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쑥 뜯는 엄마는 상상도 못했을 거다

[팔순의 내 엄마] 작게 오그라든 엄마의 등과 전쟁의 상처

등록 2021.04.25 15:15수정 2021.04.25 15:15
1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엄마 오늘 정말 쑥 많이 했네. 그치?"
"그래. 많이 했다."



양 손에 들린 봉다리에서 쌉싸름한 쑥내가 물씬 풍겼다. 쑥을 다듬고 씻어서 이번 엄마 생신에도 쑥버무리떡을 해드릴 수 있게 돼서 괜시리 기분이 좋았다. 엄마도 나도 오늘 뜯어온 쑥 '전리품'에 흐믓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이웃 한 분이 건넨 "쑥 냄새가 너무 좋네요." 그 말에 또 어깨가 으쓱해졌다.

쑥 캐러 가서 엄마 등만 보고 왔네
  

엄마와쑥밥 배밭에서 쑥을 뜯고 있는 엄마의 뒷모습 ⓒ 변영숙

 
동그스름하게 작게 오그라든 엄마의 등에 봄 햇살이 살포시 앉아 있었다. '우리 엄마 언제 저렇게 작아졌을까.' 요즘 들어 부쩍 드는 생각이다. 우리 자식들은 저 작고 오그라든 엄마의 등만큼 든든한 등을 알지 못한다.

한없이 푸근하고 모든 걱정 근심 막아줄 것 같은 북경의 만리장성보다 든든한 엄마의 등. 새하얀 배꽃과 복숭아 꽃 아래 폭 싸인 내 엄마의 등… 갑자기 엄마의 등이 사라졌다. 주책맞게 떨어지는 눈물 속에 엄마의 등을 잠깐 잃어버렸나 보다. 쑥을 뜯는 시간보다 엄마의 등을 바라봤던 시간이 더 많았다는 것 아마 엄마는 모를 거다. 쑥 뜯는 데 열중해서…
  

엄마와 쑥밥 배밭에서 쑥을 뜯고 있는 엄마의 뒷모습. 요즘들어 엄마의 뒷모습에 눈물이 나는 날이 많다. ⓒ 변영숙

 
작년에 우연히 지나다 발견한 배 과수원. 의정부 송산동은 옛날부터 뱃골로 통했다. 동네 전체가 배 과수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 모두 옛날 이야기일 뿐이다. 의정부 송산동에도 개발 바람이 불어 드넓었던 논과 배밭은 온데간데 없고 멋대가리 없는 아파트만 삐죽하니 들어서 있다. 그 와중에 밀려 나가지 않은 과수원 몇 집이 송산동 배밭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는데 그것이 또 그렇게 고맙다.
 

의정부 송산동 배밭 일대 의정부 송산동은 배밭으로 유명하다. 과거에는 일대가 모두 배밭일 정도.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서 몇 개 과수원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 변영숙

 
작년에 그중 한 배밭에서 사다 먹은 배가 어찌나 맛나던지 가을 내내 일주일이 멀다하고 들락거리며 만 원 이만 원어치씩 '봉다리 배'를 사다 먹은 덕에 과수원집 주인과 안면을 텄다.

오늘 얼굴을 기억하고 배밭에서 쑥 뜯는 것을 허락해 주니 그 또한 고마울 따름이다. 덕분에 오늘 엄마와 함께 배꽃, 복숭아꽃, 자두꽃, 사과꽃 흐드러지게 핀 과수원밭에서 쑥도 뜯고 꽃구경도 하는 호사를 누렸다.

과수원 밭이라 거름을 먹고 자란 쑥은 칼로 도려내지 않고도 손으로 뚝뚝 뜯어도 될 정도로 무성했다.


"언니 거긴 쑥 농장이야? 일부러 쑥을 재배하는 곳인 거 같아."

사진을 보내줬더니 동생이 하는 말이다. 쑥이 좋으니 신바람이 나서 우리 두 사람은 피곤할 줄도 모르고 말도 없이 각자 봉다리 채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고개가 아프다 싶어 고개를 들면 바람에 날아가는 배꽃잎과 복숭아꽃잎이 바람에 흩날렸다. 그 앞에는 엄마가 있고… 참 눈물나도록 고운 봄 날이었다.

엄마와 내가 뜯은 쑥을 합하니 반자루는 거뜬히 넘어 보였다. 과수원 사장님은 벌써 퇴근을 하셨는지 보이지 않았다. 주인이 나고 드는 것도 모를 정도로 쑥에 열중했나보다.

쑥 하나에도 불쑥 생각나는 전쟁 트라우마
 

엄마와 쑥밥 이 세상 모든 엄마들은 그 어떤 꽃보다도 곱다 ⓒ 변영숙

 
주방 바닥에 쑥봉다리를 풀어 헤치니 주방 바닥이 쑥으로 산이 되었다.

"엄마 이렇게 많은 쑥으로 뭐 해 먹지? 떡을 하고도 한참 남을 것 같은데? 쑥은 좋긴 한데 별로 해 먹을 게 없는 거 같아. 떡하고 빈대떡 말고는… 달리 해 먹을 게 없지?"
"왜, 쑥국 끓여 먹는 사람들도 있어."

"정말? 쑥 넣고 국을 끓여?"

"에휴…"

갑자기 엄마가 한숨을 쉰다.

"옛날에는 이 쑥으로 밥도 해 먹었는데…"
"쑥으로 밥을 한다고? 쑥밥을 먹었다고?"
"그래."


쑥밥을 해 먹는다는 얘긴 처음 들었다. 믿어지지 않아 몇 번이나 되물었다. 그것도 부족해 검색을 해보니… 어라. 정말 '봄향 가득한 쑥밥 해먹기' 레시피가 주루룩 올라온다.

"진짜 쑥밥도 해 먹네. 봄철 별식으로 많이 해 먹는다네. 왜 몰랐지? 근데 쑥밥이 그렇게 맛있어?"
"맛있긴 뭐가 맛있어?"

"여기 전부 맛있다고 하는데. 곤드레 나물밥처럼 하나 봐. 콩나물밥처럼 양념장에 비벼 먹네?"
"밥 위에다 쑥 조금 올려 놓으니까 맛이 있나 보지?"

"그럼, 엄마는 어떻게 해 먹었는데?"
"엄마 어릴 때 그때는 전쟁 나고 얼마 안 지나서 먹어 봤는데... 쌀이 없으니까 쌀 조금하고 쑥을 잔뜩 넣고 밥을 해. 쌀은 없고 쑥만 잔뜩 있어서 질깃질깃한 게 으이…"


엄마는 마치 지금 쑥밥이 앞에 놓인 것처럼 진절머리를 쳤다.

"그렇게 맛이 없었어?"
"뭐가 맛있니 그게? 잘 씹히지도 않고 씁쓸한 게. 이따금 할머니가 쑥하고 쌀가루를 섞어서 주물주물 해서 쑥개떡을 해 주셨는데. 그건 좀 나았는데. 그렇다고 많이나 먹을 수 있나. 누가 오면 그걸 또 나눠주고 나면 또 먹을 것이 없어. 으이구..."

"그렇게 먹을 게 없었어?"
"없었지. 그때 먹을 게 뭐가 있니? 할아버지는 피난 나가고. 집에 할머니랑 나하고 이모들만 있는데. 먹을 게 있어도 어디서 나왔는지 중공군 놈들이 나타나서 다 뺏어가고. 아이고 참 그때 생각하면…."


엄마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올라오는 듯 했다. 6.25전쟁이 났을 때 엄마 나이 열두 살. 중공군의 폭격으로 엄마와 할머니만 남아서 살고 있던 시골집 담장이 무너지고 불에 탔다고 한다. 밤마다 들려오는 따발총 소리에 지금도 총소리 비슷한 소리를 들으면 무섭다고 했다.

몇 년 전 영화 <판도라>를 보고 나올 때도 엄마는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무서웠다고 했다. 발전소 터지는 소리가 꼭 총소리와 폭격 소리로 들렸다고. 캄캄해서 더 무서웠다고. 그때 엄마 손을 잡아 주는데 손바닥이 땀에 흥건히 젖어 있던 것을 기억한다.

그때 처음 알았다. 엄마의 전쟁 트라우마를. 엄마의 전쟁 트라우마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깊었다. 평소에는 말을 안 하지만 가끔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것에도 엄마의 트라우마는 짙게 배어 있었다. 봄의 전령사인 향긋한 쑥도 엄마에게는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지 몰랐다. 

엄마 마음 속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상처와 슬픔, 분노 또 기쁨 같은 것들이 얼마나 많이 켜켜이 앉아 있을까.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엄마의 속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더 엄마가 가엾고 안쓰럽다.
덧붙이는 글 다음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팔순의 내엄마 #엄마와쑥밥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문학박사, 한국여행작가협회정회원, NGPA회원 저서: 조지아 인문여행서 <소울풀조지아>, 포토 에세이 <사할린의 한인들>, 번역서<후디니솔루션>, <마이크로메세징> - 맥그로힐,

AD

AD

AD

인기기사

  1. 1 61세, 평생 일만 한 그가 퇴직 후 곧바로 가입한 곳
  2. 2 천연영양제 벌꿀, 이렇게 먹으면 아무 소용 없어요
  3. 3 버스 앞자리 할머니가 뒤돌아 나에게 건넨 말
  4. 4 "김건희 여사 라인, '박영선·양정철' 검토"...특정 비서관은 누구?
  5. 5 죽어라 택시 운전해서 월 780만원... 엄청난 반전이 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