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가 노트북 뒤에 남기고 간 카드, 그 속엔

[박도의 치악산 일기] 제6화 어떤 갠 날

등록 2021.04.23 09:46수정 2021.04.23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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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뒤의 카드 ⓒ 박도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인생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인생'이라고 한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의 하나인 <리어왕>은 믿었던 두 큰딸에게 배신당하고 막내딸의 진심을 뒤늦게 깨닫는다는 이야기다.

어린 시절 구미 금오산을 바라보고 자랐던 나는 젊은 날부터 은퇴하기까지 30여 년간 서울 북한산을 날마다 바라보며 한 집에서만 살았다. 늘그막에는 원주 치악산을 병풍처럼 두른 채 내 집이 몇 평짜리인 줄도 모르고 자그마한 아파트에서 '박도글방'이라는 현판을 걸어두고 살고 있다.

흔히들 "청춘은 희망에 살고 백발은 추억에 산다"고 한다. 하지만 이즈음 나는 백발을 지나 삭발로 추억에 젖어 살기보다 이생에서 지은 잘못이 많아 참회와 후회를 되뇌면서 살고 있다. 때때로 내 지나온 인생을 모조리 지우고 싶지만 그래도 한 가지 잘 했다고 자위하는 건 평생 교사 생활을 한 점이다.

1971년부터 2004년까지 꼬박 33년 학교라는 울타리 속에서 줄곧 평교사로 지냈다. 첫해부터 은퇴하던 해까지 주당 20시간 이상 단 한 번의 특혜도 없이 목이 아프도록 수업을 한 못난이였다. 젊은 날 월급을 모아 북한산 기슭에 차도 닿지 않는 곳에다 문패를 달았다.

그 뒤 다른 곳으로 이사할 줄도 모른 채 아파트 청약 한 번 하지 않았다. 지금은 물러나 원주 치악산 밑 한적한 외진 곳 좁은 아파트에 '박도글방'을 차려두고 이 시대에 맞지 않고, 책도 팔리지 않는 빨치산 이야기나 '우리의 소원은 통일' 같은 얘기나 쓰고 있다.


공자님의 말씀을 담은 <논어> 첫 부분이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매우 기쁘지 않겠는가?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왔다면 매우 즐겁지 않겠는가? …"

나에게는 많은 제자들이 있어 이따금 내가 가는 곳마다 그들이 찾아주곤 한다. 이즈음에는 제자들이 지구촌 곳곳에 흩어져 살기에 뉴욕 허드슨 강변에서도, 로스앤젤레스 해변에서도, 워싱턴 D. C. 인근 락빌에서도 초대해 줘서 그때마다 늙은 훈장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그뿐 아니라 일본의 얼음집에서도, 금강산 삼일포에서도 만났다. "요즘도 이런 사제지간이 있느냐?"는 찬사를 일본인도, 북한고위간부도 했다. 
  

뉴욕 허드슨 강변의 제자(신민철 박사)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2004. 2. 15.). ⓒ 박도

 
두 제자의 방문

두 제자가 지난해부터 내 집을 오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코로나19가 방해를 놓아 그만 해를 넘겼다. 올 정초부터 날짜를 서너 번 연기하다가 지난 4월 22일로 잡았다. 그런데 그 전날 생각해 보니 그들은 아직도 현역에 종사하는지라 시간이 많은 내가 서울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문자를 보냈다.

"자네들 내일 원주로 오는 날로 알고 있네. 그런데 시간이 많은 내가 서울로 가면 더 좋지 않을까? 22일 오후 1시쯤이면 서울 어디든지 도착할 수 있네. 같이 오는 친구와 상의 후 연락 주시게."
 

문자를 보낸 즉시 전화가 왔다.

"아닙니다. 오랜만에 강원도 바람도, 신록도, 꽃구경도 할 겁니다."
"알았네."


그런데 왜 전날 저녁에 잠이 오지 않는지? 교사로 부임 첫 담임 배정을 받은 1972년 2월 28일 밤에도 그랬다. 그때 나는 서울 오산중학교 1학년 12반 담임 교사였다. 그 학교는 독립운동가였던 남강 이승훈 선생을 기리고자 삼일절에 개학식과 입학식을 했다. 그 전날 나는 '어떤 학생을 만날까' 하는 설렘으로 잠을 설친 바가 있었다.

이미 교단을 떠난 지 20년이 가까워 오는 늙은 훈장이 잠이 오지 않는 것은 그들에 대한 반가움과 고마움, 그리고 이번이 마지막 만남은 아닐까 하는 그런 마음 때문일 것이다.

22일 새벽 5시 무렵에야 간신히 잠이 들었다. 늦은 취침이었지만 예삿날처럼 7시에 잠에서 깼다. 아침을 먹은 뒤 너절한 내 글방 청소를 하는데 서울서 출발한다는 문자를 받았다. 서둘러 샤워를 하고 이번 만남이 어쩌면 마지막 만남만 같아 정장을 골라 막 입자 벌써 도착했다는 전화다.

서랍장에서 이제는 구닥다리인 무거운 DSLR 카메라를 꺼내들고 밖을 나갔다. 두 제자(장원호 정선영)가 두 손을 번쩍 치켜든 채 달려와 악수도 모자라는 양 포옹까지 했다.

우리 셋은 이전에 내가 안흥마을에 살 때 이웃마을이었던 우천면 용둔막국수 집에서 마음의 점을 찍었다. 그 집은 감자전, 메밀부침, 막국수 등이 별미였다. 이어서 전재고개를 넘어 내가 살았던 안흥 집 글방을 구경시켜준 뒤, 안흥행정자치센터(면사무소) 앞 인흥빵집을 들렀다. 그러자 주인은 옛 안흥찐빵 홍보위원이라고 환대했다. 그는 빵값을 대폭 할인해 줄 뿐 아니라, 군것질도 한 박스 덤으로 안겨줬다. 두 제자에게 한 박스씩 나눠줘, 서울 가족들에게 안흥 방문을 인증케 했다.
  

내 집을 찾아온 두 제자(왼쪽 부터 장원호, 필자, 정선영). ⓒ 박도

 
노트북 뒤의 카드

다음 코스로 치악산 구룡사를 찾은 뒤 올레길을 산책하기로 했다. 그쪽으로 가는데 그제야 간밤에 잠을 자지 못한 후유증으로 눈이 감기고, 하품까지 나왔다. 그래서 내가 이실직고하자 핸들을 잡은 원호군이 말했다.

"댁으로 모시겠습니다."
"고맙네."


집 앞에서 그대로 떠나겠다는 걸 붙잡아 내 글방으로 안내했다. 며칠 전 한 지인이 두고 간 '소청감' 차를 안흥찐빵에 곁들여 대접했다. 제자들은 찻잔을 비우자마자 일어서는데 내 눈이 감기는 것 같아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 그들이 떠난 뒤 한잠 그제야 늘어지게 잔 뒤 두 제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잘 도착하셨는가? 나 한잠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서 문자 보내네. 만나서 반가웠네." 

"쌤~~ 서울 잘 올라왔어요. 맛있는 점심이랑, 찐빵이랑, 진한 차까지 융숭한 대접 받구 왔음다. 늘 젊게 사시는 쌤 너무 멋져요. 사랑함다~~ 노트북 뒤쪽을 봐주시구욤 사랑함다~~"


그 문자를 받고 책상 위에 있는 노트북 뒤를 살피자 카드가 보였다. 그 속에는 고액권 여섯 장이 들어있었다. 곧장 내가 문자를 보내자 이내 답이왔다.

"웬 카드를… 나 자네들 다시 보지 않을 거야."
"선생님, 저희들도 스승님께 작은 정성을 드릴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자의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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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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