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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 '세계의 홍세화'들을 만나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 인터뷰 ①] 그가 외국인 보호소에 가는 이유

등록 2021.04.03 11:42수정 2021.04.03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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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 그는 프랑스 파리에서 20년간 난민으로 생활했고 이주 노동자로 일했다. 그 시간을 담은 책이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이다. 그의 말을 빌자면 자신 말고도 한국계 난민과 이주 노동자는 역사적으로 많이 있었다.

"대한민국의 출발은 난민들에 의한 망명 임시정부였습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처지를 어떻게 난민과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런 뿌리를 둔 대한민국이 오늘 세계의 난민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 (홍세화, 2019.12.18. '세계 이주민의 날 기념' 제1회 이주민 심포지엄)

1919년, 중국 상해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정치적 난민'인 독립투사들이 설립한 망명 정부였다. 북간도와 블라디보스토크와 중앙아시아, 중국 등지에서 일하던 한국계 이주 노동자들은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일제 초기 중남미 이민과 1970년대 미국 이민 열풍까지. 한국은 이주노동자 배출국이었다. 현재 세계 한인은 약 750만 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홍세화가 말하는 '세계의 난민'들은 지금 한국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우리는 보통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서 '문제의 난민'을 만날 뿐이다. 이주 노동자들은 자주 볼 수 있지만, 뉴스에는 미등록 이주 노동자나 외국인 범죄 사건이 있을 때 주로 다룬다. 언론이 만들어놓은 프레임을 통해서만 만나는 사람들, 난민과 이주노동자.

홍세화는 이들을 만나러 '면회'를 간다. 군대나 교도소에 주로 쓰이는 단어인 '면회'라니.

외국인 보호소는 강제퇴거 명령을 받은 외국인이 출국할 때까지 임시로 지내는 시설이다. 화성 외국인 보호소, 청주 외국인 보호소, 여수 외국인 사무소가 있다. 전국의 보호소 외국인은 773명(단체 '아시아의 친구들' 2020.9.3 기준)으로 추정되고 있다. 

홍세화는 시민 모임 '마중'의 일원으로 합류해서 외국인 보호소에 갇힌 난민이나 이주 노동자를 지원하는 일을 함께 하고 있다. '마중' 회원들은 5년 전부터 면회 활동을 하고 있다. 지금은 코로나19 때문에 면회가 중지된 상태다. 진보 정치와 민중 운동, 그리고 집필 활동을 꾸준히 해왔던 홍세화는 왜 지금 난민과 이주 노동자를 이야기할까? 그리고 왜 이들을 만나러 외국인 보호소를 방문할까? 지난 6일 토요일 일산에서 그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보호소에는 저같은 사람들이... 한국 인권 수준 얼마나 낮나"
 

시민 모임 '마중' 회원 홍세화.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 저자. ‘장발장 은행’ 은행장 ‘소박한 자유인’ 대표이다. ⓒ 김창섭


홍세화에게 외국인 보호소로 면회 가는 이유를 물었다. 그는 우선 질문 교정부터 시작했다.

"외국인 보호소가 말이 보호소지 일종의 구금소예요."

보호가 아니라 구금. 법에서는 구금을 이렇게 정의한다. '주로 도망 또는 증거인멸을 방지할 목적으로 피의자를 교도소 또는 구치소에 구속하는 것'. 그럼 누가 구금되어 있을까? 말레이시아의 홍세화, 나이지리아의 홍세화, 모로코의 홍세화…

"보호소에는 난민 신청이 거부된 사람들이지만 대부분 난민이고 이주 노동자입니다. 저와 출신이 같습니다. 동시에 그들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한국 인권 현실이 얼마나 낮은 수준에 있는지 알 수 있는 증거입니다. 저에게는 개인적인 공감대도 있지만, 한국의 인권 문제를 드러내야 하는 시민으로서 책무도 있습니다."

한국의 인권 현실은 만만치 않다. 얼마 전에 군대에서 쫓겨나 결국은 하늘로 떠난 변희수 하사의 가슴 아픈 죽음, 과로사하는 택배 노동자, 산업 현장에서 끊임없이 죽어가는 노동자. 이런 한국 인권 현실에서 외국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중요할까? 그는 말을 이었다.

"이들은 한국의 제도적 상황과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장 낮은 노동 조건'으로 내몰립니다. 예컨대, 고용허가제가 있습니다. 고용허가제는 노동자에게 일할 권리는 주는 노동허가제와 달리 고용주에게 이주노동자를 고용할 권리는 주는 것입니다. 이주노동자는 권리의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법 때문에 이주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쉽게 바꿀 수도 없습니다."

"회사를 바꿀 자유가 없다고 상상해보세요. 무조건 사장 말을 들어야 합니다. 영원한 '을'이 됩니다. 캄보디아 여성 이주 노동자 속헹씨도 이와 비슷하게 열악한 환경에서 노동하고 생활했습니다."


속헹씨의 일터는 농장이었고 숙소는 비닐하우스였다. 지난해(2020년) 겨울 영하 18도까지 내려간 어느 날 그는 비닐하우스에서 사망했다. 그는 20일 후에 고향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경찰은 간경화라고 주장한다. 동료들은 숙소에 전력 공급이 끊겼다고 증언했다. 간경화면 왜 치료를 못 받았을까? 영하 18도에 비닐하우스에서 자게 된 원인은 그냥 보일러 고장일 뿐일까? 이 모든 건 우리가 이주 노동자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시작되지 않았을까?

노동 현장에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도 계속되고 있다. 2019년 산업재해를 당한 이주 노동자는 3542명, 사망자는 47명이다. (고용노동부 2020.10.11. 이수진, 송옥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제출한 '최근 5년간 외국인노동자 산업재해 현황' 자료)

이유도 모른 채 갇혀 있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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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이주여성노동자 누온 속헹씨가 경기도 포천 비닐하우스 기숙사안에 설치된 조립식패널 숙소에서 사망한 지 50여 일이 지난 지난 2월 9일 이주노동자 기숙사 산재사망 사건 대책위가 청와대앞에서 임시가건물 숙소 금지, 사업주 월세장사를 위한 '숙식비 징수지침' 폐지, 이주노동자 사업장 이동의 자유 보장, 이주노동자 기숙사 전체 실태 조사 등을 촉구하고 있다. ⓒ 권우성

 
열악한 주거 환경과 생명을 위협하는 노동 현장에서 보호소 아니 교도소로 온 사람들. 홍세화는 말한다.

"지금 화성 외국인 보호소에 있는 사람들은 두 가지의 신분을 가지고 있어요. 이주노동자이면서 동시에 '불법체류자'라고 규정되어 구금된 재소자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어떤 일로 갇혀 있고 얼마나 갇혀 있나. 저는 보호소에 구금된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1971년 미셸 푸코가 프랑스에서 결성했던 '감옥정보그룹' 선언문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홍세화가 설명한 '감옥정보그룹 선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감옥이 무엇인지, 누가 거기에 가고 어떻게 왜 거기에 가는지,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죄수들과 그 감시원들의 생활은 어떤 것인지, 감옥의 건물, 음식, 위생 상태는 어떠한지, 내부 규칙과 의학적 통제와 작업장은 어떠한지를 세상에 알리고 싶다. 그리고 거기에서 어떻게 빠져나오는지, 또 우리 사회에서 출소자들의 지위는 어떠한 것인지를 알리고 싶다. - 디디에 에리봉 <미셸 푸코 1926~1984>. 박정수 지음 <'장판'에서 푸코 읽기>에서 재인용 (홍세화 칼럼. 2021.01.14. '화성외국인보호소에서')
 
감옥정보그룹(GIP)은 1971년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가 감옥의 열악한 상황을 알리기 위해 창설했다. 투옥된 수감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정보를 수집했다.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 자크 동즐로 등도 합류해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감옥정보그룹은 시민 모임 마중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다.

그와 함께하는 마중은 아시아의 친구들, 수원 이주민 센터, 개인 참여자들이다. 이들은 단지 체류자격을 증명할 수 없다는 이유로 법원의 영장도 없이, 기간의 제한도 없이 장기간 외국인보호소에 갇혀 있는 이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어려움을 돕고 있다. 면회할 때, 생필품과 국제전화카드, 내복, 코란, 한국어 사전, 의약품을 넣어준다. 외부 병원 진료가 필요한 외국인에게 의료비를 소액 지원한다. 그러나 현재 코로나 때문에 면회가 중지돼서 전화와 우편으로 소통하고 있다. 이것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우리가 먼저 그들에게 전화할 수 없어요. 구금된 외국인들이 보호소 측에 허락을 받고 우리에게 전화해야 합니다. 개인 휴대 전화를 빼앗겼기 때문에 전화도 쉽지 않습니다."

구금된 외국인들은 전화카드만 사용할 수 있다. 마중 활동가들은 물론 가족과 친구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도 어렵다. 국제전화카드를 사용하지만 애초에 사용하는 핸드폰을 왜 뺏는 걸까? 핸드폰만 있다면 화상통화로 외국의 가족들을 볼 수 있을 텐데. 만약 내가 외국의 보호소에 갇혔다면 나는 어땠을까?

소통이 어려운 문제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언어의 문제도 있다. 구금된 이들은 말레이시아, 나이지리아, 모로코, 중국, 몽골, 시리아, 베트남… 다양한 국적으로 언어의 장벽이 따른다. 마중활동가들도 모든 언어를 알지 못해서 손, 발, 그림, 몸짓을 활용해서 소통한다(외국어를 하는 많은 시민의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다. 더 큰 문제도 있다.

"구금 초기에 자기가 왜 갇혀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도 있어요. 어떻게 해야 나갈 수 있는지도 모르죠. 소통이 전혀 안 되니까요."

그들이 알 수 있는 건 외국인 보호소에 쓰여 있는 이름이다. 'detention center' 한국말로 구치소다. 외국인 보호소의 실체는 영어로 드러났다. 외국인 구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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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13일 화성외국인보호소에 구금된 미누(본명 미노드 목탄)씨가 강제 추방되기 전 면담 모습. 미누씨는 한국에서 이주노동자이자 이주민 인권 활동가이며, 현 이주민 방송 MWTV 대표였고, 밴드 ‘스탑크랙다운’ 멤버로 18년 동안 살았다. 그는 강제 추방된 후 네팔에서 세상을 떠났다. ⓒ 고기복


이제 구치소에서 일어나는 일을 들여다보자. 일단 구금된 이들에게 수의를 입힌다.

"수의는 도주할 경우 눈에 띄게 하려고 입히는 옷입니다."
 
한국에 일하러 왔다가 수의를 입은 사람들. 이들은 자국의 교도소보다 못한 생활을 하고 있다. 특히 식사는 가장 큰 문제다. 굶는 사람도 허다하다고 한다. 무슬림은 할랄 음식을 먹기 때문에 식사 재료를 알고 먹어야 한다. 이것도 평소에 구치소 측의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다. 돼지고기만 빼면 된다고 생각하면 큰일이다. 돼지고기를 주식으로 먹는 중국인들에게는 한국 사람에게 김치와 밥을 뺏는 일과 비슷하다.

"제일 괴로워하는 사람은 중국인입니다. 중국 음식에는 돼지고기가 가장 많이 들어갑니다. 장기간 돼지고기가 없는 음식을 먹게 되니 너무 힘들어하죠."

실제로 이들의 영양 상태에 대한 체크는 이루어질까? 건강은 어떨까? 마중 활동 중에 중요한 것 중 하나는 구금된 이들의 건강 상태 확인이다. 얼굴을 마주보면서 살이 빠졌는지, 혈색은 어떤지, 아픈 곳은 없는지 확인해야 하는데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그것도 힘들다. 생필품도 부족하다. 개인물품을 챙길 시간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출입국 공무원은 단속을 명분으로 영장 없이 이들을 수색한다. 단속 과정에서 이주 노동자들은 몇 년 동안 일을 해서 번 돈이나 귀중품을 챙기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보니 외국인 구치소 생활은 항상 결핍, 결핍이다.
      
"아주 부조리한 상황, 인권이라고 말할 수조차 없어"
    
프랑스의 홍세화는 파리에서 택시 운전사를 했는데, '세계의 홍세화들'은 왜 한국에서 수의를 입은 채 구금이 되어 있을까?

"보호소 외국인은 크게 둘로 나눠집니다. 체류 기간이 지난 외국인은 강제 송환 전까지 있습니다. 보통 단기간입니다. 다른 하나는 '난민 신청자'입니다. 난민 신청이 거부되면 재판을 진행합니다. 이 때문에 장기간 갇혀 있습니다."

"요즘은 새로운 문제도 생겼습니다. 보호소에는 코로나19로 일주일, 열흘 후에 자국으로 돌아갈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국이 국경 봉쇄를 하게 되면 돌아갈 수도, 한국에 있을 수도 없습니다. 이런 경우에도 보호소에 장기간 갇혀 있습니다. 베트남의 경우, 코로나19 방역으로 국경을 봉쇄해서 갈 수가 없어요(현재 이 문제는 해결됐다). 당장 고국으로 가고 싶은 사람들도 항공편이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것도 상황을 어렵게 만듭니다. 코로나19 때문에 보호소에 갇힌 사람들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왜 우리를 가둬놓느냐'고 항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보호소에 있는 이들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제기하고 있습니다."


외국인보호소에 장기 구금되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코로나19 같은 천재지변 상황이다. 지금은 이주 노동자들이 출국 예정일에도 자국으로 쉽게 돌아갈 수 없는 코로나19 상황이다. 그런데 한국에 더 체류하면 불법이 된다. 외국인이 이렇게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가 되면, 한국은 이들을 구금한다. 두 번째는 난민 신청자나 이주 노동자가 소송 중에 있을 때도 보호소에 갇혀 있다. 난민 신청자는 난민 지위 획득을 위해, 이주 노동자는 임금 체불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소송을 한다. 이 모두 3심 재판을 받는다. 기간은 3개월에서 1년 혹은 2년. 재판이 길어지면서 4년 넘게 갇혀 있는 사례도 있다.

"재판이 길어지는 것도 문제지만 재판 결과는 더 큰 문제입니다. 난민 신청은 대부분 불인정돼요. 난민들은 갈 수도, 갈 곳도 없는 처지가 됩니다. 그럼 계속 가둬둬야 하나요? 이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을 해야 하는데..."

물론 구제 조치도 있다. 외국인보호소에 있는 사람들은 '보호 일시 해제' 요청을 할 수 있다. 법무부가 정한 요청 사유에 맞으면 일정 기간 구금 해제를 할 수 있다. 요청 사유로는 질환치료, 재판이 장기화하거나 임금 체불 등이 있다. 여기서도 넘기 힘든 현실적인 벽이 있다.

"그런데 보호 일시 해제는 구금된 사람들이 보증인을 세우고 보증금을 내야 가능해요. 최저 300만 원에서 2000만 원을 내야 합니다. 그리고 3개월 마다 연장 신청을 해야 해요. 돈을 마련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신청하기 힘들죠. 게다가 신원 보증은 더 어렵습니다. 보호해제가 돼도 일도 못 하는데 어떻게 살라는 건지… 환자는 또 어떻게 치료 하라는 건지… 아주 부조리한 상황입니다. 인권이라고 말할 수조차 없고 여러 가지 문제가 좀 심각합니다."

결국 아프지 않고 먹고 살 수 있는 일자리를 가져야 하는데 그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다. 보호소에서 나가도 한국 사회라는 감옥이 기다리고 있다. 안에도, 밖에도 감옥이다. 이 부조리는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홍세화는 보호소 제도의 문제라고 말한다. 외국인 보호소는 일본에서 가져온 제도다.

"한국 외국인 보호소는 일본의 오무라 수용소를 본떠 왔어요. 당시 오무라 수용소에 구금된 외국인은 대부분 한국인이었습니다."
 
일본의 '법무성 오무라 입국자 수용소'는 '형기 없는 감옥'이라 불렸다. 이곳에 갇힌 외국인은 주로 한국인이었다. 1950년 한국 전쟁 이후 남북한에서 다수의 난민이 발생했다. 정치, 경제적 이유로 한인들은 일본으로 밀항했다. 당시 한국인을 구금했던 곳이 오무라 수용소다. 결국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밀항자가 되어 구금됐다. 이곳은 최대 수용 인원 800명이다. 오무라 수용소를 경험한 제주도 사람들은 1만 5천 명 이상이었다고 한다(제주의 소리 2010.12.16).

우리는 일본의 국수주의와 폐쇄성 그리고 외국인 차별정책(외국인 지문 날인제도 등)에 대한 비판을 해왔다. 하지만 그 차별 정책의 본산을 그대로 따라 하고 있다면 일본과 다를 게 무엇이란 말인가? 한국에 오는 이주 노동자와 난민 신청자들을 위해 준비한 것이 보호소와 보증인을 세우고 보증금을 내라는 것밖에 없을까? 홍세화의 대답은 계속된다. 여기까지 1부로 하고 2부에서는 제도적인 문제를 더 심도 깊게 다루기로 한다.

☞ 다음 기사 : [인터뷰 ②] "난민 배척 한국, 'GDP 인종주의'와 공포 때문"
 

2019년 11월 6일 다산인권센터 등은 법무부 과천 청사 앞에서 '보호’ 중 사망한 보호외국인 추모 및 잇따른 단속 구금 사망사건 규탄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화성외국인보호소 보호외국인 사망사건에 대해 법무부는 사과하고 재발방지대책을 마련하라!’라는 기자회견문을 낭독하는 모습. ⓒ 다산인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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