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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은 제 명대로 죽었고, 도전은 죽음 당하고 - 정도전ㆍ권근론(論)

[[김삼웅의 인물열전] 호방한 자유인 허균 평전 / 52회] 고려가 망할 때에 도전이 만약 충의에 죽고, 근이 돌아가기를 청해서 벼슬하지 않았더라면

등록 2021.04.22 17:58수정 2021.04.22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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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매천 황현을 두고 "매천 필하(筆下) 무완인(無完人)"이라 하였다. 그의 필봉이 얼마나 매서웠던지, 흥선대원군으로부터 지방 수령에 이르기까지 두렵게 여기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매천에 앞서 매서운 허균의 필봉이 있었다.

그나마 매천은 초야에 묻힌 포의(布衣)의 신분이어서 종속된 것이 없었다. 하지만 허균은 관리였다. 성마른 성격과 불뚝불뚝 치솟는 저항의식으로 언제나 날카로운 칼날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함에도 조선왕조 체제에 기여한 큰 인물들을 사정없이 비판하였다. 일방적인 공격이 아니라 시비와 곡직을 가린 것이다. 

그가 소환한 인물론의 대상은 정도전ㆍ권근ㆍ김종직ㆍ남효온 등이다. 모두 조선왕조 시대에 특출한 인물군에 속한다. 차례로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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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 정도전 삼봉 정도전(1342~1398) ⓒ 김덕영

 
정도전(鄭道傳, 1337~1398)은 이성계가 조선을 세울 때 큰 역할을 하고 왕조의 경영방향을 잡아주었다. 『조선경국전』은 조선의 정치제도를 만들고 외교ㆍ군사문제를 비롯, 불교를 누르고 유교를 받드는 국가의 기본 방침을 제시하였다. 그는 고려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면서 관계에 나가 친원파 세력과 대결하다가 귀양살이를 했다. 조선이 건국한 뒤 개국공신이 되고, '왕자의 난'에 휘말려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권근(權近, 1352~1409)은 고려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 벼슬을 지내다 외조부인 이인임의 당파로 몰려 목숨이 위태로웠으나 이성계의 도움으로 풀려나고 조선왕조 건국에 공을 세웠다. 일찍이 정몽주에게 글을 배워 성리학에 깊은 지식을 쌓았으며 조정에서 중국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작성했다. 하륜 등과 『동국사략』을 편찬하기도 했다. 이들에 대한 허균의 비판을 들어보자. 「정도전ㆍ권근론」의 중후반부이다. 
 

고려말 성리학자였던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과 수은 김충한, 양촌(陽村) 권근(權近,1352~1409) 위패가 봉안된 금남사(錦南祠)가 하동군 경천묘에 함께 있다. ⓒ 김종신

 
도전(道傳)과 근(近)은 다같이 왕씨를 근시(近侍)하던 신하로서 높은 관직에 있었다. 우리 조정에 들어와서도 좋은 벼슬을 했는데 근은 제 명대로 죽었고, 도전은 죽음을 당하고 자제도 멸망하였다. 나는 여기에서 더욱 증험된 바가 있다.

도전은 일찍부터 우리 태조에게 지우를 받아서 외적을 정벌할 즈음에는 반드시 주획(籌畫)에 참여하였다. 대왕께서 황옥(黃屋, 임금자리)에는 마음이 없었는데 도전이 먼저 추대할 꾀를 내었다. 비록 천명과 인심이 저절로 붙이는 데가 있어 옹용(雍容)하게 대보(大寶,궁궐)에로 모여들었으나, 도전이 왕씨에게는 충신이 아니었다. 그 마음은 진실로 제 몸을 이롭게 하는 데에 있었다. 까닭에 끝내는 제 몸을 죽이게 됨을 면하지 못했다. 

근은 이색(李穡) 관계로 외방에 유배되었는데, 강헌왕(康獻王, 조선 태조)께서 행재(行在)에 불러와서 드디어 등용되었다. 그 때에 근은 벼슬에서 떠나기를 구함에 겨를이 없어야 마땅하건만, 목숨을 사랑해서는 몸을 굽히지 않을 수 없었다. 까닭으로 벼슬이 높게 되었고, 제 명대로 살다가 죽었다. 이것은 남의 신하 된 자가 경계로 삼을 만한 것이다.

고려가 망할 때에 도전이 만약 충의에 죽고, 근이 돌아가기를 청해서 벼슬하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의 숭앙함이 포은(圃隱)ㆍ야은(冶隱)과 어찌 다르리요. 계책이 이렇게 나오지 않아서 나라를 팔아넘긴 죄에 빠지고 혹은 죽음을 겁내었다는 나무람을 받았다. 사부(士夫)가 사생과 존망에 있어 취하고 버리는 데에 어찌 삼가지 않을 것인가. 


만약 도전이 좌명(佐命)하던 날(태종이 왕위에 오른 날)에 죽음을 당할 줄을 환하게 알았더라면 반드시 두어 해 동안 목숨을 아껴서 그 명망을 허물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직 부귀에 대한 생각이 그 슬기를 어둡게 했던 것이었다. 까닭에 그 공을 자부하고 또 임금에게 나이 어린 아들을 세자로 세울 계책을 권해서 제 권세를 굳히고자 하였다. 그런데 그 스스로 편케 하려던 것이 곧 스스로 위태하게 한 것이 되었다. 

나는 이 두 사람 중에 도전을 더욱 꾸짖는 바이다.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호방한 자유인 허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허균 #허균평전 #자유인_허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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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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