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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1년, 더이상 갈라치지 마라

[4.7 재보선 참패를 앞에 놓고] 오늘의 결과는 후퇴도, 비극도 아니다

등록 2021.04.08 13:53수정 2021.04.08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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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재보궐선거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참패로 끝난 가운데, 8일 오전 서울 종로구 통인동 한 신문가판대에 재보선 결과를 알리는 일간지들이 꽂혀 있다. 일간지들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민심은 매서웠다... '무능, 오만' 여당 참패'(경향신문), '부동산 분노, 정부-여당 심판했다'(동아일보), '41대0... 분노한 민심, 정권을 심판했다'(조선일보), '정권을 심판했다, 서울이 뒤집어졌다'(중앙일보), '여당 참패, 무섭게 돌아선 민심'(한겨레), '분노의 민심, 여 독주 뒤엎다'(한국일보) ⓒ 권우성

 
1945년 9월 6일 발표된 이른바 '인공', 조선인민공화국의 내각의 면면은 이러했다(그 실질적 의미는 차치하고 그 이름들만 음미해 보자). 주석 이승만, 부주석 여운형, 국무총리 허헌, 내무부장 김구, 외교부장 김규식, 재정부장 조만식, 군사부장 김원봉, 사법부장 김병로, 문교부장 김성수, 경제부장 하필원, 체신부장 신익희 등등. 위 이름만 놓고 보면 확실한 공산주의자였던 하필원부터 "공산당놈들은 애비도 몰라보는 놈들"이라며 이를 갈던 김구까지 그 스펙트럼이 드넓다.

해방 공간은 그렇게 풍성(?)했다. 공산주의자부터 극우에 가까운 민족주의자들이 양 극단에서 깃발을 흔드는 사이에는 매우 다양한 성향의 사람들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김원봉같은 이를 두고 민족주의자라 하랴 사회주의자라 하랴. 식민지 조선의 인권 변호사들로서 여러 번 머리를 맞댔을 허헌과 김병로를 또 어찌 구분하랴. 올곧은 민족주의자 조만식과 요즘은 친일파로 규정된 김성수의 간격은 또 얼마나 넓으랴.

그런데 해방되고 몇 년도 못 가서 저 이름들은 갈갈이 찢기고 갈라쳐지고 헤쳐 모이면서 남과 북의 양극단으로 쏠리고 만다. 마치 철가루 속에서 자석을 휘저었을 때 철가루들이 N극과 S극으로만 들러붙고 가운데는 텅 비어 버리는 모습처럼 말이다. 양극단을 택하지 않은 사람들은 외롭게 비극을 맞았다. 김구와 여운형은 총을 맞았고, 조만식은 생사를 모르게 됐으며, 김원봉은 한쪽을 택했으나 버림받고 슬프게 죽었다.

"너는 누구 편이냐"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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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대 서울특별시장에 당선된 오세훈 시장이 8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시청으로 첫 출근 후 인사말을 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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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 참석을 마친 뒤 박수를 받으며 퇴장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한국 현대사에 굵직한 이름을 남긴 이들이 이럴진대 장삼이사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해방 공간에 펼쳐진 소용돌이, 좌와 우, 그리고 남과 북,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의 격돌 속에 쓸려 나가고 갈려 나가고 찢겨 없어진 사람들은 부지기수였다. 그리고 그 죽음의 굿판에 던져진 질문은 대개 이것이었다. "너는 누구 편이냐."

어둡고 괴로웠던 깊은 밤이 가고 삼천리 이 강산에 먼동이 텄는데, 다같이 자리 차고 일어나서 자유의 종을 울려야 할 희망의 시간에, 흙 다시 만져 보고 바닷물도 춤을 추며 기뻐하면서 먼저 간 어른님벗님 추모도 하고, 이 나라를 길이길이 빛낼 채비를 해야 할 그 희망찬 나날에, 한국 사람들은 서로가 목숨 걸고 지킨다는 대의(大義)의 포로가 됐고 그를 완성시키기 위해 전면전을 불사했다. 그 전쟁 와중과 이후의 수십 년 동안 자신과 '다른' 모두에게 "너는 누구 편이냐"를 묻고 침묵시키고 가둬 버리거나 교수대에 목을 매달아버리기를 일삼아 했다.

그 와중에 정교함 같은 건 없었다. 여순 사건 이후 숙군 작업 때 좌익으로 몰려 총살당한 군인들 가운데에는 인민공화국 만세 아닌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다 죽은 이도 많았다. 빨갱이의 씨라면 어린아이도 총알과 몽둥이를 모면하지 못했고, "말 많으면 빨갱이"라는 으스스한 유령 같은 격언이 수십 년 한국을 배회했다. 그것은 일종의 강박이었다. "우리는 옳고 저들은 악마다. 저들을 격멸하지 않고는 우리는 결코 안심할 수 없다." 수십년 한국을 옥죄어 온 주문이자 다짐이며 신념이었다.

희망에 부풀게 했던 연설


4년 전 봄 대한민국은 희망에 찼었다. 어처구니없는 국정농단이 있었고, 수백만 한국인들이 촛불을 들었다. 마침내 대통령 박근혜는 국회의 탄핵과 헌재의 판결로 '파면'됐고 교도소로 주소 이전을 했다. 우여곡절은 적지 않았고 태극기 부대 같은 시대착오자들은 듬성듬성 있었으나,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이제는 칙칙하고 졸렬했던 과거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힐 희망에 부풀었다. 나도 그랬다. 이 연설을 들을 때는 특히 그랬다.
 
이제 우리 대한민국에서 분열과 갈등의 시대는 끝나야 한다고 저는 선언합니다. ... 이 땅에서 좌우를 나누고 보수-진보를 나누는 분열의 이분법은 이제 쓰레기통으로 보내야 합니다. 우리 마음과 머리에 남은 대립과 갈등, 분열의 찌꺼기까지 가차없이 버려야 합니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 중) 

적폐는 청산돼야 하고, 죄 지은 자는 처벌받아야 하고, 허물 있는 자는 책임을 져야 함은 지당한 일이다. 그러나 적폐와 허물과 죄는 엄격히 규정돼야 했다. 정치적 필요로, 내 생각과 다르고 내 뜻과 맞지 않는다고, 도매금으로 갈라치고 몰아부쳐서는 안됐다. 하지만 저런 명연설로 대통령 후보를 수락하고 선거에서 이긴 이가 국정의 수반이 된 바로 그 정권에서, 나는 그 이전을 능가하는 갈라치기를 여러 번 목격했다.

살아오면서 비슷한 생각을 하고 고만고만한 분노를 하며 그래도 이번 시위에서는 만날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던 친구들, 동료들, 선후배들이 이번 정권만큼 갈라진 적이 없고, 서로에게 험악한 적이 없었다. 내 의견을 밝혔을 때의 두려움에 입을 봉하는 경험도 한두 번이 아니었고 의견이 서로 다른 사람들은 손쉽게, 다양한 단어로 낙인찍혔다. 기레기, 친일파, X진보, X선비, 꼴통, 이적행위자 등이 난무했고 문빠, 대깨문, 달레반 등의 반격이 당연히 발생했다. 그리고 저 역사와 전통이 유구한 질문 "너는 누구 편이냐"가 때지난 벚꽃처럼 세상을 덮었다.

"분열의 이분법을 쓰레기통으로 보내자"는 연설의 감동이 채 식기도 전에 그 지지자들은 무슨 정의의 사도처럼 몰려다니며 대통령이 식판에 밥을 '퍼 먹었다'고 기사에 썼다고 언론사 게시판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중국 경호원에게 한국 기자들이 두들겨 맞은 상황에서 '기레기들이 맞을 짓 한 게 아닌가' 비웃는 내공을 보여준 것 역시 구우일모(九牛一毛)의 예일 뿐이었다.

자신들이 정의롭고 자신들이 지지하는 이를 보호하겠다는 열망은 나무랄 것이 없으나, 그 열정이 배타(排他)로 발현되고 신념이 독선으로 번질 때, 그 열정과 신념의 체현자들이 얼마나 위험해지는가를 해방 이후의 한국 현대사는 누누이 보여줬다. 그러나 대통령 자신 후보 수락 연설에서 쓰레기통으로 보내자고 외쳤던 그 '갈등'은 지난 4년 동안 더 자심해지고 극렬해졌으며, 되레 '우리 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을 저 멀리 떼어 놓았다.

이 정부에 쓴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예외없이 '맛이 갔다'는 낙인을 받아야 했다. 이 정권의 '주류'에 반하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극히 당연하게도 욕 먹은 사람들은 욕을 퍼붓는 데에도 익숙해졌으며, 두 집단은 서로 쳐다보지도 않게 됐다. 이른바 '조국 대전' 때 서먹해진 사람들의 수는 무릇 얼마이며, 한때 촛불 같이 들었던 사람들끼리 쌍욕 교환한 이들의 수는 또 얼마였던가.

고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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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김태년 당 대표 권한대행이 8일 오전 국회에서 당 사무실로 들어가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자신과 가치와 의견을 공유하는 이들의 단결력은 하늘을 찌르나 자신에 반하는 이들에 대한 적의는 땅을 뒤덮는 상황은, 이 정부를 고립시켰다. 그리고 심하게 말하면 함께 기울어 갔다. 자신들의 뜻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은 '기레기'들의 농간에 놀아날 뿐이었고, 철없는 20대는 역사적 경험치가 부족할 뿐이었다. 이른바 국정농단 세력, '이명박근혜' 시대를 망친 이들을 지지하는 이들은 개탄과 경멸의 대상일 뿐이었다.

이 배경에는 "우리가 옳다"는 철두철미한 믿음이 있었다. 우리는 이렇게 옳은데 왜 우리를 몰라 주느냐는 벌거숭이 임금님의 행진처럼 위풍당당한 믿음. 오늘 이후 수많은 핑계들이 쏟아져나올 것이다. 언론 탓이며, 검찰 개혁이 부진한 때문이며, 철없는 20대의 망동이며, '친일 적폐 세력'의 치밀한 계획 하에 일어난 일이고, 국민들이 역사적 기억을 상실한 건망증에 걸려 오늘의 이 결과가 나왔다고 비분강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젓는다. "글쎄요. 오늘의 결과를 가져온 건 님들입니다." 

"비겁한 자여 갈 테면 가라"라는 외침이 유효할 때는 대개 절망적인 싸움터에서다. 죽음을 각오한 전투를 앞두었으되 이길 가능성은 보이지 않을 때, 군중(軍中)이 흔들릴 때 내지를 수 있는 구호라는 뜻이다. 보다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 보다 많은 이를 유익하게 하고 보다 많은 이들의 갈등을 줄여야 할 정치판에서 대관절 이 정부는, 그리고 그 지지자들은 얼마나 많은 "갈테면 가라"를 부르짖었던가.

그러고도 자신들이 다수일 수 있다면,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다면, 그렇게 '필승의 신념'을 가졌다면, 그것이 더 이상하지 않은가. 전두환과 싸우던 1980년대도 아니고, 왜 이런 '투쟁의 신심'으로 정치를 하고 정치적 지지를 투여해 버렸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 없다. 알다가도 모르겠다. 

"비겁한 자여 갈 테면 가라"로는 되지 않는다

대저 옳음은, 정의는, 선언으로 선포되지만 성찰로 완성된다. 그러나 자신이 옳다는 믿음은 곧잘 자신의 믿음에 대한 성찰을 질식시킨다. 아울러 정의를 위협한다고 믿는 이들을 절대악으로 등극시키고, 그들에 대한 공허한 적대의식으로 자신의 생명력을 유지한다. 조선 후기의 얼치기 선비들이 되지도 않을 '북벌론'을 내세우며 제 배를 불리고 발밑을 다진 것처럼. 북한 공산 집단을 향해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찌르는" 적의를 발산했던 사람들처럼. "미제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 넘쳐났던 사람들처럼.

이번 선거 결과를 두고 '친일 적폐 세력의 승리'라고 분통을 터뜨리는 이들의 수가 제발 많지 않기를 바란다. 적기를 바란다. 그런 분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1년 뒤 오늘의 패자(敗子)들은 더 큰 패배를 맛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은 1년은 중요하다.

오늘의 결과는 후퇴도, 비극도 아니다. 그저 당연한 결과였을 따름이다. 1년 뒤에는 이런 결과가 당연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오늘의 결과에서 교훈을 찾지 않고 핑계가 무성하다면, 1년 뒤 우리는 더 암담하게 TV를 끄게 될 것이다. 더 이상 사람들을 떠나 보내지 말고, 갈라치지 말고, 모욕 주지 말고, '당신들만의 부흥회'에 열광하지 말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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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대 서울특별시장에 당선된 오세훈 시장이 8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참배를 마치고 방명록을 적고 있다. ⓒ 국회사진취재단

 
#재보선 #민주당 #참패 #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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