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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의 죽기 전 탄식 "누가 속였나, 나인가 일본인가"

[혐한의 세계 19] 일본 내 친일파에 대한 평가는... 일진회 회장 이용구의 삶

등록 2021.04.05 16:02수정 2021.04.06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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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한의 반대 입장에 서있는 것이 친한이라면, 혐한파들은 '친일'에 대해서는 어떠한 입장에 서 있을까? 혐한론자들은 통상 친일파를 환영하는 입장이지만, 일본에서 실제 현실로 그렇게 나타나는 경우는 드물고, 내용도 복잡하다.

한일병합을 계기로 당시 정부가 친일파에게 관료직과 은사금을 주면서 신뢰감을 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조선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을 때, 친일파는 조국을 배반한 자들이라는 공통된 인식이 사람들 사이에 있었다. 일본에 유리하게 힘을 보탰던 존재라는 생각은 잠시였고, 자기 조국을 불리하게 만든 이를 어떻게 존경하고, 얼마큼 신용이 가능한가라는 의문이 뒤따랐다.

친일파 일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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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구(李容九, 1868년~1912년)는 대한제국 말기에 일진회 회장을 지내며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찬성 여론을 이끈, 대표적 친일파로 알려져있다. ⓒ Wiki commons

 
일진회는 이에 앞장섰던 단체이다. 일진회 회장 이용구를 통해 조선과 일본이 얼마큼의 거리에서 서로 오해하면서 바라보고 있었던가에 대해 살펴보면서, 이들이 오늘날의 한일관계에 주는 의미를 새겨보려고 본다.

이용구는 동학농민전쟁에서 항일의병으로 참가하다 투옥된 적도 있지만, 러일전쟁에서 일본군에 협력하고, 일진회를 통해 적극적으로 한일병합을 지지하게 된다. 그는 조선과 일본이 대등한 상태로 합방하는 것을 꿈꾸고 있었다. 제1차 대전에서 패배함으로써 해체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같은 형태의 입헌군주국을 모델로 생각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867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전쟁 후 맺은 조약으로 형성된 대등한 연합국가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 주도하는 복잡한 다민족국가였다.

이용구는 일본이 주도하지만 평등한 연합국가를 기대하면서 일본에 협력했지만, 결과는 일본에 의한 일방적 조선 지배를 뜻하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만다. 그는 말년 일본에서 투병생활을 하는데, 병상에서 저승에 가면 자기가 탄압한 수많은 항일 의병들을 볼 면목이 없다고 탄식했다고 한다.

실제로 일진회가 내걸고 있었던 것은 합방이었지 병합은 아니었다. 합방(合邦)과 병합(併合)이란 두 한자에는 한글자의 차이만 있지만, 그 의미는 다르다. 합방은 두 나라가 하나로 대등하게 합친다는 뜻에 가깝다면, 병합은 무력으로 다른 한 나라를 주권을 빼앗는 행위가 된다. 일진회에서는 합방을 기대했지만, 결과는 병합에 의한 조선 식민지였던 것이다. 일진회는 일본이 이미 노골적인 침략정책으로 전환을 했는데도 이를 도운 매국단체이다.


일진회는 일본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고문을 두고 방침을 따랐다는 점에서 자생적인 친일단체로는 한계가 있다. 일본 역사학계에서 이용구의 친일협력에 대한 평가는 소극적인 것과 적극적인 것으로 나뉜다.

이용구를 소극적으로 평가하는 이유는 일진회와 같은 친일단체가 어떻게 행동하든지 일본정부는 이미 조선을 식민지로 하겠다는 방침을 굳혔으며, 실행에 옮기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단 일진회의 한일합방운동의 전개로 인해, 일본과 조선인 항일투쟁가와의 직접적인 무력충돌을 줄일 수 있었다는 점은 일본 측도 인정하고 있다.

그가 일본에서 임종 시 병원을 찾아온 일본 우익운동가 우치다 료헤이(内田良平)에게 건넨 물음에서 그의 속내가 나타나고 있다. 그는 우치다에게 "내가 속은 것이냐 아니면 네가 나를 속인 것이냐"라고 물었다고 알려져있다.

친일파가 죽을 때 한 후회

이용구가 생을 마감할 때 그에게는 세 살이 되는 아들이 있었다. 다이또우 구니오(大東国男, 한국명 이석규)라는 이름을 지었는데, 이름에 아버지의 염원을 넣고자 했다. 즉, 대동에는 조선과 일본이 연합하여 이룬다는 나라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이석규는 일본에서 양부모를 통해 성장하였고, 후에 '이용구의 생애'라는 저서를 통해 친부의 삶을 추적하고 있는 가운데, 일본인이 바라보는 친일파에 대한 시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이 이용구의 친자라는 사실이 역사학계에 알려졌고, 그는 초대받은 좌담회에서 친부에 대한 평가를 듣고 실망했다고 한다.

1960년대 일본 역사학계 중진으로부터 '일진회 회장 이용구는 일본제국주의 주구가 되어, 조선민중을 불행하게 했다'는 냉정한 평가에 아들 이석규는 충격을 받는다. 이석규는 친부 이용구에 대한 한국의 평가는 비록 '매국노'였지만, 해방 뒤 일본에서의 평가도 낮았던 것에 대한 불만을 '이용구의 생애'라는 책을 통해 알리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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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東?男, 李容九の生涯、1961년. 이석규는 일본에서 양부모를 통해 성장하였고, 후에 ‘이용구의 생애’라는 저서를 통해 친부의 삶을 추적했다. 이 책에서 그는 친부 이용구는 일본을 신뢰하여 협력하였는데, 일본에 철저하게 배신당해 비분과 실의 속에 삶을 마감했다고 변호하고 있다. ⓒ 이석규

 
이 책에서 그는 친부 이용구는 일본을 신뢰하여 협력하였고, 동양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는데, 일본에 철저하게 배신당해 비분과 실의 속에 삶을 마감했다고 변호하고 있다.

당시 일본은 이용구가 구상했던 대등한 '연방'이라는 목표를 먹잇감으로 한일합방 내지는 한일병합으로 유도하고, 이를 조선식민지로 둔갑시켜 버렸다는 것이다. 일진회는 병합 후에 해체수순을 밟게 되는데, 이용구는 이를 토사구팽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당시 일진회에는 많은 군과 경찰간부들이 회원으로 있었는데, 이들이 조선 식민지화에 반대하는 전국 애국지사들을 탄압하는 데에 앞장섰다.

조선 식민지가 없었더라면 한반도 분단도 한국전쟁도 없는 일이 되지는 않았을까. 일진회에 의해 희생당한 한국의 항일호국영령들께서, 왜 아직까지 남북이 서로 가깝게 지내지 못하는 것을 주변국의 탓으로만 돌리면서 주춤하고 있냐고, 호령하고 있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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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한 #지한 #한일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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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외형적인 성장과 함께 그 내면에 자리잡은 성숙도를 여러가지 측면에서 고민하면서 관찰하고 있는 일본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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