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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아닌 생존, '집 없음'을 택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리뷰] 영화 <노매드랜드>

21.04.13 16:42최종업데이트21.04.13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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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노매드랜드>는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제시카 브루더의 동명 논픽션을 영화로 옮긴 이 작품은 추억이 깃든 집을 떠나 차에서 생활하며 일자리를 찾아 헤매야 했던 사람들을 쫓는다. 영화에 등장하는 비전문 배우들은 실제 노매드이며, 주인공 펀(프란시스 맥도맨드)의 다층적 캐릭터는 이들의 사연을 엮어 만들어 낸 결과다.
 
미국 네바다 주 엠파이어에 살던 펀은 금융 위기로 지역 경제가 붕괴된 뒤 모든 것을 잃었다. 임시 교사로 일하던 그는 남편이 죽자 밴 하나를 사 미국 서부를 횡단하게 된다. 사실 자발적 유랑은 아니었다. 평생을 열심히 일만 했지만 2008년 금융위기는 그의 모든 것을 앗아갔고 은퇴 후 여유로운 노년을 즐기는 것은 꿈이 되어버렸다.

펀이 받는 낮은 임금으로는 높은 집세나 주택 융자금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인생 후반부에 찾아온 빈곤은 내 몸 하나 눕힐 공간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노매드는 자의든 타의든 기둥이 있는 붙박이 집 대신 움직일 수 있는 바퀴가 있는 집을 옮기며 미국 전역을 여행하는 사람이 되었다.
 
한때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던 사람들
  

영화 <노매드랜드> 스틸컷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충격적인 것은 그들이 국가에 세금을 내고, 성실히 일했던 중산층이었다는 것이다. 거리로 나온 이들은 아마존 물류 창고, 사탕수수 농장, 관광지의 버거 가게, 국립공원 캠핑 도우미 등 단기, 임시 일자리로 돈을 벌어 생활을 이어나갔다. 이들은 고된 육체노동으로 자신을 밀어붙이고 난 뒤 받은 임금을 배고픔과 연료를 채우는 데 사용한다.
 
그중에서도 벌이가 가장 좋은 일자리는 아마존 물류창고였다. 아마존은 연말 성수기 때면 노매드 노동자를 모집하는 캠퍼포스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노동자와 기업이 상생하는 일자리 같지만 아마존은 자선사업을 하는 게 아니다. 연로하고 값싼 노매드를 모아 하루 10시간 넘게 합법적으로 육체노동을 시킬 수 있고 세액공제까지 받을 수 있는 알짜배기 사업이 바로 노매드 고용이었다.
 
펀은 오래전부터 한곳에 얽매여있는 것보다 자유를 꿈꿨기에 이보다 더 좋은 삶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노매드로 사는 것은 기존의 방식을 버리고 길 위의 삶을 배워야 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자신이 버린 오물을 스스로 치워야 하며, 극심한 추위와 더위도 견뎌내야 함을 뜻했다. 무료로 주차구역을 확보하고 필요에 따라 불법 차박(차량노 숙) 시스템과 샤워할 수 있는 시설을 찾는 법도 익혀야 한다.
 
그는 남편이 곁에 없어 외로웠지만 다른 노매드를 만나 동질감을 느끼며 안정을 찾는다. 펀은 필요한 물건은 물물교환하고 정보를 나누고 각자의 생활방식을 유지하면 그만인 길 위 생활에 만족한다. 그는 없으면 없는 대로 살면서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게 즐거웠다. 그저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사는 소소한 행복 자체였다.
 
그러던 어느 날, 펀은 유랑자들 모임이 있다는 것을 듣고 공동체에 합류한다. 노매드와 노매드는 새로운 가족이 되어주며 인류 태초의 가치 공동체 의식을 선보이기도 했다. 스스로 미국 초기 개척자의 전통을 이어나가고 있다는 생각, 홈리스가 아닌 스스로 하우스리스라고 칭하는 자부심도 컸다. 그들과 함께하며 노년의 펀은 더욱 성장한다.

조건 없이 품어주는 자연의 경이로움
 

영화 <노매드랜드> 스틸컷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영화는 상처를 품은 사람들이 길 위에서 서로를 위로하고 보듬는 과정에 집중한다. 현대적 유목민을 자처하는 이들은 몸은 고되지만 슬프지 않다고 말한다. 비록 지금 헤어지지만 언젠가 또 만나게 될 것이라 믿어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디든 내 집이 되고 정원이 되며 볕, 공기, 해변, 나무 그늘, 석양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자연은 노매드를 내치지 않고 조건 없이 품어 준다. 때문에 절대적인 시간은 노매드 사이에서 불필요한 가치로 여겨진다. 본인 만족이 최고가 되고, 언제 어디서나 상대적인 시간을 마음대로 끌어 쓰다가 제자리로 돌려놓으면 그만이다.
 
오늘도 불편하게 쪽잠으로 연명하지만 이마저도 행복이라 정의할 수 있는 사람들. 복잡한 도시 속 대출받은 집에 사는 사람은 평생 알지 못할 자유일 것이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길 위에 나온 것은 아니었지만 아름다운 자연과 사람을 만나며 서서히 동화되어간다. 대출금을 갚다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인생의 가치를 계속해서 알아가는 노매드의 삶이 어쩌면 미래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
 
<노매드랜드>를 보는 동안 한국형 유목민 <소공녀>의 미소가 떠올랐다. 세상의 유일한 낙이 위스키와 담배였던 미소는 새해를 기점으로 월세, 담뱃값, 위스키값이 오르자 과감히 집을 포기한다. 집이 없는 게 아니라 여행 중이라 말하는 미소는 짐을 둘러메고 옛 친구들을 찾는다. 여기저기를 떠돌지만 빚 없이 사는 목표를 위해 육체노동을 불사하며 품위와 취향을 잃지 않는다. 미소는 제 앞가림 하나 못하는 철부지처럼 보이지만 타인을 보듬는 마음과 작은 것에 기쁨을 갖고 소신 있게 살아가는 용기를 보여줬다.
 
두 영화는 인간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사람답게 사는 게 무엇인지 깊은 사유의 시간을 제공한다.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는 현재를 즐기고, 미래를 꿈꾸지 않으면 실패한 인생일까 묻는다. 그 답은 길 위에만 있을 것이다. 그렇게 오늘도 현대의 유목민은 뚜벅뚜벅 인생을 향해 나아간다.
노매드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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