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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사로를 오를 수 있는 사람, 없는 사람

장애인 당사자와 함께한 충북 옥천 읍내 산책... 거리 전체가 큰 장애물인 이유

등록 2021.04.20 10:12수정 2021.04.20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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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 수 없도록 잘못 설치된 읍내 한 점포 경사로 ⓒ 월간 옥이네


부서진 보도블록, 턱과 계단, 밀거나 당겨야만 열리는 문까지. 어쩌면 주변의 자연스러운 풍경으로 혹은 그저 작은 불편으로 지나쳐왔던 것들. 그러나 그 무심한 지나침이 비장애인으로서 당연히 누려온 특권 중 하나라는 사실을 마주한다면, 앞으로의 거리는 조금 달라 보일지도 모르겠다.

'장애'를 만드는 건 무엇일까? "내 몸에 장애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 거리에 대한 장애를 느낀다"는 충북 옥천군 옥천장애인자립생활센터 임경미 소장의 말처럼, 장애인 이동‧접근의 문제는 신체의 다름이 아닌 일상 속 각종 장애물에서 비롯된다. 사회가 쌓아 올린 차별 장벽이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셈이다.

법 또한 그 장벽을 견고히 하는 요인이다. 정부의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은 경사로와 같은 편의시설 설치 의무를 오직 1998년 이후 신‧증축된 공공기관 및 300㎡(약 90평) 이상의 건물에만 적용하고 있다. 하지만 음식점‧카페‧편의점 등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곳은 대부분 소규모 점포다. 실제로 지난해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전국의 일반음식점 중 300㎡ 미만인 곳이 97.7%에 달한다. 거리 전체가 하나의 큰 장애물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대도시가 아닌 지역의 경우 상황은 더 어렵다. 오래된 작은 건물이 많은 충북 옥천 읍내 역시 마찬가지다. 누군가에겐 그저 정감 있는 삶터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턱 때문에 먹고 싶은 음식을 두고 발길을 돌려야만 하는, '가고 싶은 곳'이 아니라 '갈 수 있는 곳'을 찾아야만 하는, 매 순간 힘겨운 투쟁과 마주하는 공간일 수 있다.

옥천 토박이이자 장애인 인권 활동가인 장애인 당사자 이수진씨와의 만남을 통해 우리 주변 곳곳의 장벽과 마주해보려 한다. 


오랜만에 나선 읍내, 여전한 불편들

따듯한 햇살이 비추던 3월의 어느 오후, 옥천 읍내도 봄기운으로 가득했다. 나들이하기 딱 좋은 날씨에 이수진씨와 함께 읍 중심가 산책을 나섰다. 읍내는 오랜만이라는 그는 코로나19 이후 불필요한 외출을 줄여 집과 옥천장애인자립생활센터만 주로 오간다. 특히 읍내는 그전부터 별로 찾고 싶지 않았다. 도로 상황이 좋지 않기로 옥천 최고인 데다 건물 입구의 턱 때문에 갈 수 있는 곳도 손에 꼽기 때문.


"인도는 기본적으로 휠체어 두 대가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폭이어야 하는데, 옥천은 그렇지 않아요. 가뜩이나 좁은 폭에 가로수와 입간판, 주차된 차들까지 있으니 더 심각하죠."

함께한 길 위에서 그가 말한 불편들이 여실히 드러났다. 흔히 '김밥천국 사거리'로 불리는 지점에서 '희망약국 사거리'까지, 여러 상점으로 옥천에서 가장 번화한 그 거리는 한편으론 가장 불편한 거리이기도 했다.

"여기 이런 작은 단차에도 휠체어는 덜컹거려요. 그럴 때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낄 수밖에는 없죠."

건널목 부근 회색 마감석의 높낮이부터 들쑥날쑥했다. 적당히 낮은 곳이 있는 반면 너무 높아 그대로 길을 건너기가 불가능한 곳도 있었다. 그럴 때면 차도로 돌아가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이수진씨는 이처럼 작은 부분에서부터 변화가 꼭 필요하다고 말한다.

"인도를 재정비할 때마다 단차가 달라져요. 불편 민원을 넣긴 하는데, 매번 그러기는 지치죠. 애초에 공사할 때부터 그 기준을 확실히 세워두고 지키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요."
 

장애인 인권활동가 이수진씨가 이동 중에 만난 공사현장 ⓒ 월간 옥이네

 

개구리주차는 또 다른 장벽이다. ⓒ 월간 옥이네


길을 나선 이날은 한창 도로 정비가 진행되던 중이기도 했다. 여기저기 적치된 보도블록과 울퉁불퉁 방치된 인도 위는 더욱 험난했다. 휠체어 운행뿐만 아니라 그저 걸어 다니기도 위험한 상황. 새 단장은 좋지만, 그 과정 속 당연히 지켜져야 할 안전은 뒷전이 됐다.

읍내에서 흔히 보이는 '개구리 주차' 또한 커다란 장벽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좁은 인도를 점유한 한쪽 바퀴들은 휠체어가 오갈 이동 공간뿐만 아니라, 건물 입구로의 진입까지도 막아선다. 경사로가 설치된 곳임에도 차로 인해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은, 하나의 장벽이 사라져도 또 다른 장벽이 언제든 생겨나는 현실을 보여줬다.

"차주에게 전화해서 받지 않으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한편으론 주차하는 사람들의 마음도 이해 가요. 옥천에 마땅한 주차공간이 없어서 발생하는 일이죠. 결국, 모든 문제는 연결돼 있는 것 같아요. 그럴 때 피해를 보는 사람은 정해져 있어요."

나들이를 하며 수많은 1층 건물을 지나쳤지만, 그중 휠체어 진입이 가능한 곳은 정말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턱이나 계단으로 막힌 입구가 대부분이었고 전혀 사용할 수 없게 잘못 설치된 경사로도 보였다.

"같은 도로 위인데도 신협 입구는 경사로가 설치돼 있고, 다른 가게들은 그렇지 않아요.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다는 거죠."

없앨 수 있음에도 무너지지 않는 성벽인 듯 단단한 턱은 장애인 당사자뿐만 아니라 유모차, 낮은 신장의 어린이,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과 임산부의 출입에도 걸림돌이 된다. 세계적인 프랜차이즈도 예외 없었다. 해외에서는 편의시설 설치를 지키는 브랜드라도, 한국에만 오면 턱을 쌓는다. 강제력 없는 법 규정 때문이다.

"저기 보면, 약국 중에서도 경사로가 있는 곳이 있고 없는 곳이 있어요. 아플 때 누구나 약을 처방받을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에겐 그런 권리조차 제대로 보장이 안 되는 거예요."

1층 있는 삶, 어디든 '같이가게' 된다면

입구에 턱만 사라져도 마음은 훨씬 편안해진다. 이수진씨가 읍내에서 가장 좋아하는 카페 '티률'도 경사로가 설치된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다. 맛있는 커피 맛뿐 아니라 사장님의 세심한 고민이 느껴지는 곳이기 때문.

"티률의 경우 앞문 턱이 원래 높아서 경사로를 설치하면 기울기가 너무 커져요. 그래서 뒷문에 따로 설치하셨죠. 사장님이 같이 사는 세상을 위해 고심하신 부분인 것 같아요. 어떻게든 방법을 모색하신 거잖아요. 그게 티률을 애정하는 이유예요."

이수진씨의 단골 가게는 하나 더 있다. 휠체어를 탄 이후 포기한 것 중 하나가 미용실이었다는 그가 다시 마음 놓고 머리할 수 있는 곳, 양수리의 '버르장○○'이다. 엘마트 앞에 있던 당시에는 건물 사정상 경사로를 놓을 수 없었다. 휠체어 사용 손님이 불편을 겪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던 사장님은 이전하게 되면 꼭 경사로를 놓아야겠다고 다짐했었다.

"고맙죠. 염두에 두고 계셨다는 거니까요. 옥천 주민분들의 생각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 변화가 그냥 생긴 것이 아니라, 장애인 당사자 동료들의 활동이 뒷받침된 결과이기도 한 것 같아요."

곳곳에 경사로가 설치된 데에는, 턱 앞에 물러서지 않고 지역사회 속 활발한 활동을 꾸준히 이어간 장애인 당사자의 역할도 컸다. 그들의 '단골 가게'가 늘어날 때마다 자연스레 턱 또한 없어졌기 때문. 활동가와 가게 주인의 마음이 엮여 만들어진 '1층 있는 삶'이었다.

이 1층 있는 삶을 더 확대하기 위해, 옥천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는 '같이가게' 프로젝트를 지난해부터 펼치고 있다. 경사로와 같은 편의시설이 설치된 가게를 선정해 현판을 전달하는 활동으로, 현재 총 네 곳이 동참했다. 김선희 담당자는 "진입 가능성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장애인 당사자가 이용 가능한 곳인지도 살펴서 선정한다"며 "옥천 모든 곳에 경사로가 세워져 '같이가게' 현판이 필요 없는 날이 올 때까지, 계속 이어갈 예정"이라고 전했다.

사람 중심으로 경사로를 보자
   

옥천 시내에서 이동 중인 장애인 인권활동가 이수진씨 ⓒ 월간 옥이네


이런 활동을 장애인 당사자의 노력과 주민의 선의에만 기댈 수는 없다. 같이가게에 동참한 동네방네삶는족족 대표 임성빈씨는 "개인이 직접 경사로를 설치하는 게 쉽지만은 않은 것이 사실"이라며 "옥천군에서 지원해준다면 훨씬 수월할 것"이라는 말을 전하기도 했다. 이수진씨가 지자체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야 함을 이야기하는 이유다.

"다른 지역은 지자체가 직접 경사로 설치를 지원해주기도 해요. 옥천은 왜 그런 사업이 없을까요. 모든 건물에 경사로가 설치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요."

아직 경사로 등 편의시설에 관한 조례가 없는 옥천의 현실에, 이수진씨는 옥천군이 진행하는 '소상공인 점포환경 개선 사업'을 한 가지 대안으로 제시했다. 소규모 가게에 간판 교체나 인테리어 개선 비용 등을 최대 2천만 원까지 지원하는 이 사업에, 경사로 설치를 필수 조건으로 정한다면 가게의 부담은 덜면서 더 많은 '같이가게'가 생겨날 수 있는 길이 생긴다.

하지만 옥천군은 규모 300㎡(약 91평) 미만 점포는 경사로 설치가 법적 의무가 아닌 데다, 도로 공간 점유로 교통 혼란이 우려된다며 선뜻 나서지 않는 상황. 읍내에서 마주친 경사로가 통행에 어떤 방해도 주지 않았음을 떠올리면 수긍이 어려운 해명이다. 게다가 도로법에서는 경사로 등 편의시설은 지자체에 의해 '도로점용허가'를 받을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실제로 경사로 설치를 적극적으로 지원‧권장하는 지역도 많다.

"사람이 편한 세상이 목적이라면, 정말 의지가 있다면, 법 해석도 인간을 위해 이뤄져야 하잖아요. 똑같은 경사로를 불법 적치물로 보느냐, 인간을 위한 편의시설로 보느냐는 어떤 시선을 가졌는지에 따라 달라져요."

경사로 필수 조건화가 어렵다면, 편의시설 설치 가게에 배당되는 가산점 확대가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현재 개선사업 지원 점포 선정 기준인 총 107점 배점 중 3점에 불과한 가산점을 더 늘린다면, 경사로 설치를 고려하는 곳도 자연스레 늘어날 터. 정말 '사람'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라면, 가능한 방식을 최대한 시도해야 하는 것 아닐까 묻게 되는 봄날의 산책이다.

장벽이 무너진 자리, 서로가 환대받는 곳

이번 나들이에는 뜻밖의 기쁨도 있었다. 출입구에 턱이 없는 올리브영에서, 이수진씨는 오랜만에 쇼핑을 즐겼다. 내부가 넓어 휠체어 활동도 자유로웠고 낮은 높이의 계산대도 편의를 도왔다. 누군가에겐 당연하게 주어지는 '일상'이라는 기쁨을 모두 평등하게 누릴 공간을 위해 필요한 건, 그런 작은 배려들이었다.

"현실적으로 아무런 장애물이 없는 공간을 만드는 일이 어려울 수는 있어요. 하지만 계속해서 다양한 방식을 모색하고 시도하는 것이 중요해요. '나만 아니면 돼'가 아니라, '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필요한 거죠."

주변을 조금만 둘러보면 움직임에 불편을 가진 사람들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비단 장애인 당사자뿐만이 아니라, 이웃집 어르신이나 다리를 다친 친구, 유모차를 끄는 사람과 보호자의 손을 꼭 잡은 어린이까지. 거리 위 수많은 장애물을 헤쳐나가야만 하는 이는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많을지도 모른다.

"누구나 노화하고, 병들고, 불편해지잖아요. 일시적 장애도 생길 수 있는 거고요. 지금 당장 내가 불편하지 않더라도, 불편한 누군가를 위해서 혹은 언젠가의 나를 위해서 변화를 이뤄내야 해요."
 

누군가에겐 그저 정감 있는 삶터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턱 때문에 먹고 싶은 음식을 두고 발길을 돌려야만 하는, ‘가고 싶은 곳’이 아니라 ‘갈 수 있는 곳’을 찾아야만 하는, 매 순간 힘겨운 투쟁과 마주하는 공간일 수 있다. ⓒ 월간 옥이네

 
이수진씨에게 옥천은, 나고 자란 고향이자 차별에 맞서 삶을 지켜내는 투쟁의 현장이다. 늘 유쾌한 웃음과 함께하는 그는 더 나은 옥천을 위한 외침에 힘찬 목소리를 보태왔다. 이제 지역사회가 크게 응답할 차례다.

"어떤 모습이든 가고 싶은 곳을 자유롭게 갈 수 있는 공간이 된다면, 옥천이 나를 환대한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까 생각해요."

이수진씨의 이야기 속 '나'는 곧 '누구나'를 의미한다. 다 함께 일상 속 장벽을 경계하고 무너뜨려 가야 할 이유다. 따듯한 해가 곳곳을 빠짐없이 비추는 봄날처럼, 모두가 어울려 환대받는 세상이 올 때까지.

[관련기사] 
낮은 문턱, 계단 사라진 놀이터... '무장애 도시' 아시나요 http://omn.kr/1sw0o

월간옥이네 통권 46호(2021년 4월호)
글·사진 정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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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옥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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