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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의 무덤 사냥에 나선 초대 미국 공사 수행원

[조선의 의인, 조지 포크] 정체가 아리송한 의문의 인물, 쥬이

등록 2021.04.20 09:20수정 2021.04.20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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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초기 조선의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위해 젊음을 바쳤으나, 청나라로부터는 모략당했고, 조선으로부터는 추방당했으며, 본국 정부로부터는 해임당했다. 어느 날 일본의 호젓한 산길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의인 조지 포크에 대한 이야기이다.[기자말]
- 이전기사 '영국 외교관은 왜 한국인 스님 구출 자금을 댔을까'에서 이어집니다. 

한국인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조지 포크예요. 지난 번에 이동인 스님과 작별을 고하였습니다. 헌데 아무래도 아쉬움이 남는군요. 1881년 5월 6일자 일본 신문기사 하나를 인용하고 지나갈까 합니다.  
 
"이동인은 아시아 정세를 통찰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절세의 실천력(탁절유위卓絶有爲)을 지닌 인사로서 언젠가 조선을 혁신하여 쇠운을 만회할 인물로 여겨졌는데, 자기나라로 귀국하자마 비명으로 죽게 되어 정말로 애석하기 그지 없다. 이동인은 1879년 밀입국한 이래 1년간 일본에 머무는 동안 '아사노朝野'라는 일본이름으로 변성명하고 일본어를 재빨리 습득하였다. 그는 1880년 여름 흥아회 회장과의 단독회담을 한 적이 있었는데 통역없이 유창한 일본어로 유럽 열강의 정세, 풍속 및 습관에서부터 조선의 폐정弊政, 일본의 현 사태 나아가 러시아 동향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의 나이는 30세 내외로 보이며 키는 작고 눈동자는 괴이하다." - 1881년 5월 6일자 <朝野新聞>

이로써 이동인 스님에 대한 추도를 대신할까 합니다. 혹시 기억하십까? 나, 조지 포크가 동료 두 명과 함께 서양인으로서는 최초로 1882년 6월 조선의 부산, 원산을 방문한 뒤 시베리아 탐험을 감행했다는 사실을?


가을에 귀국한 후 나는 미해군도서관으로 발령이 났지요. 그동안 고생했으니 한직 중의 한직에서 쉬라는 배려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좀 의외였지만 차분하게 지난 여행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했지요. 그 내용이 다음 해에 아주 긴 제목을 달고 출판되었답니다.

<Observations upon the KOREAN COAST, JAPANESE-KOREAN PORTS, and SIBERIA made during a journey from THE ASIATIC STATION TO THE UNITED STATES through SIBERIA AND EUROPE, June 3 to September 8, 1882>(한국 해안, 일본-한국 항구 및 시베리아 관찰기,1882.6.3-1882.9.8). 이 내용은 이미 소개했지만 좀 보충하고 싶군요. 우리는 러시아의 동향에 대하여 이렇게 관찰했습니다.
 
"블라디보스톡 항구는 기나긴 겨울 동안 얼음이 얼고 여름에는 안개가 항해의 장애가 된다. 러시아는 많은 돈을 들여 항구를 건설했지만 그곳이 강력한 태평양 함대를 유지하거나, 장기간의 전쟁을 벌일 경우 그 본거지로서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때문에 러시아 정부는 부산이나 원산 혹은 쓰시마 섬과 같은 양항을 한 곳을 노리면서 정세를 예의주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러시아 군함은 한국의 해안 특히 앞서 언급한 부동항을 자주 탐색한 끝에 마침내 1859년 쓰시마를 공략하였다.

러시아는 쓰시마 해안 후미진 곳에 여러 건물을 세웠다. 작은 규모의 러시아 해군 식민지가 들어선 것이다. 얼마 후 쓰시마를 방문한 영국의 제임스 호프 사령관(commander-in-chief, Vice-Admiral Sir James Hope)에 의해 러시아 기지가 발각되자 러시아가 이를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슈펠트가 한미조약 체결 차 인천을 방문했을 때에 중국이 자국의 사절과 군함을 동행시킨 까닭도 한국 동해안의 항구들을 노리고 있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하여 부두에서 많은 중국인, 만주인 그리고 한국인을 짐꾼으로 고용했습니다. 부두 인근에 두 줄로 추레한 건물이 늘어선 재래시장이 있었는데 만주, 중국인, 한국인 그리고 러시아 하층민이 잡동사니를 거래하고 있더군요.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의 인구는 약 6천을 헤아렸습니다. 여러 계층의 러시아인(주로 군인), 많은 만주인, 치푸(오늘날의 옌타이) 출신의 중국인, 한국인 그리고 수천명의 일본인이 혼거하고 있었습니다. 노동계층은 주로 한국인과 중국인이었고 우마차를 몰거나, 땅을 파는 등의 고된 노동은 한국인과 최하층의 중국인 몫이었어요.

우리는 또한 동시베리아의 민족지형도에 대하여 "광대한 지역의 중앙부에 러시인이 거주하고 만주인, 퉁구스족, 한국 유랑민 그리고 골디족(Goldi), 길야크족(Gilyaks), 오로촌족(Orochons) 및 아이노족(Ainos)이라 불리는 원주민이 공존하는 양상을 보여준다"고 기술했습니다.


이상이 당시 관찰한 상황이었지요. 나는 텀험 기록을 마치자 다시 바다로 나가고 싶은 생각에 아시아 함대를 지원했습니다. 1883년 봄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나가사키에 나의 일본인 여자친구가 살고 있었기 때문에 늘 그곳을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서울에 미국 공사관이 열린다는 이야기도 들려왔습니다. 은둔 왕국 조선과 그 사람들이 내게 야릇한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서울에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의 외교사절이 부임한 것은 1883년 5월이었습니다. 그 현장을 잠시 들여다 보겠습니다. 아울러 정체가 아리송한 한 수행원의 소행을 들춰 보려 합니다.  

1883년 5월 13일 저녁에 제물포 근해에 미군 전함 한 척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모노카시Monocacy호로 미국 아시아 함대의 모함이었습니다. 모노카시호는 일찍이 미군이 1871년 강화도를 침략했을 때 참전했던 바로 그 포함이었지요. 그로부터 12년이 흐른 이때에 나타난 미군인은 침략군이 아니라 우호친선의 사절이었습니다.

초대 주한 미국 특명전권 공사로 부임하는 푸트(Licius H. Foote, 福德, 1826-1913)와 그 일행이었지요. 일행의 면면을 보면 공사 부인(Rose F. Foote), 비서 스커더 (Charles Scudder), 스미소니언 미국 국립 박물관 쥬이( P.L.Jouy), 일본인 통역관 사이토薺藤修一郞, 조선인 통역관 윤치호였습니다. 이들이 최초의 미공사관 가족인 셈이군요. 사이토와 윤치호가 통역관이 된 사연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살펴보기로 합니다.
 

ⓒ elements.envato

 
초대 미국 공사의 부임과 관련된 세부사항과 역사적 의의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을 터이므로 여기서 논할 이유는 없겠습니다. 수행원 '쥬이'에 대해서는 한국 내에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은 것 같습니디. 이 사람이야말로 흥미로운 활동을 벌였는데 왜 알려지지 않는지, 왜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는지 모를 일입니다. 한 마디로 수집가이자 유물 사냥꾼이었습니다.

1886년 7월 조선을 떠날 때까지 3여년 동안 그가 한 일은 오직 조선의 동식물 표본과 유물을 수집하는 일이었습니다. 조선에 오기 전에 요코하마에 있었던 그는 푸트 공사가 조선 부임 길에 요코하마를 들른 기회에 접촉하였습니다. 그 결과 '특별 수행원Special attaché'이라는 직함을 얻어 조선에 발을 들인 것이지요.

그는 특히 도자기 수집에 열중했습니다. 1883년 11월부터 2년 반 동안을 부산에 본거지를 두고 수집 활동을 벌였지요. 놀라지 마십시오. 무덤에 꽂혔답니다. 봉분 속에 고려자기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조선인을 통해 그것들을 다량으로 수집한 것입니다. 

나는 1884년 11말부터 12월 초에 부산일대를 여행했는데 쥬이가 찾아와 두 차례 만난 적이 있지요. 그때 겪었던 불쾌한 경험을 나는 여행기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나중에 보기로 하죠.

암튼 조선에서 쥬이의 눈에 가득 들어찼던 것은 묘지였을 겁니다(고려자기 혹은 신라 유물이 들어있는 보물 창고). 그는 귀국하여 이렇게 외쳤으니까요.

"Korea is one vast graveyard!"(한국은 거대한 묘지이다).

19세기 말 묘지에서 빠져 나갔던 유물들이 지금 외국 박물관이나 개인의 저택에서 조용히 한국을 빛내고 있을 겁니다. 나 조지 포크도 물론 조선 문물을 수집하여 보냈습니다. 특히 지도에 매료되었지요. 대동여지도를 보았을 때 느꼈던 충격에 가까운 감동은 좀처럼 잊히지 않습니다. 

빗장이 처음 열린 조선을 서양인들이 접촉했을 때 이런 의문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이곳의 선조들은 이처럼 뛰어난 문화 예술품을 만들 수 있었을까?"
"그렇게 우수한 민족이 지금은 왜 이렇게 쇠락해 버렸을까?"


-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조지 포크 #쥬이 #고려자기 #푸트 #윤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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