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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님이여!" 현충원 사과, 실수가 아닙니다

[주장] 민주당 정치인의 연이은 '사과 참사'... 진짜 '사과'가 필요하다

등록 2021.04.27 10:03수정 2021.04.27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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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 "사과문 쓰는 법"을 검색하면 수많은 게시물이 나온다. 각 게시물마다 표현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게시물에서는 사과문에 나는 누구인지, 언제 어디서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누구에게 피해를 끼쳤는지, 얼마나 반성하고 있는지, 어떻게 이 일을 책임질 계획인지에 대한 내용이 들어가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반대로 절대 들어가지 않아야 하는 것들에는 "오해", "본의 아니게", "그럴 뜻은 없었지만",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등의 책임을 회피하거나 사건을 축소시키는 표현들이 꼽혔다. 사과하는 사람이 "제가 죽일 놈입니다" 등의 자기 비하성 표현을 쓰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사과문 쓰는 법이 매뉴얼화되어 돌아다니는 이유는 그만큼 제대로 사과하는 사람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사과할 일도 많고 사과의 말들도 넘쳐나는 시기이지만 역설적으로 사과는 너무나 부족한 시대이다.

대부분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거나 상대방이 아닌 자신을 위해 사과하기에 사과는 사과가 되지 못한 채 내뱉어진 말이 되어버린다. 우리는 사과의 말속에 남은 것이 상대방에 대한 마음이 아닌 나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는 비난을 면피하기 위한 마음일 때 그것을 '말뿐인 사과'라 부른다.

'현충원 사과'는 사과 아닌 퍼포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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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호중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겸 비상대책위원장이 22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을 방문해 참배를 마친 뒤 방명록을 착성하고 있다. ⓒ 국회사진취재단

 
최근 1년간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말뿐인 사과가 난무했다. 일련의 시간을 거쳐 많은 이들은 형편없는 사과가 피해자에게 상처를 주는 것을 넘어 애써 만들어놓았던 사회적 합의를 무너뜨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말뿐인 사과는 피해 당사자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회에도 해롭게 작용한다.

오거돈 전 부산시장과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이후 정치인들이 쏟아낸 사과들도 그랬다. 법에도 명시된 2차 피해를 유발하는 행위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합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한 사람이 겪은 고통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합의, 모두의 존엄을 위해 끊임없이 성찰해야한다는 합의가 무너졌다.

잘못된 사과문의 전형들처럼 급하게 내뱉은 사과에는 무엇이 문제인지와 어떤 것이 일어났는지, 왜 사과를 하는지, 당 내 2차 가해자들을 제재하고 피해자의 신상이 어떻게 유포되었는지 등 진상규명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는 모두 빠져있었다.


서울시장 보궐선거 후보로 출마했던 박영선 전 장관도 다르지 않았다. 민주당의 귀책사유로 이루어진 선거라는 여론을 의식했는지 급한 사과를 쏟아냈던 그는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사건'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SNS상에 올린 글에는 "모든 것을 짊어지고 갈 것"이라 했지만 정작 그가 책임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도대체 이 모든 사건은 무엇인지, 무엇을 더 하겠다는 것인지 아무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말뿐인 사과'를 넘어 사과 자체가 하나의 쇼가 되는 기이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지난 22일, 부산과 서울시장 선거 모두 재보궐 선거에서 참패한 후 현충원을 찾은 윤호중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은 현충원에서 부산과 서울시장 성추행 사건 피해자들에게 사과하는 '퍼포먼스'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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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호중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겸 비상대책위원장이 22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을 방문해 참배를 마친 뒤 작성한 방명록. ⓒ 국회사진취재단

 
현충탑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던 윤 위원장은 방명록에 "선열들이시여! 국민들이시여! 피해자님이여!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민심을 받들어 민생을 살피겠습니다"라고 적었다. 윤 위원장은 기자들에게 현충원이 피해자들에게 사과의 말씀을 전할 적당한 곳이라는 판단을 했다고 이후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피해자는 곧바로 윤호중 위원장의 사과가 "너무나 모욕적"이라는 입장문을 냈다. 2차 가해자인 민주당 인사들의 사과와 당 차원의 조치를 요청했고, 회신문을 받았음에도 어떠한 조치가 없는 것에 대한 비판의 내용도 담겨 있었다. 피해자에게 윤호중 비상대책위원장의 사과는 사과로 와닿지 못했다.

윤 위원장은 이때까지 피해자에 대해 일언반구 언급도 없다가 재보궐 선거 참패 이후에야 갑자기 피해자에게 엉뚱한 사과를 건넸다. 뒤늦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면 거짓말일 것이고 피해자에게 사과하지 않아서 선거에 참패했다는 분석이 따라왔다면 오히려 솔직한 말일 것이다.

순국선열과 국민, 피해자에게 모두 무엇을 사과하는지 알 수 없이 뭉뚱그린 사과는 여러 의미의 목적을 달성했다. 세 주체에게 동시에 사과함으로써 모든 사과의 내용을 뭉뚱그릴 수 있었다는 점, '성추행 사건'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을 수 있었다는 점, 사과의 표현은 했지만 사과한 것은 아니게 되는 마법같은 효과를 발휘하게 되었다는 점. 이 모든 일이 직접적인 반성과 사과가 부담스러운 윤 위원장이 선택할 수 있었던 '최선'이지만 사회적으로는 '최악', 피해자에게도 '최악'의 사과 방식이었다.

윤 위원장의 사과가 사과라기보다는 하나의 퍼포먼스이자 쇼에 가까웠던 이유는 이와 같았다. 피해자를 치유하기보다는 자신만 스포트라이트 아래에 서서 반성 없이 죄를 씻고자 하는 행위였다.

박원순과 오거돈, 두 지방자치단체장이 저지른 사건이 성추행 사건이라는 것도 짚지 않고, 피해자가 무엇을 호소하고 있는지도 지적하지 않으며, 어떤 것을 하겠다는 의지도 없는 발화만 남은 자리에서 사과는 오히려 화살이 되어 피해자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윤 위원장은 말뿐인 사과로 사과를 했다는 명분과 두 명의 가해자를 '성추행 가해자'로 만들지 않는 정치적 효과를 모두 얻었지만, 피해자는 어떠한 것도 얻지 못했다.

단체장 성폭력 사건 이후 당의 쇄신과 사건의 조사, 재발 방지에 힘써야 했던 민주당 정치인들의 반복적인 '사과 참사'는 어떠한 것도 책임지지 못했다. 사과하는 것을 잘 몰라서 잘못된 사과를 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계산하여 한 잘못된 사과였기 때문이다.

가장 어려운 시간을 보냈던 이들을 외면한 채 손해 보지 않고, 상처받지 않고자 노력했던 시간들은 또 다른 가해를 낳았다. 윤 위원장의 사과가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에 그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윤호중 #박원순 #오거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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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여성 정치에 관한 책 <판을 까는 여자들>과 <집이 아니라 방에 삽니다>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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