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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사랑을 구속으로 받아들인 아들의 말로

어머니의 정원에서, 어머니가 주신 사랑을 생각하다

등록 2021.04.11 18:36수정 2021.04.11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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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순 어머니께서 갑작스레 병을 얻으셨습니다. 남은 가족이라 해봐야 천지 간에 당신과 나, 둘 뿐입니다. 병중의 어머니를 홀로 둘 수는 없어 제가 모시거나, 혹은 어머니가 절 데리고 살거나 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우린 실로 30여 년 만에 다시 한 지붕 아래 살게 됐습니다. 어머니와 곧 이순을 앞둔 아들이 삐걱대며 사는 이야기를 통해 세대 간 소통과 화합의 길을 모색해보고자 합니다.[편집자말]
추위가 물러갈 즈음부터 그 곳은 조용히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초록의 이파리 사이로 여린 꽃망울의 무리가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도합 다섯 덩어리에 수십 송이나 됐다. 며칠 상간으로 그 옆의 여린 가지에도 꽃망울이 맺혔다. 다섯 형제가 옹기종기 모였다. 자주색 자태를 뽐내는 들꽃 무더기는 이미 만개했다. 우리 집에도 바야흐로 봄이 오고 있었다.


그곳은 어머니께서 스스로 일구고 가꾸는 당신만의 정원이다. 비록 아파트 베란다에 화분 몇 개 놓은 것에 불과하지만 어머니는 그곳에서 정성을 다해 식물을 돋우고 키운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식물들의 모습을 보며 아직 당신이 이 세상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남았음을 깨닫고 그 일의 보람을 만끽하신다. 생동감 넘치는 삶의 현장이 아닐 수 없다.
 

화려한 군자란의 자태 20년이 훨씬 넘은 화분 속의 군자란. 매년 화려한 꽃망울로 어머니의 정성에 화답한다. ⓒ 이상구

 
어머니는 정성스레 분을 갈아주고 거름을 뿌렸으며, 물을 챙겨주셨다. 그 주기는 틀림이 없었다. 병원에 입원해 계셨을 때에도 그맘때쯤이면 어김없이 나에게 물을 주어라, 화분을 오른쪽으로 돌려놓아라, 영양제를 꽂으라 지시하셨다. 퇴원 후에도 어머니의 명이 있으면 나는 곧바로 출동하곤 했다. 그 일은 이 집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밥값 중 하나이기도 했다.

어머니를 도와 화분을 만지면서 나는 걱정이 앞섰다. 생명 다루는 것엔 영 젬병이어서다. 그 생명력 강하다는 선인장류조차 내 손을 타면 오래가지 못했다. 제때 물주고 햇볕도 자주 쐐 주고, 그렇게 한다고 하는데도 식물들은 어느새 노랗게 시들어버리곤 했다. 저주받은 손이었다. 그러니 지금까지 강아지나 고양이 같은 동물들은 아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달랐다. 당신은 타고난 가드너다. 풀 섶에서 주워온 이름 없는 들꽃조차 어머니 손길을 거치면 화려하게 되살아나곤 했다. 가히 마법의 손이었다. 주위 분들도 놀라마지 않는 신비한 능력이다. 어머니의 자식이면서도, 당신을 가장 많이 닮았다는 장남인데도 나는 미처 그 DNA까지는 물려받지 못한 모양이었다. 대단히 유감스러운 대목이다.

엊그제 어머니께 물었다. 어쩌면 그렇게 식물을 잘 키우시냐고, 무슨 비결이라도 있느냐고. 어머니는 희미하게 웃으시며 그저 뭐가 필요 할 때마다 잊지 않고 때 맞춰해주고 마음 써 보살피면 된다고만 하셨다. 집에 들어와 함께 살면서 직접 관찰한 바도 그 말씀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과학의 힘을 빌리는 것도, 그렇다고 마법을 쓰시는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분명 그게 다는 아닐 것이다. 무릇 생명을 가꾸고 키우는 일엔 세심한 정성과 진정어린 사랑이 필요하다.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결연한 각오와 서두르지도 재촉하지도 않는 인내심,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희생정신도 있어야 한다. 그 모두가 필요조건이며 충분조건이다. 무엇 하나도 소홀해서는 안 된다. 그냥 대충이란 있을 수 없다.


정원에서의 어머니가 실은 그랬을 거다. 당신의 생명이 위태로운 순간에도 그들을 걱정하고 챙기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당신은 당신보다 더 그들을 사랑하신 거다. 그런 간절하고도 애틋한 심정은 대상에게 고스란히 전해지는 법이다. 어머니는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베푸신 것이며, 식물들은 아름다운 창조물로 그에 화답한 거였다.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
 

보라나비 꽃 어머니는 출처도 그 이름도 잘 모르겠다고 하셨다. 이 정원에서 가장 먼저 피는 꽃이다. ⓒ 이상구

 
예수님의 열혈 전도자 사도 바울은 로마의 시민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서 8장 39절)."

볼 품 없는 풀 한포기, 하찮은 벌레 한 마리에도 창조주의 고귀한 사랑이 담겨있음을, 그래서 아무도 그것을 함부로 해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신 걸 게다.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권리도 우리에게는 주어지지 않았을 터, 그러니 그걸 거두어 제 곁에 두고 키우고 가꾸려는 이는 창조주의 대리인으로서 무한한 책임을 다 해야 마땅하다.

한갓 미물도 그럴진대 사람이야 오죽할까. 사람의 생명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다. 아이를 낳아 키우는 부모의 마음가짐은 그것의 천 배, 만 배 이상이어야 한다. 아이들은 세상 무엇보다 존귀하게 보호받고, 융숭한 대접을 받아 마땅하다. 화산의 불길 속에서도 무너지는 건물 안에서도 제 몸으로 아이를 덮어 감싸는 게 부모의 도리다.

하지만 우리 주변엔 부모 같지 않은 부모들이 왜 이리 많은 건지 모르겠다. 끊이지 않는 아이들의 비극에 우리는 절망하고 분노한다. 방치와 학대, 심지어 그 여린 목숨을 해치기까지 하는 그들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런 부모들이 인간이기는 하는 걸까.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했거늘, 참으로 가슴 아프다. 

내 발로 걷어찬 복(福)

아, 하다 보니 얘기가 조금 멀리 왔다. 다시 어머니의 정원으로 돌아가자. 당신은 그 작은 정원에서 기도를 올리며 하루를 시작하신다. 그 장면을 얼마 전에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오전 햇살이 들이치는 베란다에 서서 두 손을 모으고 무언가를 간절히 비는 당신의 모습은 성스럽고 경건했다. 말하자면 거긴 어머니의 성소요, 제단이기도 한 셈이었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무엇을 저리 간절하게 기도하시는 걸까, 궁금해졌다. 그냥 못 본 척 넘어갔어야 했는데, 결국 참지 못하고 어머니께 묻고 말았다. 어머니는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시며 나를 쳐다 보셨다, 그리고는 이내 꽃들 예쁘게 잘 피게 해달라고 빌었다고만 하셨다.

물론 그건 그냥 하신 말씀이었을 터다. 그런 줄 알면서, 어머니께서 진실로 기원하신 게 뭔지 대충 알면서도 나는 또 실없이 한마디 한다.

"그런 정성으로 나를 키웠으면 나도 저렇게 활짝 피었겠네."

어머니는 참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시며 한숨 섞어 한 말씀하신다.

"내가 안 줬냐? 니가 안 받았지."

아, 그 말씀은 과연 옳다. 어머니는 나에게 그 이상의 관심을 갖고 사랑을 쏟으셨으며,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훈육하셨다. 하지만 나는 그걸 과도한 참견이고, 도를 넘은 간섭이며, 비인도적인 구속이라 여겼다. 결사적으로 거부하고 저항했다. 내 나이 50넘어서까지 그랬다. 나는 그렇게 제 복을 제 발로 걷어차며 살아왔다. 지금 이 거친 인생,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정원 #사랑과 구속 #군자란 #생명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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