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4.01 08:02최종 업데이트 21.04.01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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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 사단급 이상의 군부대는 장병 복지시설을 여럿 갖추고 있다. 목욕탕, 이발소, 헬스장 정도는 기본이고 드물게 수영장이 있는 곳도 있다. 부대 근처를 벗어나기 어려운 간부들과 영내 생활을 하는 병사들이 휴식하고, 여가를 잘 쓰도록 군부대 복지시설을 늘리는 일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데 이 시설들은 계급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자격이 나뉜다. 목욕탕은 간부 목욕탕과 병사 목욕탕이 나뉘어 있고, 아예 병사 목욕탕이 없는 부대들도 있다. 일선 부대에 가보면 간부 목욕탕 안에서도 계급 고하에 따라 라커룸의 위치와 사용 가능한 위생용품이 나뉘어 있는 진풍경을 목도할 수 있다. 이발소, 체력단련장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복지시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식당도 계급에 따라 나뉘어 있는 부대들이 있다. 간부 식당, 병사 식당이 따로 있는 것은 기본이고, 부대 규모에 따라 장교 식당, 부사관 식당, 병사 식당으로 나뉘기도 한다.

간부 식당 안에서도 지휘관·참모가 앉는 자리는 별도로 구분해 두고 몇 가지 찬을 더 내놓기도 한다. 계룡대처럼 장군이 많은 곳에는 아예 장군만 쓰는 식당이 따로 있다. 식당을 신분별로 갖추기 어려운 부대에서는 병사 식당 테이블 한편에 간부 지정석을 따로 마련해두고, 지휘관·참모가 앉는 자리에는 물컵·수저받침·수저를 미리 세팅해놓는 식으로 구색을 맞춘다.
 
식당이 많아지고, 시설이 많아지면 관리하는 인력과 운영비도 함께 늘어나게 된다. 취사병들은 부대마다 편성 인원이 한정되어 있는데 이 식당, 저 식당에 찢어져 조리를 하는 통에 늘 인력이 모자라고 새벽부터 밤까지 격무에 시달린다며 아우성이다.
 
계급과 신분 제도 혼동

그럼에도 혹자는 계급별로 시설을 따로 쓰는 데 다 이유와 필요가 있다고 한다. 간부들이 병사와 시설을 같이 쓰면 병사들이 불편해하기 때문에 구분해놓는 것이 좋다고 한다. 간부들이 밥을 먹거나 여가를 보내는 시간에도 중요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한데 병사들과 한 공간을 쓰면 여의치 않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군은 전쟁을 대비하는 조직이다. 다 이유가 있고 필요가 있어 하는 일이라면 전쟁이 나도 식당과 막사를 계급별로 나누어 쓰고 간부 밥상에만 수저받침과 물컵을 세팅할 참인가.
 
군 인사법 상 계급의 범주는 장교·준사관·부사관·병으로 나뉘고 장교는 다시 장성(장군)·영관·위관으로 나뉜다. 군에만 있는 특이한 시스템은 아니다. 다른 공무원 직렬에도 계급제가 운영되는 곳이 있고, 꼭 공무원이 아니더라도 사회 전반에서 직급제가 통용된다.

그렇다고 계급이나 직급이 그 사람의 권리를 구분 짓는 것은 아니다. 계급은 조직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책임·권한·임무에 따라 급을 나누어 둔 것일 뿐 신분 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헌법은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대전제 하에 사회적 특수계급, 즉 신분제도를 부정한다.
 
그런데 군은 계급과 신분 제도를 혼동하는 것 같다. 지휘명령 체계에 따른 명령-복종 관계를 일상으로 확대해 해석한다. 계급에 따라 누릴 수 있는 권리와 혜택이 달라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아직도 군 조직의 저변에 깊숙이 뿌리박고 있다.
 

육군훈련소에서 머리를 깎는 훈련병. ⓒ 육군훈련소


두발 규정 고치겠다는 군
 
불필요한 차이는 차별이다. 그것이 권리의 제한으로 이어질 때 더욱 그렇다. 최근 육·해·공군이 병사 두발 규정 개정을 검토 중이라 한다. 간부와 병사 간에 다르게 적용되던 두발 규정을 통일하겠다는 것이다.

현행 규정 상 간부는 간부표준형(2:8 가르마)과 스포츠형 머리를 선택할 수 있는 반면, 병사들은 스포츠형으로만 머리를 깎아야 한다. 군인권센터는 지난 2020년 9월 국가인권위원회에 병사와 간부 간에 두발 규정을 다르게 적용하는 것은 차별이란 취지로 진정을 제기했다. 군인의 임무수행, 훈련, 집단생활의 특성을 고려할 때 단정한 두발 규정을 두는 것은 불가피하나, 계급에 따라 두발 형태에 차이를 두는 것은 차별이란 것이다.
 
병사의 두발과 관련한 상담을 받다 보면 병사들도 두발 자유화를 원하거나 파마, 염색을 하고 싶어서 두발에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똑같은 환경에서 군 복무 중인데 왜 간부와 다른 기준을 적용받아야 하느냐는 불만이다. 행색에 대한 불필요한 차이를 법규화 하는 것은 전근대 계급 사회의 전형이다. 조선시대만 해도 신분 별로 쓸 수 있는 갓의 형태와 크기가 달랐다. 천민은 아예 갓을 쓰지 못했다. '병사는 노예 취급'이란 말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간 이러한 문제제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17년에도 비슷한 취지의 진정이 제기된 바 있었다. 그 당시 인권위는 병사와 간부를 동일 비교집단으로 분류하기 어렵다는 점, 간부와 병사의 임무 수행과 역할에 차이가 있다는 점을 근거로 두발 규정을 다르게 적용하는 것이 차별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해가 잘 가지 않는 내용이지만, 지속적인 문제제기 속에 4년이 지난 지금 군이 오히려 전향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 고무적이다.
 
우리 군이 많이 바뀌고 있다. 송영무 전 국방부 장관은 2018년, 국방부 청사 10층의 고급 간부식당을 폐쇄했다. 장관도 병사들과 같이 구내식당에서 식판을 들고 밥을 먹는다. 고급 간부식당에서 일하던 병사들은 일반 부대 식당으로 돌려보냈다. 밥 같이 먹고, 똑같은 머리를 하고, 목욕을 한 탕에서 한다고 병사들이 간부를 깔보고 항명하지 않는다. 싸우면 이기는 군대, 단결하고 충성하는 군대는 부자연스러운 신분제도와 불필요한 권위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 군이 더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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