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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메재단 후원하고 한국을 위해 기도하는 일본인"

[인터뷰] 동화작가 임정진이 본 '청계천의 성자' 노무라 모토유키

등록 2021.04.07 13:54수정 2021.04.08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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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작가 임정진 ⓒ 임정진

 
임정진은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85년 이화여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그다음 해인 1986년 마로니에 여성 백일장에 장원으로 입상하면서 글쓰기를 시작했다. 1988년 계몽아동문학상을 수상했고 그동안 쓴 책으로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있잖아요. 비밀이에요><나보다 작은 형> 등 130여권이 있다.
 
그는 지난 2007년 '청계천의 성자' 노무라 모토유키(1931- )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다. (관련기사 : '청계천의 성자' 노무라 모토유키가 한국 60번 방문한 사연)

당시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노무라 할아버지의 서울이야기'라는 사진전시회가 있었다. 그때 임정진은 <노무라 할아버지의 청계천 이야기>라는 도록을 보면서 노무라에 대해 접하게 되었다. 그는 노무라의 도록을 보면서 "이런 분은 한국 어린이 청소년들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노무라를 만나 인터뷰를 해서 청소년용 인물 이야기로 책을 쓰려고 마음먹고 이메일을 보냈다. 그가 노무라 자택을 방문해서 인터뷰를 하고 책을 쓰고 싶다고 했더니 노무라는 "집에 오는 것은 언제나 환영인데 나는 영웅이 아니므로 그런 책을 쓰는 것은 반대한다"고 했다.
 
그래서 임정진은 노무라에게 "영웅으로 쓰려는 게 아니다. 1970년대 청계천에서 봉사한 일을 소개하고 당시의 중요한 사진 자료를 한국에 기증한 일을 소개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랬더니 노무라는 "그런 거라면 인터뷰를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임정진은 지난 2007년 노무라를 만나러 일본을 방문했다. 그래서 필자는 지난 3월 31일부터 4월 6일까지 "동화작가 임정진이 본 '청계천의 성자' 노무라 모토유키"에 대해 인터뷰를 했고 그 내용을 정리하여 싣는다.

"식민지 시절 없었다면 한국은 분단되지 않았을 것"
 

지난 2007년 임정진 작가의 일본 방문시 노무라 목사 부부 마당에서 ⓒ 임정진

 
- 그동안 일본에 사는 노무라를 총 3번 방문했는데 3번씩이나 방문한 이유는? 당시 방문하고 나서 느낀 점은?
"첫 번째 방문은 지난 2007년 취재차 간 것이다. 그런데 인터뷰 후 나는 책 쓰기를 포기했다. 김○○ 이야기를 안 쓸 수도 없고 쓰면 김○○ 측에서 당장 명예훼손으로 나를 고소하거나 할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쓸 수 있는 건 아니고 큰 언론에서 다큐로 다루거나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책 쓰기는 포기하겠다고 노무라에게 말했다.

노무라는 상관없다고 하고 그 후로는 그냥 친구처럼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지난 2010년 제정구 의원 특별추모 행사에 초대되어 노무라가 한국에 오게 되어 그때 내가 모시고 다니다가 푸르메재단에도 모시고 갔다. 어린이전문재활치료기관을 민간에서 운영한다며 보여드렸다. 그때 재활 치료받는 어린이들을 보고는 우시면서 기부금을 내고 기회 닿을 때마다 물품이나 돈을 기부하셨다.
 
두 번째는 푸르메재단 분들과 <동아일보> 기자와 함께 노무라 인터뷰를 위해 지난 2013년 일본에 갔다. 그때 직접 가서 여러 자료들을 보시고 푸르메재단 백경학 이사가 2015년 아시아 필란트로피스트상을 받을 수 있게 노무라를 추천해주셨다.
 
세 번째는 내가 2017년도에 일본 그림책미술관 관광을 갔는데 한 미술관이 마침 노무라댁 근처였다. 그래서 저녁에 몇 친구들과 방문해 간단히 차를 마시고 인사만 드렸는데 다음날 내가 간 미술관까지 찾아오셔서 나와 친구들에게 사과파이를 하나씩 선물로 주시고 가셨다. 그때는 긴 시간을 같이 보내지 못했다.
 
그 외에도 2013년에 서울 명예시민이 되실 때도 노무라는 한국에 오시고 그 후 몇 차례 한국에 오실 때마다 뵙고 하루 정도는 관광안내도 하면서 여러 번 만나 뵈었다."

- 임 작가가 아는 노무라는 어떤 분인가?
"나는 뚜렷한 종교가 없이 절에는 템플스테이 하러 가고 친구가 목사 부인이라 교회도 행사가 있으면 간다. 어머니는 성당에 다니셔서 성당에서 큰 행사가 있으면 간다. 하지만 종교인에 대해 큰 존경심을 품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실망하는 일이 많았다. 목사들에 대해서는 반감이 많았는데 내가 장기려 박사 인물이야기를 책으로 쓴 적이 있는데 그분 신앙심이 참 좋아 보여서 '이런 분이 참 종교인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살았다.
 
생활 속에서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실천적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노무라는 일단 교회가 없이 가정예배를 보셨다. 나도 그 예배에 한 번 참석했는데 그때는 8분 정도 오셨는데 많이 오시면 15명 정도까지 오신다고 했다. 그 전날 혼자 에배순서지를 인쇄하고 예배를 보시고 예배가 끝나면 다과를 대접하셨다. 때로는 식사도 드린다고 했다. 그걸 나이 드신 사모님이 혼자 다 하시는 거였다.

교인들이 헌금을 약간 두고 가셨는데 그걸 다 모아서 한국 오실 때 푸르메재단에 보내거나 인도고아원에 보낸다고 하셨다. 자기 부부는 연금을 받기 때문에 그걸로 절약해서 살수 있다고 했다. 한국에 오실 때는 빈민운동 기록사진 찍는 사진작가에게 카메라를 주시고 가난한 사진작가에게 렌즈를 사다주시곤 했다.
 
노무라는 사람들이 버리는 옷을 주면 그걸 입는데 좋은 옷이 많다고 하셨다. 한번은 한국 올 때 점퍼를 입고 오셨는데 곰팡이가 핀 옷이어서 내가 제발 버리라고 하니 좋은 옷인데 왜 버리냐고 해서 그렇게 좋은 거면 날 달라고 '네가 갖고 싶으면 준다'고 하셔서 주시면 내가 내버리겠다고 한 적도 있었다.
 
집 앞에 여우가족에게 밥을 매일 주시는 일도 보통 정성이 아니었다. 동물도 본능적으로 위험한 사람이면 가까이 오지 않을 텐데 매일 와서 밥을 먹고 갔다. 누군가 뭘 부탁하면 노하는 적이 없는 분이다.
 
북한의 굶는 어린이를 늘 걱정하시고 한국이 분단된 건 일본 책임이라 하셨다. 식민지 시절이 없었다면 한국은 분단되지 않았을 거라 하셨다. 일본은 희망이 없다고도 자주 말씀하셔서 내가 민망했다. 전에 한국에 와서는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앞에서 플루트연주를 하신 적이 있는데 그때 많은 취재진이 와서 보도가 되었다. 그리고 일본에 가셔서 그 보도를 본 일본 우익단체들이 전화로 협박을 하고 홈피에 해킹을 하고 아주 큰 소란을 겪으셨다.
 
부인은 진짜 천사 같은 분이었다. 그 긴 세월 남편이 고생만 시켰을 텐데도 표정이 그리 온화할 수가 없다. 부인을 보면서 '저렇게 남편을 존경하며 평생을 살 수도 있구나'하고 생각했다. 또 아드님과 며느님도 따로 휴가를 얻어 한국에 올 때도 있는데 한국에 올 때마다 푸르메재단에 가서 기부금을 내고 장애아용 칫솔도 일부러 챙겨 와서 기증했다."

낮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끝없는 사랑과 기도
 

노무라 부부 ⓒ 노무라

 
- 지난 2007년 일본에 갔을 때 "노무라 댁에서 3박 4일을 묵으며 인생의 많은 것들을 배웠다"고 했는데 어떤 것을 배웠나?
"한국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일본이 어떤 피해를 끼쳤는지 이렇게 잘 알고 부끄러워하는 일본인도 있구나 하는 걸 알게 되었다. 노무라는 '사람 마음 바꾸는 거 금방 안 된다. 오래 걸린다. 그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1970년대 청계천 시절에는 한국인들이 제정구 의원 빼고는 늘 자기에게 돈을 달라고 했다고 했다. 한국에 오면 사람들이 모여서 밥 먹으면 항상 노무라가 돈 내는 걸로 알고 그냥 나갔다고 한다. 그런데 요즘 만나는 한국인들은 그런 분들이 아니어서 참 좋다고 하셨다.
 
사람이 평생 자기 믿는 바를 실천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생각 따로 말 따로 실천 따로 그리 되는 게 보통 인간인데 그런 면에서 늘 무언가 베풀려고 애쓰시고 봉사하는 게 나의 삶이다 믿으시며 그리 사시는 게 참 존경스러웠다. 나는 종교적으로 기독교를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아니지만 목사들에 대해서는 실망한 바가 많았는데 노무라 목사를 알게 되고부터 목사도 다 목사 나름이구나 생각했다. 나는 어떻게 이웃에게 베풀면서 살 수 있을까 그런 생각도 그 후로 자주 하게 되었다. 사소한 것들을 실천하게 된 것도 노무라 덕분이다."
 
- 과거 노무라가 살아온 삶의 행로를 아는 것이 왜 오늘을 사는 한국인, 특별히 젊은이들에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한일관계는 오랫동안 고통스러웠다. 많은 일본인들이 한국문화를 좋아하고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문화를 좋아하고 서로 학술적, 경제적으로 많은 교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혐오하는 일본인들도 많고 한국에서는 일본 기업불매운동이 일어나는 상황이다.

일본에 좋은 영향을 미친 한국인도 있었고 한국에 와서 좋은 영향을 미친 일본인도 있었다는 것을 양국의 젊은이들이 자세히 알고 앞으로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가, 언제까지 미워만 할 것인가,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또한 한국의 젊은이들도 해외 여러 나라에 봉사를 나가는데 어떤 마음가짐으로 나가야 할 것인지, 어떤 점을 주의할 것인지, 노무라를 통해 배울 점이 있을 것이다.
 
나는 신을 믿지는 않지만 하느님이 노무라께 맡긴 임무는 빈민구제가 아니라 기록사진 촬영이었나 생각한다. 빈민들과 노동자들을 만나며 그들의 환경과 생활을 열심히 찍고 정리해 둔 사진들이 지금 굉장히 중요한 기록이 되어 한국 근대사 전시전에는 노무라가 찍은 사진이 항상 몇 장씩 꼭 들어간다.

1970년대 고속도로 건설하고 공장 짓고 하는 사진은 많은데 빈민들의 생활, 청계천 옷 공장 여공들의 사진 그런 것은 아무도 안 찍었다. 본인들은 가난해서 카메라가 없었고 인화지가 비싸 기념일에 인물사진은 찍어도 풍경 사진을 찍을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그 구석구석을 노무라가 사진을 찍어 한국에 기증하게 되어 그 일로 서울시 명예시민증을 받으신 것이다. 본인은 의도치 않은 기여를 한 셈이다.
 
사람의 의지와 하늘의 뜻은 다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봉사하려는 의지가 강한 만큼 봉사의 방법과 시스템이 얼마나 중요한지 현지 사정에 잘 맞는지, 현지인과 소통이 되는지도 고려할 사항이다. 그 당시 노무라의 한국어가 조금만 더 능숙했으면 여러 상황이 달랐을 것이다. 아마 노무라가 돌아가시고 한 30년쯤 지나면 한국인은 노무라를 기록사진가로 기억할 수도 있다. 명확한 봉사의 흔적이 그것만 남기 때문이다."
 
- 지난 2009년 <착한 개 폴리와 노무라 할아버지>라는 동화를 썼고, 2013년에는 노무라의 시골집을 방문하고 '여우의 식탁이 있는 마당'이란 제목의 칼럼을 <한겨레>에 쓴 적이 있는데, 평소 글을 쓰면서 노무라로부터 받은 영감이나 교훈이 있다면?
"착한 개 폴리는 여러 면에서 노무라를 닮았다. 주인은 폴리를 모델 일이나 구조견훈련소 조교일 등 여러 가지로 활용해서 돈을 벌었다. 그리고 개가 늙게 되자 버렸다. 노무라는 시골 산속에서 버려진 개들을 돌보고 배고픈 여우들을 배불리 먹이면서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맘껏 돕지 못했던 한을 푸신다고 생각했다.
 
노무라가 사는 일본 산골동네에서 목사는 존경받는 직업이 아니다. 그냥 여우 밥 주는 노부부일 뿐이다. 연금을 아껴서 여우먹이를 사고 한국에 올 때면 제정구기념사업회나 푸르메재단에 후원금을 내시는 그분은 늘 한국을 위해 기도한다. 북한에 배고픈 어린이들이 많다고 걱정하신다. 그 한결같은 한국에 대한 짝사랑을 나는 잘 이해할 수 없다. 국적이 문제가 아니라 그냥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이 그리 깊고 질길 수 있다는 걸 본다. 사람을 사랑하는 이가 자연도 사랑하고 하느님도 사랑하는 것이라 믿는다.

내가 노무라에게 본 것은 낮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끝없는 사랑과 기도다. 예수는 높은 자리에 앉지 않고 늘 가난한 이들 편에 섰다고, 나는 하느님의 일을 하는 일꾼일 뿐이지 누군가에게 존경받는 사람이 아니라고, 교회는 크고 높은 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늘 말씀하시는 그런 노무라의 태도를 보고 기독교에 대해 좋은 느낌을 받게 되었다. 나는 종교를 갖지 않았지만, 어느 종교를 믿든 안 믿든, 노무라가 사람을 정성으로 대하는 그런 마음이 아름다워 보였고 나도 그렇게 살고 싶어졌다."
#노무라 모토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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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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