서 요양 중이던 진희씨(가명)는 지난 1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그리고 바로 요양병원을 나와야 했다. 무슨 전화였기에 진희씨는 그리 황급히 짐을 싸서 나왔을까?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진희씨가 2년 동안 건강보험 급여를 부정수급했으니 1400만 원을 환수하겠다는 전화였다. 급작스러운 전화에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2년 동안 전화 한 통, 안내장 한 번 보내지 않았던 건강보험공단이었다. 사채를 쓴 것도 아닌데 빚쟁이처럼 독촉 전화를 계속해대고 부모님께 연락하겠다고 으름장까지 놓았다. 진희씨는 3월 말까지 1400만 원이 넘는 돈을 한꺼번에 다 토해내야 한다. 진희씨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까?

진희씨가 억울한 건 '왜 자신이 범법자, 죄인 취급을 받아야 하느냐'이다. 진희씨는 2016년 난소암 진단을 받았다. 2차례 수술로 종양을 제거하고 자궁까지 적출했다. 항암치료 과정에서 가족에게 짐이 되기 싫어 요양병원으로 들어갔다. 위급한 상황이 반복되고 혼자 사는 처지에서 요양병원은 최선의 선택이었다.

일 년쯤 지났을까. 남동생이 한마디 툭 던졌다. "누나는 LG반도체에서 일하다가 아픈 거야. 거기서 보상받아야 해." 머리가 턱 얻어맞은 듯했다. 암에 걸릴 이유를 찾고 찾다가 막연히 '어릴 때부터 일을 많이 해서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직업병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동생의 한마디에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을 알게 됐다.

진희씨는 고등학교 3학년인 1995년부터 1998년까지 LG반도체(현 SK하이닉스)에서 일했다. 당시 반도체 클린룸이 보기와 다르게 얼마나 많은 유해화학물질로 가득했는지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얇은 마스크 하나에 방진복만 입고 일하는데, 엔지니어들이나 높은 사람들이 라인에 들어올 때는 우주복처럼 입고 들어와요. 당시에는 기술력이 부족해서 엔지니어들이 산소통을 매는 게 아니라 짐수레에 끌면서 다녔어요. 사장이 일 년에 한 번씩 라인을 시찰하는데 10분 정도 머물러요. 사장이 오면 작업장에서 못 나오게 하는데 공장장 몰래 복도를 지나가는 사장과 수행단을 봤어요.

사장과 수행단이 우주복처럼 입고 있고 수행 한 명이 사장 옆에서 산소통을 끌고 다녔어요. 그 모습을 보면서 '뭔가 이상하구나'라고 느꼈죠. 항상 매캐한 연기가 났고 가스누출이나 장비 고장도 잦았어요. 라인을 고치다가 가스누출이 됐는데 저만 혼자 두고 엔지니어들이 다 나가버리는 경우도 있었어요."


코피가 자주 나기 시작했고 한 번 터진 코피는 잘 멈추지 않았다. 하혈도 잦아졌고 패드로는 감당이 안됐다. 초 단위로 집중해야 하는 작업이라 화장실도 자주 갈 수 없었다. 병원을 가고 싶어도 밀려드는 물량에 휴가 내기가 어려웠다. 결국 퇴사를 결심했다.

건강보험공단의 책임은 전혀 없는가

진희씨는 반올림의 도움으로 2018년 산업재해(이하 산재) 신청을 했고 2019년 근로복지공단은 진희씨의 난소암을 산재로 인정했다.

병원에서 진희씨는 오늘 같이 밥 먹던 환우가 내일 항암 치료받다가 사망하는 일을 수도 없이 보았다. 죽음이 멀리 있지 않았기에 매일매일 두려움이 덮쳤다. 난소암의 낮은 생존율을 이겨내기 위해서 몸과 마음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루하루 버텼다. 기대하지 않았던 산재 인정은 그런 와중에 찾아온 행운이었다. 병을 이기기 위해 더 힘을 냈다.

산재 승인 후 별다른 안내를 받지 못한 진희씨는 머물던 요양병원에 계속 머물렀다. 진희씨가 머물던 요양병원은 산재 지정병원이 아니었다. 산재 '비지정'병원에서 요양하면 산재보험의 적용을 받지 못한다.

"산재 승인 후 산재 지정병원과 비지정병원에 대해 안내를 받았다면 바로 나왔을 거예요. 비지정병원에 있으면 산재보험 적용을 받지 못한다는 안내를 받아본 적이 없어요."

근로복지공단이 친절한 금자씨가 아니라는 사실을 잠깐 잊었나 보다. 산재 노동자가 산재보험을 받으려면 모든 것을 알아서 해야 하는데 진희씨가 알아서 찾아보지 않은 게 죄다.

산재지정병원 제도는 산재 노동자의 의료기관 선택권을 제한한다. 국립병원 중 대표적인 국립암센터와 원자력병원도 아직 산재 지정병원이 아니다. 하물며 가까운 동네에서, 암 요양병원에서 산재 지정병원을 손쉽게 찾을 수 있을까?

비지정병원이라도 산재 노동자가 자신에게 맞는 병원에 가기를 원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산재보험 적용만 못 받는 게 아니다. 국민건강보험마저 적용되지 않는다. 건강보험료를 계속 내고 있는데도 산재 노동자라는 이유로 건강보험에서 배제된다.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국민건강보험법 53조 4항에 따르면 '업무 또는 공무로 생긴 질병·부상·재해로 다른 법령에 따른 보험급여나 보상(報償) 또는 보상(補償)을 받게 되는 경우' 건강보험 급여를 지급하지 않는다. 쉽게 말해, 진희씨는 산재보험 급여를 받을 수 있으니 건강보험 급여는 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진작 알려주든지. 이런 게 있다고. 건강보험공단은 왜 2년 동안 이런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을까? 1400만 원이 넘는 돈이 쌓일 동안 전화 한 통, 안내장 한 번 보내지 않은 건강보험공단의 책임은 전혀 없는가? 이 또한 진희씨가 모든 것을 알아서 알아봐야 했는데 그렇지 않은 죄인가? 근로복지공단이든 건강보험공단이든 어느 한 곳에서만이라도 사전에 또는 빨리 안내해줬으면 이런 상황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공단은 적극적으로 구제책을 내놓아야
 
a

근로복지공단 자료사진 ⓒ 윤성효

 
"산재보험법의 적용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국민건강보험법을 적용하지 않는 것은 사회보험이익을 과도하게 제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회보장제도의 본질에도 반하는 것이므로 산재보험 급여 대상이 되지 않는 요양은 건강보험법을 적용하도록 함이 타당하다."

2007년 국민고충처리위원회(현 국민권익위원회)는 '산재환자의 요양급여 지급 제도개선 권고안'을 냈다. 진희씨 같은 산재환자의 사회보험 사각지대를 해소할 수 있도록 국민건강보험법을 개정하라는 내용이다. 

산재 노동자가 건강보험료를 납부하고 있는데 건강보험을 적용하지 않는 것은 국민의 기본권을 과도하게 제한하고 있는 것이니 국민건강보험법이 개정될 때까지 지침을 마련하거나 관련 지침을 개정하라는 내용도 덧붙였다.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이 이를 수용한다고 밝혔다.

권고안이 나온 지 14년이 흘렀다. 건강한 국민에서 암 환자로, 암 환자에서 산재 노동자로, 산재 노동자에서 부당수급자로 떠밀려 여기까지 왔다. 지금의 상황이 과연 진희씨의 잘못일까?

"사지로 몰지 마세요. 살려고 열심히 치료받았을 뿐인데 제가 왜 범법자 취급을 받아야 하나요? 저는 국민이 아닌가요? 이런 부분들을 몰라서 저 같은 피해자가 또 나오지 않도록 개선해야 합니다. 국가가 저를 버렸다는 생각이 계속 들어요. 감당하기가 힘들어요."

무뎌진 칼날은 목숨을 앗아가지 않지만, 무뎌진 감수성은 목숨까지 앗아갈 수 있다. 진희씨는 단순히 반도체 암 산재 노동자 3442명에 포함된 숫자가 아니다. 근로복지공단에 건강보험공단에 쌓여 있는 서류가 아니다. 어렵게 버티고 있는 진희씨가 이번 일로 몸과 마음이 더 악화되지 않도록 두 공단은 적극적으로 구제책을 내놓아야 한다.
댓글5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네이버 채널에서 오마이뉴스를 구독하세요

최소수자의 최소 고통을 위하여

AD

AD

인기기사

  1. 1 윤석열 지지자들의 이중성
  2. 2 '갯마을 차차차' 배경 공진, 지금 난리 났네요
  3. 3 "세 놈과 한 년이 기척도 없이 방에..." 제가 당사자입니다
  4. 4 하늘과 맞닿은 20만 평 억새밭... 안 보면 후회합니다
  5. 5 망언→남탓→망언→사과→망언... 윤석열의 무한반복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