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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관습법에 기댄 위안부 판결, 법관의 자격을 묻는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소송대리인단 변호사가 본 '각하' 판결

등록 2021.04.26 11:57수정 2021.04.26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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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21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유족들이 일본을 상대로 제기한 2차 손해배상 청구 소송 선고공판에 참석한 뒤 법정을 나서며 재판부의 각하 판결에 실망하고 있다. ⓒ 유성호

 
지난 21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국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서울중앙지방법원은 '대한민국 법원은 일본국에 대하여 판결을 할 권한이 없다'는 이유로 원고들의 소를 '각하'하는 판결을 선고했다. '각하' 판결이란, 원고들의 소제기 자체가 위법하므로, 그 청구의 내용을 살펴보지도 않고 판단을 종결한다는 의미이다.

불과 석 달 전인 1월 8일 또 다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일본국에게 손해배상책임이 있다고 선고한 것과 정반대의 결과이다.

대한민국 법원은 일본을 면책시킬 권한이 있는가

21일 판결에서 법원은 '국가(국왕)는 다른 국가의 재판권으로부터 면제된다'라는 소위 '국가면제' 법리가 국제적으로 확립된 관습법이라며 일본을 당사자로 하는 판결을 선고할 권한이 없다고 판단했다. 대한민국의 그 어느 법률이나 국제조약에도 쓰여 있지 않은 불문의 '관습법'을 그 판단 이유로 삼았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평등한 주체로서 인권을 누린다는 국제인권법의 발전으로, 위와 같은 '국가면제' 법리는 현재 국제법 무대에서 그 자리를 잃은지 오래다. 각 국 법원은 자국민의 보호를 내세우며, 불법행위를 자행한 다른 국가를 자국 법정에 세워서 자국민에 대한 책임을 잇달아 물었다.

심지어 일본을 포함한 여러 국가들은 자국 법률에 '자국 영토내에 또는 자국민에 대하여 발생한 살인, 상해 또는 재산상 손해와 같은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국가 면제가 원용되지 않는다'라는 명시적인 조항을 넣어, 타 국가를 자국 법원에 당사자로 세웠다.

국제관습법이란 개별 국가들이 이에 부합하는 일관된 실행과 이를 확립된 법규범으로 받아들이는 법적 확신이 있는 경우에만 인정될 수 있는데, 이와 같은 상반된 실행이 존재하는 경우 더이상 '관습법'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유엔은 1985년 11월 29일 총회에서 '범죄와 권력남용 피해자를 위한 정의의 기본원칙선언'을 채택하여, 기본적인 인권과 자유에 중대한 침해를 당한 사람은 완전한 배상을 구할 권리가 있다는 법원칙을 세웠다. 이와 같은 국제조약 역시 국제법의 법원(法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법원은 현대 국제법에서 이미 실효한 과거의 관습법이라는 것을 가져와 일본을 면책시키고 피해자 인권을 외면했다. 그렇다면 과연 대한민국 법원은 타국가에 의한 자국민의 중대한 인권침해에 대하여 면죄부를 줄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인가.

외교와 정치의 장이 되어버린 법원

지난 21일 재판장 민성철 판사는 선고문을 낭독하며 "이 사건에서 피고(일본)에게 국가 면제를 인정하는 것은, 이미 대한민국과 피고 사이에 이루어진 외교적 합의의 효력을 존중하고, 추가적인 외교적 교섭을 원활하게 하기 위함이지, 일방적으로 원고들에게 불의한 결과를 강요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본 판결을 선고함에 있어 법률상 원고들에게 배상청구권이 존재하는지 여부가 아닌, 단지 외부적 사정에 불과한 대한민국 정부의 외교적 교섭 용이성은 판단이유가 될 수 없음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본 판결은 2015년 12월 28일 한·일 합의로 인해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의 배상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전제 하에, 대한민국 정부는 정당한 '외교적 보호권'을 행사하여 원고들의 권리를 구제하였으므로 본 소송이 원고들에게 최후의 권리구제수단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는 대한민국 정부가 외교적·정치적 수단을 통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에 실패함에 따라 끝내 법원에 이를 소송으로 제기하기에 이른 피해자들의 호소를 완전히 외면한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반인도적 범죄라는 국제사회의 상식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오늘날까지도 '위안부' 제도에 대한 불법성이나 이에 대한 법적 책임을 인정한 적이 없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위와 같은 법원의 현실인식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

2015년 합의라는 것은 그 내용이 기재된 문서조차 존재하지 않는 '정치적 합의'로서 피해자들 그 누구도 위 합의에 참여하지 못하였음은 물론, 피해자들 중 상당수는 위 합의로 인하여 설립된 화해치유재단의 배상금을 거부했고 그와 같은 절차상의 하자로 위 재단이 해산 수순을 밟았음에도, 이는 일본 정부 차원의 사죄와 반성, 배상이라고 판결문에 적은 것이다. 이는 평생을 일본의 사죄와 반성, 배상을 기다리며 절박하게 한·일 정부와 법원에 호소해왔던 피해자들에 대한 모욕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라며 그 독립을 보장했다. 법원은 행정부의 하위기관이 아니다. 정치나 외교의 장은 더더욱 될 수 없다. 현대사회는 이러한 사법기관의 독립에 의해서만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법원은 본 판결이 한·일간 외교적 교섭에 영향을 줄 것을 우려하면서, 법과 원칙에 따른 독립성을 포기한 것이다.

앞서 일본군 '위안부' 사건은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에 의해 자행된 국가 초유의 '사법농단' 사건에서도 등장했다. 당시 법원행정처는 재판부에 한국 법원에 재판권이 없다는 이유로 소송을 각하하거나 개인청구권 소멸을 근거로 기각하는 게 마땅하다는 내용의 시나리오별 보고서를 작성했다는 것이 검찰 조사 결과 밝혀져, 현재 이에 관여한 법관들에 대한 재판은 진행 중에 있다. 국정 초유의 '사법농단' 사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시나리오는 유효한 것일까.

법원은 과연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판결하였는가. 헌법과 법률, 인권보다 정치와 외교가 앞서는 대한민국 사법부에게 사법부의 독립은 여전히 요원해 보인다. 대한민국 법원은 국가폭력과 인권의 역사에 어떠한 판결을 남길 것인가.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전다운 시민기자는 법무법인 지향 변호사이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소송대리인단에 속해 있습니다.
#위안부 #헌법 #사법농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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