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소도 아닌데... 철사로 사람 코를 꿰어 2km 끌고 갔다

한국전쟁기 홍성군 홍성읍 옥암리 민간인 희생사건... 매형 죽게한 처남도

등록 2021.06.12 19:31수정 2021.06.12 19:31
29
원고료로 응원
1950년 10월의 어느날.

"강순애 나와!" 불안감에 얼굴이 벌게진 강순애는 엉거주춤 일어났다. 유치장에 갇혀있던 다른 여성들도 무슨 일인가 싶어 웅성댔다. "빨리 안 나와!"라는 고함에 그녀는 머리를 숙이고 유치장 밖을 나왔다.

"이놈의 ×××가 왜 이렇게 꼼지락거려"라고 벌컥 화를 낸 고 순경(가명)은 강순애의 귀뺨을 때렸다. 강순애가 '흑'하며 쓰러졌다. 고순경은 무슨 일로 화가 났는지 강순애에게 분풀이로 발길질을 해댔다. 잠시 후 상급자가 "야! 뭐 하느라 안 끌고 나와?"하며 화를 냈다. 반이 정신 나간 강순애를 고 순경이 끌고 나오자, 상급자는 "처리해 버려"하고는 돌아섰다.

철사로 코 꿰어 2km 끌고 가
 

철사로 코가 꿰인 강순애가 학살된 서낭당 터 ⓒ 박만순

 
고 순경은 경찰서 밖으로 그녀를 끌고 나왔다. 강순애는 철사로 뒷결박이 된 데다 광목천으로 허리가 단단히 묶인 상태였다. 큰길을 벗어나자 고 순경은 그녀의 복부를 갑자기 주먹으로 때렸다.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은 강순애는 잠시 후 '악'하는 비명과 함께 머리가 깨지는 듯한 고통에 휩싸였다. 코와 얼굴이 너무 아파 꼼짝을 할 수 없었고 고통으로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고 순경은 "빨리 일어나!"라며 다그쳤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아 강순애는 몇 번의 발길질 끝에 간신히 일어났다.

그런데 강순애 얼굴에서 '주르르' 뭔가 흘러내렸다. 다름 아닌 코피였다. 저승사자 같은 고 순경이 철사로 강순애의 코를 뚫어 꿴 것이다. 코와 입에서는 피가 나오고 눈에선 눈물이 쉴새 없이 흘러내렸다. 너무 아파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가자!"며 고 순경이 철삿줄을 잡아당기자 강순애의 코는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강순애는 철삿줄이 잡아끄는 방향으로 끌려갔다. 몸이 자연히 움직였던 것이다.

그녀가 피를 흘리며 소처럼 끌려간 곳은 홍성군 홍성읍 월산리 서낭당 자리였다. 막 코뚜레를 한 소가 주인에게 끌려가는 정황이었다. 아니 그보다 더 처참했다. 경찰서에서 서낭당까지는 2km로, 평소에는 20분이면 갈 수 있는 곳이었는데 강순애는 한 시간이 걸려 갔다. 중간에 몇 차례나 주저앉고 기절하기를 반복했으니 그럴 만했다.

서낭당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이미 사람 모습이 아니었다. 피를 얼마나 흘렸는지 그녀의 온몸은 피로 얼룩졌고 얼굴은 퉁퉁 부어 수박만 했다. 목은 쉬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얼른 죽여주시오'라고 말하고 있었다. 고 순경은 '인간 반 짐승 반' 모습을 한 강순애를 서낭당 앞에 세우고는 카빈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탕' 소리와 함께 그녀의 고통도 끝났다. 


매형을 사지(死地)로 끌고 간 특무상사

1950년 10월 초 충남 홍성군 홍성읍 옥암리는 '인간 사냥터'였다. 북한군이 진주한, 소위 인공 시절 부역행위를 한 혐의를 받은 자들이 홍성경찰서 경찰에 의해 무작위적으로 연행되었다. '증거'라는 말은 사전에나 있었다. 누군가의 밀고만 있으면 물불 가리지 않고 잡아가던 시절이었다.

이 와중에 옥암리 옥골마을의 장동인·동철·동석·동현 4형제도 홍성경찰서에 연행되었다. 경찰서 유치장은 만원 상태였다. 이들이 인공 시절 무슨 특별한 활동을 했는가? 그렇지 않다. 해방 후 4형제는 부지런하게 일을 해 논 10마지기(2000평)와 밭 7000평(23,100㎡)의 농사를 짓는 중농이었다. 거기에 셋째는 금융조합에 다녔으니 마을에선 장래가 촉망되는 집안이었다.

이들 4형제를 포함한 부역혐의자들은 우익 집안 사랑방에 구금돼 매질을 당했다. 결국 동아줄로 묶여 읍내 경찰서까지 끌려갔다. 옆 마을 옥암리 골말에도 초상집 분위기였다. 특히 강덕홍 집안이 그랬다. 강덕홍·맹준수 부부와 강창국·강창현·강창금·강순애 남매와 강순애의 남편 김동욱과 아들 김명열(1946년생) 등 8명이 연행되었다. 고 순경에게 코가 꿰어 끌려가 서낭당 앞에서 죽임을 당한 강순애는 남편과 아들까지 세 식구가 모두 연행됐다.

옥암리의 조철현(가명)도 연행됐다. 인공 시절 특별한 일을 한 게 없는 그는 "피해 있으라"는 주변의 말에도 "내가 뭔 잘못이 있냐?"며 집에 있다가 봉변을 당했다. 이런 상황은 비단 홍성읍 옥암리에서만이 아니었다. 홍성군 전체에서 '빨갱이 사냥'이 펼쳐졌다. 

이 참극의 중심에는 홍성읍 옥암리 출신의 육군 특무상사 천만호(가명)가 있었다. 그는 지역의 의용소방대와 마을에 심어놓은 끄나풀들을 이용해 부역혐의자들을 대거 연행했다. 그 중에는 자신의 매형 조철현도 있었다. 조철현이 홍성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어 있을 때 천만호의 친구가 찾아왔다. "자네, 아무리 그래도 매형을 죽게 할 수는 없잖은가. 매형을 풀어주게" "안돼. 그 양반은 죽어야 돼" 눈에 살기를 띤 특무상사의 극언에 친구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장씨 4형제 중 막내 장동현(18세)은 어리다고 석방되었지만 나머지 형님들과 강덕홍 집안 사람들은 1950년 10월 13일 홍성읍 소향리 '붉은고개'에서 학살되었다. 1950년 10~11월경 홍성군에서 부역혐의로 학살된 이는 최소 630명 이상이었다.
 
a

장동인 형제가 학살된 붉은고개 ⓒ 박만순

  
어머니가 죽기 전 딸에게 남긴 말

조철현의 아내 유씨(가명)는 임종 직전에 딸에게 고백을 했다. "야, 사실 네 아부지(조철현)가 죽은 것은 네 외삼촌(천만호) 때문이여." "엄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놀란 딸이 되묻자 유씨는 말을 이었다. "6.25때 특무상사였던 네 외삼촌이 아부지가 빨갱이 짓을 했다고 경찰서에 잡아 들였잖어. 그라다가 붉은고개에서 죽여 버린겨." 말은 이어졌다. "그걸 네 할아버지, 할머니가 모두 아시는데 내가 어떻게 그 집에서 살겄나."

그랬다. 자신의 남동생 때문에 남편이 죽자, 유씨는 시댁에서 1951년에 나와야 했다. 얼마 후 옆 마을로 개가한 그녀는 명절 때 친정에 왔어도, 단 한 번도 자식들을 찾지 않았다. 큰딸과 아들은 옥암리 시댁에 맡겨 놓고, 막내딸은 개가하는 집으로 데려갔다.

한번도 잊은 적 없는 자식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시부모를 볼 면목이 서지 않았다. 자식을 보면 자기 동생의 악업(惡業)이 생각나 주저앉을 것 같았다. 유씨의 마지막 말을 여동생에게 전해 들은 조씨 남매는 대성통곡했다. 어릴 때 개가한 엄마가 미웠고, 자신들을 한번도 찾아오지 않은 것도 야속하기만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을 알고 나니 엄마가 무척 불쌍해 보였다. 그 때는 어머니 유씨가 세상을 떠난 후였다. 

"제가 왜 책임져야 합니까?"

부역혐의로 한국전쟁 때 죽은 옥암리 옥골마을 4형제 중 첫째였던 아버지 장동인의 아들 장광훈(1947년생, 충남 홍성군 홍성읍 옥암리)은 홍성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생계 전선에 뛰어들었다. 친구 아버지가 하는 이발소에서 기술을 배워 17세에 상경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청계천 헌책방에서 구입한 책으로 이발소 창고에서 독학했다. 하지만 열악한 숙식 상황으로 인해 병이 들어 21세에 귀향했다.

다시 이발소에서 일하다가 손님과의 인연으로 대전KBS 홍성중계소에서 일하게 되었다. 1971년도였다. 학력도 없고 기술도 없었지만, 소개해준 이의 신의와 자신의 성실함만을 믿고 무작정 "해보겠습니다"라고 해 입사했다. 그가 맡은 일은 청원경찰로, 당시 KBS는 국가 기간산업으로 보안대상이었다. 그런데 그놈의 신원조회가 문제였다. "장광훈씨는 도저히 입사할 수 없습니다." "왜요?" "당신 아버지 일 때문에 안 돼요." "아버지가 문제면 문제지, 제가 왜 책임져야 합니까?"

결국 대전KBS 유우열 방송과장이 신원보증을 해줘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매년 분기마다 안기부(국가정보원의 전신), 청와대에서 신원조회를 했는데, 크게 문제 삼지는 않았다. 장광훈은 1998년까지 재직했고, 2021년 현재는 홍성에서 공인중개사로 일하고 있다.

일가 8명이 부역 혐의로 희생된 옥암리 골말 강씨 집안은 어떻게 됐을까. 강종환(1945년생)의 아버지 강창송(1923년생)도 집안 형제들이 홍성경찰서에 연행되었을 때 같이 끌려갔다. 그런데 무학자라는 이유만으로 천만다행으로 풀려났다. 막내 고모 강창군도 부역혐의로 대전경찰서에 구속돼 고초를 겪었다. 그녀는 오랜 기간 경찰의 감시와 신원조회로 고생하다가 지난 2004년에 사망했다. 

현재 강종환은 당진에 살고 있다. 뒤늦게 과거사법을 알게 된 그는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신청서'를 접수했다. 이번에 강종환 집안의 묵은 상처가 치유될 수 있을까?
 
a

증언자 강종환(강순애의 조카) ⓒ 박만순

 
#철사 #서낭당 #특무상사 #붉은고개 #신원조회
댓글29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검찰 급했나...'휴대폰 통째 저장', 엉터리 보도자료 배포
  2. 2 재판부 질문에 당황한 군인...해병대 수사외압 사건의 퍼즐
  3. 3 [단독] 윤석열 장모 "100억 잔고증명 위조, 또 있다" 법정 증언
  4. 4 "명품백 가짜" "파 뿌리 875원" 이수정님 왜 이러세요
  5. 5 '휴대폰 통째 저장' 논란... 2시간도 못간 검찰 해명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