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남편 어디 있어?" 임산부에 총구 겨눈 경찰

한국전쟁 홍성군보도연맹 학살 피해자 이강세 이야기

등록 2021.05.08 12:42수정 2021.05.16 11:43
5
원고료로 응원
국회의원 선거로 초비상 정국이었던 1948년 5월 초 밤 11시. 충남 홍성군 홍성경찰서 경찰들은 발소리를 죽이고 방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상급자의 수신호가 있자 칼빈 총구가 문풍지를 '북'하며 찢었다. "꼼짝 마, 움직이면 쏜닷!"

방안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경찰들은 방문을 열어제치고 군화를 신은 채로 방으로 뛰어들었다. 방 안에는 임산부와 소녀 네 명이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경찰은 임산부의 멱살을 잡고 가슴에는 총구를 갖다댔다. "남편 어디 있어?" "몰라요." "죽고 싶냐!" 소리치는 경찰의 검지가 움직이려는 찰라, 소녀들의 비명이 터졌다. "악!"

임산부에게 총구 겨눠
 
a

이강세의 학창시절

 
"여기는 냅두고 마을이나 샅샅이 뒤져." 다행히 상급자의 말에 경찰들은 우르르 나갔다. 그들이 찾던 이강세(1909년생)는 이미 마을을 벗어난 후였다. 이강세는 한 해 전인 1947년부터 쫓기는 신세였다. 그와 뜻을 같이 한 동지들도 하나둘 경찰에 검거되었고 그들에게는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이 가해졌다. 비선(秘線)을 통해 검거 소식을 접할 때마다 이강세의 가슴은 졸아들었다. 동지들의 고통이 자신에게 온전히 전해지는 듯했다.

특히나 임산부인 아내의 고통은 그에게 크게 다가왔다. 경찰 감시와 협박을 받는 것만도 고통인데, 임신한 몸이니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1947년 이강세가 잠시 집에 들렀을 때 아내 이묘희는 임신을 했다. 때문에 이묘희에 대한 경찰 감시는 더 심해졌다. 

"으앙~" "아이고, 종섭이 엄마 아들이에요." 딸만 넷이 있는 이강세 집에서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은 경사 중의 경사였다. 하지만 아들 이종민이 태어난 1948년 6월 25일, 충남 홍성군 홍성읍 옥암리 이강세 집은 마냥 잔치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때까지도 이강세가 경찰에 쫓기는 신세였기 때문이다.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은 이강세가 은거하던 보령군 원산도에도 전해졌다. 그는 이곳에서 어부와 농민, 스님으로 위장해 장인갑과 함께 지하 활동을 이끌었다. 2년간의 수배 생활에 이강세는 최종 선택을 해야 했다. 1949년 4월 서울에서 국민보도연맹이 만들어지고 대한민국 정부와 충남경찰국은 '자수 기간'을 정했다.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10월 25일부터 11월 30일까지를 자수기간으로 정하고 대대적인 자수·전향 작업을 진행했다. 자수하는 자에게는 과거를 묻지 않고 '국민으로서 보호해주겠다'는 것이다.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의 결성 취지에 부합되는 것이다.

충청지역 검경당국은 서울과는 달리 자수 기간을 한 달 연장했다. 정부의 감언이설은 끊임없었다. "자수하면 과거를 묻지 않겠다." "비료를 무상으로 배급해 주겠다." "가입할 경우 장래성도 있고, 취직도 보장해준다." 협박도 이어졌다. "가입하지 않으면 품앗이를 해주지 않는다." 농촌에서 품앗이를 해주지 않는다는 건 농사를 접으라는 의미로 '굶어 죽으라'는 얘기나 다름없었다.


이강세는 끝까지 신념을 버리지 않고 버틸 것인가, 자수를 해 새로운 삶을 살 것인가 고심했다. 자수하면 그간의 삶이 부정되고, '빨갱이'가 되는 것 같아 죽기보다 싫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도망다니고 처자식과 떨어져 있어야 한단 말인가. 결국 그는 홍성경찰서 문을 두드렸다. 좌익계의 거물이 제발로 찾아왔으니 경찰서장과 사찰과장의 입이 귀에 걸렸다.

홍성경찰서 사찰과에서 '자수서'와 대한민국에 충성을 약속하는 '서약서'를 쓰고 나온 이강세는 자괴감에 괴로웠다. 하지만 자수 후 6개월은 그의 생에서 유일하게 '신발 끈 풀고 살았던' 시절이었다.

평등사회 꿈꾼 농민운동 지도자

이강세는 아버지 이태로의 얼굴을 보지 못한 유복자다. 어머니 홍씨는 개가를 했고 이강세는 큰아버지 이장로의 자식으로 호적을 올렸다. 그는 1922년 홍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개가한 어머니를 따라 홍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홍동면 대령리 큰아버지 집에서 '머슴 아닌 머슴' 생활을 했다. 소죽 쓰고 나무 하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사촌형 이관세는 공주고등보통학교를 다녔다. 

이강세는 이때부터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평등 사상을 깨쳤다. 백부가 특별히 괄시한 적은 없었지만 삶 속에서 '사람과 사람이 평등한 사회'가 필요함을 몸으로 체득했다. 사촌형 이관세는 1929년 광주에서 발생한 광주학생운동의 영향으로 공주고보에서 동맹휴학을 일으켰다. 그 일로 이관세는 퇴학당하고 3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이후 이강세는 일본과 서울에서 학업을 이어나갔다. 그는 자연스럽게 항일운동에 발을 담궜고, 독서회를 조직하는 한편 '재경홍성학우회'를 만들었다. 그는 '재경홍성학우회' 제1회 집행위원회에서 수양부 대표를 맡았다.(경성종로경찰서 고등계 비밀문서 제1517호, 1930.2.6.)

해방이 되자 이강세는 활동을 본격화했다. 자치위원회와 건국준비위원회에 이어 인민위원회 주요 활동가가 됐다. 그는 홍성군의 대표적인 농민운동 지도자로 홍성군 농민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농민회(전국농민조합총연맹)가 내건 '토지는 농민에게로'라는 구호는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당시 국민 70%가 농민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강세는 1945년 12월 서울에서 개최된 '전국농민조합총연맹결성대회'에 홍성군 대표로 참석했다. 홍성군농민조합 활동은 구항면과 홍성읍 옥암리·월산리 등지에서 가장 활발했다. 당시 구항면에는 홍성공업전수학교 재학 당시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해 시위를 계획하다 퇴학당한 이차흥이 농민조합장을 맡고 있었다. 또 홍성읍 옥암·월산리에는 이강세가 살고 있었다.(1992년 6월 29일자 <주간홍성>)
 

이강세를 위시한 홍성농민회가 구항지서를 습격한 사실이 기록된 충남경찰 연혁사 (출처: 진실화해위원회) ⓒ 박만순

 
홍성군 농민조합은 한보국이 이끌던 인민위원회의 주요 동력이었다. 이강세는 1946년 10월 17일 조합원 300명을 이끌고 구항지서를 습격했다. 대구에서 시작된 '10월 항쟁'의 연장선이었다. 이후 이강세는 홍성경찰서 제1의 요시찰 인물이 되었다.(충남지방경찰청, 『충남경찰 연혁사』)

그렇다고 이강세가 사회주의 이론으로만 농민운동을 지도한 건 아니었다. 그는 일본에서 배운 신농업기술을 농민들에게 대가 없이 전파했다. 복숭아, 사과, 배 등의 과일 재배법과 묘목과 화초, 면양재배까지 다양한 기술을 가르쳤다. 그런 이강세였기에 자연히 지역의 농민 지도자로 부상할 수 있었다. 

홍성군보도연맹, 과연 몇 명이었을까

이듬해인 1950년 1월 25일 홍성군 보도연맹이 결성되었다. 이날 행사에는 대전지방법원 성세호 홍성지청장과 박헌교 홍성경찰서장과 김영배 사찰주임 및 다수의 지방유지와 우익단체 간부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사무국장은 박종세, 선전부장에는 이강세가 임명되었다. 이강세의 사촌형 이관세도 가입했다. 이들은 모두 한국전쟁 발발 직후 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로 집단 학살당한다.

당시 전국의 보도연맹 가입 대상은 일차적으로 1949년 10, 11월 검·경 당국에 자수한 이들이었다. 홍성군 자수자는 1380명이었다. 각 지역별로 보도연맹 확대작업이 벌어졌는데 나중에는 소위 할당제가 도입되기도 했다.

최재선(1951년생, 홍성군 갈산면 상촌리)의 아버지 최정희(1918년생)도 할당제로 가입된 경우다. 홍성군청 공무원이던 최정희는 6.25 당시 구항면사무소에 근무했는데, 본인도 모르는 사이 보도연맹에 가입됐다. 최재선은 "아버지가 출장을 갔는데요. 그 사이 구항면사무소 동료 직원이 아버지 책상에서 도장을 꺼내 보도연맹원 명부에 자의로 도장을 찍었다고 합니다"라고 증언했다. 아버지 얼굴도 못 본 최재선은 아버지를 죽게 한 황당한 사연을 전하며 눈시울을 흘렸다.

최정희는 극히 드문 사례일 수 있지만 보도연맹 가입자 모두가 좌익 활동을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은 확실하다. 주요 간부들은 그랬다 쳐도 일반 보도연맹원들은 정부와 지역 경찰들의 강요로 가입한 경우가 많았다.

이강세가 자수한 1949년에 충남 지역 자수자들은 총3902명이었다. 그중 홍성군은 1380명으로, 충남 전체의 35%였다.(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이후 가입 독려와 할당제 등을 통해 홍성군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은 더 늘었을 것이다. 때문에 홍성군 보도연맹원은 100명이고, 이 중 학살된 이들도 100여명이라는 사실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홍성군보도연맹원들은 얼마나 죽었을까? 진실규명이 필요한 대목이다. 

 
a

증언자 이종민(이강세 아들) ⓒ 박만순

  
#보도연맹원 #홍성군 농민조합 #자수 #할당제 #신농업기술
댓글5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검찰 급했나...'휴대폰 통째 저장', 엉터리 보도자료 배포
  2. 2 재판부 질문에 당황한 군인...해병대 수사외압 사건의 퍼즐
  3. 3 "명품백 가짜" "파 뿌리 875원" 이수정님 왜 이러세요
  4. 4 '휴대폰 통째 저장' 논란... 2시간도 못간 검찰 해명
  5. 5 김종인 "윤 대통령 경제에 문외한...민생 파탄나면 정권은 붕괴"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