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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전쟁 한복판에서 도서관을 운영했던 여자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 독립운동가 김영숙 ①

등록 2021.04.16 19:47수정 2021.04.16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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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숙(金英淑). 함경북도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그녀가 언제 태어났는지, 어디에서 자랐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망명한 연인을 따라 중국으로 향한 그녀는 중국 혁명 과정에 참여했다. 해방 무렵 그녀와 결혼한 연안파 거두 무정(武亭)도 함경북도 출신이다.

김영숙의 남편 무정은 1904년 함경북도 경성군 용성면 근동리에서 태어났다. 나남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무정은 1920년 경성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1922년 3월 중앙고보를 그만둔 무정은 청년단체에 몸담고 사회주의 활동을 시작했다.


무정이 '신포수'라 불린 이유
 

무정 청년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무정은 세 차례 투옥 당했다. 중국으로 건너간 무정은 1926년 국민당 군대 소속으로 난커우(南口) 전투에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군벌 다툼에 실망한 무정은 본격적으로 공산당 활동을 시작했다. ⓒ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1923년 10월 중국으로 건너간 무정은 1924년 바오딩(保定)군관학교 포병과를 졸업했다. 이 과정에서 무정은 중국공산당에 입당한다. 1930년 7월 후난성(湖南省) 둥딩호(洞定湖)에서 홍군(紅軍)과 미국.영국.일본 연합함대 사이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무정은 정확한 포격으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중국 혁명에 투신한 무정은 2만 5천 리(1만 km)에 걸친 '대장정'에 참여했다. 10만 명으로 출발한 홍군이 옌안(延安)에 도착했을 때 남은 병력은 8천 명에 불과했다. 무정은 양림(楊林)과 함께 단 둘뿐인 조선인 생존자였다.

당시 홍군에서 대포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은 무정과 펑더화이(彭德懷)밖에 없었다. 어찌나 포를 잘 쏘는지 무정은 '신포수'(神砲手)라고 불렸다. 무정의 귀신같은 포술을 활용하기 위해 독일과 격전 중이던 스탈린은 그를 초청하기도 했다. 포뿐 아니라 총도 잘 다뤄 사격을 하면 백발백중이었다. 타고난 '무인'(武人)이었다.

"포병 없이 승리 없다"라고 생각한 마오쩌둥(毛澤東)은 무정에게 포병단 창설을 지시했다. 무정은 팔로군 사령부의 초대 작전과장과 초대 포병단장(여단장급)을 지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출범한 중국인민해방군 포병 지휘관 대부분은 무정에게 포술을 배웠다.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무정은 중국공산당 지도부와 각별한 관계였다. 팔로군 총사령관 주더(朱德)와 부사령관 펑더화이, 항일군정대학 정치위원 뤄루이칭(罗瑞卿)과 특히 친했다. 1938년 무정은 홍군 포병단 지도원 텅치(腾绮)와 결혼했다. 텅치를 무정에게 소개한 사람은 팔로군 부사령관 펑더화이다. 무정은 텅치 사이에서 딸과 아들을 낳았다.


항일 전쟁 과정에서 무정은 조선인 투쟁조직 결성에 나섰다. 1942년 7월 무정은 조선의용군 총사령관을 맡았다. 무정은 명성이나 전투 경력 면에서 김일성보다 앞서면 앞섰지, 뒤지는 인물이 아니다. 풍부한 야전 경험에, 혁혁한 전과, 뛰어난 포술까지... 해방 정국에서 무정은 김일성과 함께 '장군'이라 불린 흔치 않은 인물이다.

김영숙의 또 다른 이름, 난영
 

홍군의 대장정 장정(長征)은 중국공산당 홍군(紅軍)이 국민당 군대의 포위망을 뚫고 370일에 걸쳐, 12,500km의 거리를 이동해서 옌안으로 탈출한 사건이다. 대서천(大西遷) 또는 대장정(大長征)이라고도 한다. 11개 성과 18개 산맥, 24개 강을 가로지른 장정의 생존자는 그 자체로 신화가 될 수밖에 없었다. ⓒ Wikimedia

 
화려한 경력을 지닌 무정이지만 그는 '연안파'의 구심점이 되지 못했다. 조선독립동맹 시절 무정은 ML파 핵심인물인 최창익과 대립했고, 만주에서 넘어온 박일우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해방 후 북한 입국을 앞둔 시점에서 무정은 선양(瀋陽)에서 실수를 저질렀다. 국민당 군대가 진격해오자 무정은 측근만 거느린 채 트럭으로 선양을 빠져나왔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용군 동료로부터 신뢰를 잃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옌안에서 활동한 조선독립동맹(연안파)은 그 자체로 항일을 위한 통일전선 조직에 가까웠다. 그러다 보니 연안파로 분류되는 김창만 같은 사람은 해방 후 김일성과 함께 정치 노선을 함께 하기도 했다. 명성과 높은 지식 수준, 무력까지 갖춘 연안파는 해방 정국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 세력 중 하나였지만, 김일성이 이끈 만주파에 비해 결집력이 약했다.

한편 김영숙은 중국에서 '난영'(蘭英)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중국에서 활동한 조선인 혁명가는 일제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중국 이름을 사용했다. 중국 정부가 그렇게 종용하기도 했다. '난영'이라는 이름도 이런 상황에서 지은 이름일 것이다.

해외에서 활약한 다른 혁명가도 마찬가지였다. 윤세주는 석정, 최창익은 이건우, 한빈은 왕지연, 허정숙은 정은주, 박차정은 임철애, 김홍일은 왕웅, 조봉암은 박철환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무정 역시 마찬가지다. 무정 또는 김무정이라 불린 그의 본명은 김병희(金炳禧)다.

함경북도 출신 김영숙이 어느 학교를 다녔는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일본말을 상당히 잘 했다. 충칭(重慶)에 머물 땐 일본어 방송 아나운서로 활약했다. 중국에서 오래 활동했기 때문에 조선어, 일본어 외에 중국어에도 능통했을 것이다.

'대장정'을 통해 옌안(延安)에 도착한 홍군은 1936년 6월 1일, 이전부터 있던 홍군대학을 '중국인민항일홍군대학'으로 확대해서 개편했다. 교장은 린뱌오(林彪), 정치위원은 마오쩌둥, 교육장은 뤄루이칭이 맡았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周恩來), 예젠잉(葉劍英), 장원텐(張聞天)이 직접 교수로 나섰다. 중국공산당이 얼마나 이 대학에 관심을 쏟았는지 알 수 있다.

옌안에서 싸운 조선 여성들
 

1930년 체포된 허정숙 1902년 7월 16일 허헌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본명은 허정자(許政子)다. 허정숙은 옌안에서 싸운 여성 독립운동가 중 해방 이후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다. 북조선 정권 수립에 참여한 그녀는 문화선전상, 사법상, 최고재판소장,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을 차례로 거쳤다. ⓒ 국사편찬위원회

 
옌안시 얼따오지에(二道街)에 위치한 이 대학은 1936년 7월 '중국인민항일군정대학'으로 이름을 바꿨다. 김영숙은 이 학교에 연안파의 주축으로 활약한 윤공흠(尹公欽), 서휘(徐輝), 이상조(李相朝)와 함께 5기로 입학했다.

윤공흠은 1956년 이른바 '8월 종파사건' 때 김일성 비판에 앞장섰다. 8월 종파사건을 계기로 김일성은 연안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8월 종파사건은 북한이 인정하는 유일한 '반김일성 운동'이다.

텅치와 이혼하고(이 이야기는 2부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해방 직전 김영숙과 결혼한 무정은 항일군정대학 고급간부과 1기로 졸업했다. 김영숙과 무정이 졸업한 이 학교는 '동북군정대학'을 거쳐 1949년 '중국인민해방군 국방대학'으로 바뀌었다.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도 항일군정대학에서, 수학과 물리학, 일본어와 조선어를 가르쳤다. 항일군정대학 입학 전에 김영숙은 중국공산당에 입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1941년 1월 10일 김영숙은 타이항산(太行山) 팔로군 근거지에서 창립한 '화북조선청년연합회' 위원으로 뽑혔다. 무정이 이끌던 이 조직에서 김영숙은 여성으로는 드물게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녀가 항일 투쟁의 조력자가 아닌 주역으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화북조선청년연합회'는 1942년 7월 '화북조선독립동맹'으로 바뀐다.

김영숙을 비롯하여 여러 조선인 여성이 옌안과 타이항산 일대에서 일제에 맞서 싸웠다. 김영숙, 허정숙(許貞淑), 문정원(文贞元), 장명숙(張明淑), 조명숙(趙明淑), 이화림(李華林), 유순희(劉順姬), 조연이(趙連伊), 오환덕(吳煥德), 김마리(金馬利), 장수연(張守連), 김해엽(金海烨)은 남성도 버티기 힘든 전장에서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일원으로 당당히 활약했다.

무정이 임시정부와 손잡지 않은 이유 
 

조선건국동맹 터 여운형은 1944년 8월 10일 경운정 삼광한의원 현우현 집에서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했다. 불문(不問)·불어(不語)·불명(不明)을 철칙으로 한 비밀결사였다. 조선건국동맹은 일제를 몰아내고 조선의 자유와 독립 회복을 목표로 삼았다. 해방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의 모태가 되었다. ⓒ 백창민

 
1942년 5월 타이항산에서 벌어진 '반소탕전'에서 윤세주가 중상을 입을 때 김영숙은 일행으로 함께 했다. '반소탕전'은 1941년 12월 벌어진 '후자좡(胡家庄) 전투'와 함께 항일 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양대 전투로 꼽힌다. 조선독립동맹이 출범한 해에 벌어진 '반소탕전'은 조선독립동맹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1942년을 기억하라"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조선의용대 출범 때 중요한 역할을 한 윤세주는 1942년 반소탕전 때 좡즈링(庄子岭)에서 진광화(본명 김창화)와 함께 목숨을 잃었다. 팔로군 사령부 총참모장 줘취안(左權) 역시 이 전투에서 사망했다.

중국에서 일제에 맞서 싸우면서 무정은 조선에 있는 여운형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무정은 중국 옌안 일대 조선독립동맹 동향을 여운형에게 전하며 긴밀히 협의했다. 1944년 8월 10일 여운형은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했다. 우연일 수 있으나 조선독립동맹과 조선건국동맹은 이름이 비슷하다. 

옌안에서 싸운 무정은 같은 중국에서 활동한 임시정부와 왜 손을 잡지 않았을까? 해방 후 무정이 <조선인민보>와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질문 : 임시정부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나.
답변(무정) : 그 명사(名詞)를 보면 정부이나 본질은 정부가 못 된다. 정확히 규정하면 임시정부라는 것은 하나의 고유명사밖에 안 되는 망명 정객에 의한 집단이다. (중략) 본질적으로 내용을 갖지 못하였으니 정부도 될 수 없고 정부라고 자청하니 단체로 보기도 어렵다. 결국 죽도 밥도 아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앞에 말한 바와 같이 개인의 망명가 집단인 것이다."


1943년 6월 일본군은 타이항산 주변에서 대대적인 군사 작전을 시작했다. 조선의용군과 홍군은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이 과정에서 중국공산당은 조선의용군을 옌안으로 이동시켰다. 조선의용군은 대일 항전 과정에서 중국 인민과 함께 '국제 연대'로 싸운 소중한 존재였다. 그런 조선의용군을 보호하고 훗날 한반도 혁명을 위해 조선의용군을 옌안으로 이동시킨 것으로 보인다.

조국 해방의 무기 '도서관'
 

조선의용대 창립 기념사진 조선의용대 창립대회가 열렸던 대공중학교. 이 자리에 지금은 후베이성 총공회 건물이 있다. 주소는 후베이성 우한시 우창구 자양로 234호다. 1938년 창립대회장에서 김원봉은 이렇게 외쳤다. "우리들의 역량이 적다고 깔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조선의 3천만 민중은 모두 우리의 역량입니다." ⓒ 위키백과

 
조선의용군 상당수가 비교적 안전한 옌안으로 이동한 후에도 무정과 김영숙은 타이항산 최전선에서 싸웠다. 1944년 2월 무정은 '적구공작반'을 구성해서 일본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공작을 수행했다. 적구공작반은 적의 구역[敵區], 즉 일본 점령지에서 선전과 공작 활동을 하는 조직이다. 적구공작반에는 조직부와 선전부, 경리부를 두었다.

조직부에는 조직과와 적구과, 통신연락과가 있었는데, 조직과장을 맡은 사람이 바로 김영숙이다. 적구공작반에서 김영숙은 핵심적인 역할을 맡아 활동했다. 김영숙이 무정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1945년 8월 15일, 항일군정학교에 신화사 전문을 가져와 일본의 항복 소식을 알린 것도 김영숙이다.

옌안에서 활동하던 조선독립동맹에는 최창익-허정숙, 한빈-문정원, 박효삼-장수연처럼 함께 활동하는 부부가 많았다. 적구공작반 활동 과정에서 무정과 김영숙도 가까워진 것으로 보인다. 무정은 <중국인민해방군가>와 <조선인민군가>를 작곡한 정율성과 여성 혁명가 딩쉐송(丁雪松)이 결혼할 수 있도록 주선하기도 했다.

이 시기 김영숙 행적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조선혁명군정학교와 조선독립동맹 도서관을 운영한 점이다. 1924년 6월 중국국민당 지도자 쑨원(孫文)이 세운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도 도서관을 따로 두었고, 홍군이 대장정을 마치고 도착한 옌안에도 루쉰(魯迅)도서관이 있었다. 조선독립동맹이 운영한 조선혁명군정학교에도 도서관이 있었던 모양이다. 학교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동과 전투가 이어진 항일 전쟁 과정에서 '도서관'을 운영했다는 것이 눈에 띈다. 

그 시절 조선독립동맹과 김영숙은 '도서관'을 어떻게 운영했을까? '학습'은 사업, 노동, 생활과 함께 조선의용군의 중요 일상이었다. 옌안을 방문했던 김태준에 의하면 조선의용군은 전투가 없을 때 하루에 2~3시간씩 책을 읽고 학습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소비에트 공산당사>, <레닌주의의 기초>, <정풍문헌> 같은 책을 읽었다고 알려져 있다. 전장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개인이 책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을 고려할 때 '도서관'은 조선의용군의 학습과 독서에 큰 도움을 주지 않았을까.

조선혁명군정학교 건물은 이제 유치원으로 쓰이고 있다.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라는 설명이 지금도 남아 있다. 남아 있는 단층 건물 규모로 볼 때 도서관은 크지 않았을 것이다. 규모와 상관없이 도서관은 학생 출신이 다수였던 조선의용군에게 샘물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1945년 5월 무렵 이 학교에 적을 둔 학생은 293명이었다.

중국에서 항일 무장투쟁에 참여했던 이들에게 '도서관'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들에게 '도서관'은 단순히 책을 빌려볼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조국 해방과 조선 혁명의 '무기'였을 것이다. 조선혁명군정학교와 도서관을 관리한 김영숙은 '진중문고'(陣中文庫)의 도서관장이었다.

- 2편 김일성에게 숙청당한 남편, 아내는 왜 역사학자가 되었을까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①편입니다.
#김영숙 #무정 #난영 #도서관 #조선의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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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에 이어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을 쓰고 있습니다. bookhunter7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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