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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호중에게 알려주고 싶은 인물이 있다

영국을 복지국가로 전환시킨 수상 클레멘트 애틀리

등록 2021.04.19 11:15수정 2021.04.19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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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4월 16일, 더불어민주당은 새 원내대표로 윤호중 의원을 선출했다. 윤호중 원내대표는 15일 경쟁상대인 박완주 의원과의 토론회에서 개혁과 협치에 대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개혁이다. 협치는 우리가 선택할 대안이 아니다. 일종의 협치 계약이 있지 않는 한 협치는 불가능하다"라고 말했다.

개혁에 대한 의지를 표방한 새 원내대표를 위해서 꼭 들려주고 싶은 역사 속 지도자 이야기가 있다. 바로 영국 클레멘트 애틀리(Clement Attlee, 1883~1967) 수상이다.

현재 영국 수상은 제77대로, 1720년대 첫 수상을 가진 이후 역대 수상의 수가 거의 60여 명에 이른다. 이따금씩 BBC나 연구기관에서 역대 최고의 수상을 묻는 조사를 하는데 대중 조사의 경우, 애틀리는 윈스턴 처칠과 함께 항상 다섯 손가락에 든다. 둘이 막상막하지만 2차대전 중 처칠이 보여준 압도적 카리스마때문에 대중 조사에서는 처칠이 좀 더 우세한 듯하다. 그러나 설문이 인문-사회 학계를 대상으로 할 경우, 애틀리는 독보적인 존재다.

뭘 했길래 역사가들이 높이 평가할까. 간단히 말하면, 그는 '영국 전후 질서의 설계자' '영국을 복지 국가로 전환시킨 주역'으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그는 대공황 이후 파시즘이 유럽을 휩쓰는 1930년대부터 냉전이 본격화되는 1950년대까지 20년간 영국 노동당을 이끌었고, 그중 2차대전 직후인 1945년부터 1951년까지 6년간 영국 수상을 지냈다. 

영국 사회를 뿌리채 흔든 애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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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멘트 애틀리(Clement Attlee, 1883~1967) 수상. ⓒ 영국정부/위키커먼즈

 
재임 기간 애틀리는 19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영국 사회를 지탱했던 두 축인 자유주의와 제국주의를 뒤집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18세기 산업 혁명을 일으킨 영국은 고전적 자유주의, 즉 정치적으로는 의회 민주주의요 경제적으로는 자유무역주의를 앞세워 해가 지지 않는다는 대영 제국을 건설하고 20세기 중반까지 세계 최강국의 지위를 누렸다.

애틀리는 이것을 뿌리채 수정한다. 국내적으로는 영국 역사 처음으로 국가가 시장에 강력하게 개입하는 수정 자본주의로 전환시키고 의료-주택-연금-실업 수당 등 복지 정책을 제도화했다. 미국 공화당이 영국 의료 체계가 사회주의적이라고 비판했을 때 보수당 보리스 존슨마저 발끈하며 옹호하는 영국의 자부심, 국가의료체계(National Health Service, NHS)가 애틀리 내각의 작품이다. 대외적으로는 인도 독립 등 제국주의를 정리하는 수순을 밟는 동시에 구식민지들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커먼웰스(commonwealth)로 전환시켰다. 

애틀리는 근대 정치인의 기본 요소인 대중적 친화력이나 카리스마가 제로에 가깝고 수줍음에 있어서는 가히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던 인물이다. 그와 정치적 경쟁자였지만 2차대전기 수상-부수상으로 함께했고 서로에게 경의를 표하는 관계에 있던 윈스턴 처칠은 애틀리를 '양의 탈을 뒤집어쓴 양'이라고 평할 정도였다.


1945년 7월 총선에서 윈스턴 처칠이 이끄는 보수당을 상대로 역사적 압승을 거둔 후 소감을 물었더니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할 뿐, 더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과묵함과 절제된 언어로 악명이 높은 까닭에 그가 약간의 언어장애가 있는 국왕 조지 6세를 수상 자격으로 처음 만날 때, 둘 중 과연 누가 먼저 말을 꺼낼 것인가가 관심거리가 될 정도였다.   

이토록 내성적인 애틀리가 정치를 하게 된 전환점은 런던 노동자 계층 아동을 위한 봉사 클럽이었다. 그가 옥스포드대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이후 진로를 생각하는 동안 자원 봉사를 하던 곳이었다. 그곳에서 20세기 초 영국 노동자 계층의 비참한 생활을 목격할 때까지 그는 중산층에서 태어나 편안한 삶이 보장돼 있는 엘리트였고 당시 대부분의 영국 중산층이 그랬듯 기존 질서에 그닥 의문을 품지 않았고 품을 필요도 없던 제국주의자였다.

하지만, 봉사 클럽 활동을 계기로 그는 사회주의로 전향한다. 영국 사회주의자들과 광범위한 교류를 시작하는데, 그중 한 사람이 현재 런던 정경대를 세운 중심 멤버이며 여성 사회주의자로서 단체교섭(collective bargaining)이란 개념을 만든 베아트리스 웹(Beatrice Webb)이다. 당시 사회 사업의 하나였던 린보 운동(Settlement Movement)을 전개한 토인비 홀에서도 근무, 빈민 구제에서 가난을 예방하는 쪽으로 진화하던 사회 사업의 세계에도 눈을 뜨게 된다.

이후 자유당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 수상이 제시한 1911년 국민 보험법(National insurance act)의 의의를 시민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자전거로 전국을 누비며 시민들을 설득했고, 자신 또한 복지에 대한 감을 익혔다. 

집단 반발에 부딪혔던 개혁,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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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트래포드 종합병원. 이 병원은 이전엔 파크 병원(park hospital)으로 불렸다. 1948년 7월 5일 영국의 모든 병원이 국유화되자 NHS의 탄생을 상징하는 곳이 됐다. ⓒ Dave Smethurst/ 위키커먼즈

 
세계 1차대전 때 입은 부상을 회복하고 1922년에 국회로 진출, 애틀리는 본격적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한다. 식민지 인도 관련 업무를 맡으며 제국주의에 대한 기존 생각을 재고, 1930년대는 영국의 인도 지배를 비판하는 선까지 나아갔다. 동시에 노동당 내부에서 자생하는 극좌 파시스트들과 갈등하면서 의회 민주주의를 보다 더 확신, 독일 히틀러를 비판했다.

1935년 노동당 당수로 선출돼 보수당과 경쟁 관계가 되지만 2차 대전이 본격화되는 1940년 "우리 모두 당신 뒤에 있다, 윈스턴"("All behind you, Winston")으로 상징되는 연립 내각에 참가, 2차대전 말까지 부수상으로서 처칠을 보좌했다. 처칠이 주로 전쟁과 외교 분야에 전념하는 동안 국내 문제를 맡았던 애틀리는 사회 문제를 고찰할 기회를 얻었고 실무 경험까지 쌓게 된다. 1910년대부터 쌓아 올린 경험, 지식, 정치 철학이 단단하게 받쳐진 데다가 전쟁기 실무 경험까지 쌓은 준비된 지도자였다.   

독일 항복 직후인 1945년 7월 영국은 연립 내각을 깨고 총선에 돌입한다. 2차대전의 영웅 처칠이 이끄는 보수당이 압승하리라는 예상과 달리 노동당이 보수당의 2배에 달하는 의석을 확보했고 애틀리는 노동당 역사에서 최초로 단독 내각을 이끄는 수상으로 취임한다.

애틀리가 정치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기간은 단 6년, 1945년부터 1951년까지였다. 6년 동안 그는 수십 년에 걸쳐 쌓은 정치 철학을 거침없이 정책으로 토해냈다. 자유시장을 중시하는 경제 기조에서 시장을 통제하는 쪽으로 전환, 영국 중앙 은행, 광산, 철도, 전기등 기간 산업을 국유화한다. 그가 줄기차게 고민해 왔던 질문, 즉 '국가가 모든 이들에게 보장해야 할 삶의 최저선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으로 의료 보험, 실업 보험, 도시 계획, 임대 주택, 의무 교육 확대, 여성과 아동 노동 보호법을 추진했다. 현재 대부분의 국가에서 당연시되는 제도들이지만 1940년대에는 급진적이고 선구적인 조처였다.   

압도적 지지 아래 성립된 내각이었지만, 애틀리도 사회적 저항과 그에 따른 개혁의 부분적 후퇴라는 공식을 피하지는 못했다. 사회적 저항의 시작이 첨예한 이해 관계가 있는 이들이라는 것은 만고진리다.

애틀리 최고의 업적으로 꼽히는 국가 의료 시스템은 의사들의 집단 반발에 부딪쳐 2년간이나 실행되지 못했다. 애초에 애틀리는 의료 개혁 추진할 보건부장관 자리에 노동당 내 가장 추진력이 있고 강경파인 당시 40세 비번(Aneurin Bevan, 1897~1960)을 기용했다. 비번은 웨일즈 광산촌의 트레더가 의료 조합(Tredegar Medical Aid Society)을 모델로 한 보험 체계를 구상, 1946년 국가 의료 서비스법 (National Health service Act 1946)을 상정, 통과시켰다. 개인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은 정부가 책임진다는 명제하에 전국에 있는 3000개의 병원 중 2700개 이상의 병원을 국유화하고, 의사·간호사·약사 등 의료진을 보건부에 소속시켰다. 하지만 의사 집단의 집단 행동과 반대로 1948년 7월이 돼서야 시행됐다.

의사 집단의 저항을 넘어섰지만, 국가 의료시스템은 실시 3년 만에 또 다른 위기에 처한다. 이번에는 재정 문제. 문제가 불거진 곳은 치과였다. 영국 치과 협회(British Dental Association)에 의하면, 1948년 당시 충치, 치조 농루, 염증등 영국인의 구강 상태가 2차대전 패전국인 독일보다도 나빴다고 한다. 18세 이상 인구 75% 이상이 완전 틀니 (complete denture)를 가진 상태였다. 국가 의료 보험 시작으로 치과 진료에 대한 요구는 폭주, 첫 9개월 동안 정부는 3300만 개의 인조 치아를 제공했고, 1950~1951년에 이르러서 그 수는 6500만 개에 이르렀다. 발치 역시 첫 9개월간 4500만 개, 필링은 4200만 개에 달했다.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이 의료 혜택을 받았지만, 그로 인한 재정난은 노동당 내각을 궁지로 몰아 넣었다. 보건부장관 비번은 의료 시스템이 경제적 능력보다는 필요(need)에 기반해야 하고 의료 영역은 저소득층에게 사회적 안전망이 돼야 한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정책 수정을 요구하는 측에 밀려 결국 치과와 안과는 의료 시스템에서 제외된다.

현재 '국가 의료 시스템의 설계자'로 추앙받는 비번을 사퇴하게 했던 직접적인 계기, 그 유명한 1951년 '이빨 논쟁'이다. 이후에도 애틀리 내각은 보수당으로부터 국가 재정을 낭비하고 산업의 근대화를 저해한다는 비판을 받았고, 사회주의 세력으로부터는 개혁이 불완전하다는 비판에 놓인다. 역사적인 업적에도 불구하고 1951년 총선에서 패배, 애틀리는 보수당의 윈스턴 처칠에게 수상직을 다시 넘긴다. 

본인이 계획했던 '할 일'을 다한 애틀리가 정계 은퇴 후, 런던 지하철에서 한 시민에게 '애틀리 수상을 꼭 닮았다는 말 듣지 않아요?'라는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그 시민이 들은 답은 '종종', 쿨한 단 한 마디였다. 자신을 정치적 영웅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시민 애틀리의 모습이다. 

180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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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윤호중 비상대책위원장이 1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서 비대위원들의 발언을 듣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애틀리의 정책이 만고진리일까? 그렇지 않다. 애틀리가 세운 틀 속에서 노동당과 보수당이 업치락 뒷치락 하던 1960, 1970년대가 지나고 정치 철학면에서 그의 진정한 경쟁자인 마가렛 대처가 1970년대 말에 등장한다. 애틀리를 '진정으로 급진적이었고 사회를 개혁했다'고 평하면서도 대처는 애틀리의 틀이 관료성에 빠졌다고 판단, 영국 사회에 시장의 효율성이 필요하다고 외친다.

애틀리가 국영화시켰던 철도, 항공, 통신, 광산 등을 민영화시키고 국가 소유의 임대 주택을 임대인이 살 수 있도록 해 자유시장으로 내보냈다(단, 의료 영역은 사회적 동의가 워낙 강해서 천하의 대처도 건드리지 못했고 사회 보장 제도 부문 역시 지금까지도 큰 틀은 유지한다). 그녀는 자유 무역주의자로서 미국 레이건 대통령과 신자유주의 질서를 깔기 시작하고 유럽내 자유 무역을 적극 지지, 1990년대 초 EU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1997년 노동당에 다시 정권을 넘기지만, 애틀리의 구상에 도전한 마가렛 대처는 위대한 지도자를 묻는 학계 설문에서 애틀리와 1위를 다툰다.      

상이한 철학을 가졌던 이들이 최고의 지도자로 인정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둘은 제국주의와 전체주의에서 냉전으로, 그리고 냉전에서 신자유주의로 국제 질서가 바뀌는 전환기에 있던 이들이다.

이 둘 모두 전환기가 일으키는 혼란스러움 속에서 국내 국제 사회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파악하는 통찰력을 가졌다. 한 명은 자유시장에 기반한 자본주의가 야기하는 사회적 양극화를 복지의 개념으로 돌파했고, 다른 이는 시장의 자극이 필요할 때로 판단하고 시장의 기능을 재확대했다. 정치적 입장에 따라 논쟁에 휩싸이지만, 공통적으로는 둘 모두 시대를 정확히 읽었다.

범여권까지 포함한 국회 의석 180석. 다시 오기 어려운 기회를 가진 민주당이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이다. 답할 때 조건이 있다. 한 문장으로 대답하기. 말이 장황하고 이 분야 저 분야 쑤시는 답이 나온다면, 그것은 들은 것은 많은데 소화가 되지 않은 상태, 아이디어가 없거나 중심을 잡지 못했다는 뜻일 것이다. 간결한 책 제목이 전체의 내용을 담듯이, 큰 목표는 간결한 두세 단어면 족하다. 핵심 개념이 나오면, 그 단어는 각 분야에 적합한 언어로 바뀌고 살이 붙기 마련이다.

선명한 청사진이 나오면 밀고 가길 바란다. 역사적으로 저항없는 개혁, 후퇴 없는 개혁, 단 한방에 성공하는 개혁은 없으니 후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후퇴의 일환으로 선거 패배도 있을 것이고 개혁안이 뒤집히는 순간도 반드시 온다. 하지만 우리가 18세기의 실학파와 19세기 대원군의 쇄국을 아쉬워하듯, 적어도 뒷세대들에게 '아... 그때 이랬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을 남겨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싸우느라 뭘했는지도 알기 어려운 세도 정치기같은 회색빛 시기로 기록되지 않을 것이다.
#역사 #더불어 민주당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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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대와 대화할 수 있는 역사를 나누고 싶은 역사학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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