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각장애 어린이들이 창조한 니카라과 수화

백지 상태에서 언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관찰하다

등록 2021.05.03 14:42수정 2021.05.03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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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외국어로서의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들을 만난다. 또 가정 내에서 쓰이는 언어가 아주 많은 가족도 접하게 된다. (예를 들어, 엄마의 모어는 한국어, 아빠의 모어는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 일본 유학 중에 만난 둘 사이에서 주로 쓰는 언어는 일본어, 작년까지 독일에서 살던 아이들이 가장 편하게 쓰는 언어는 독일어, 현재 사는 곳은 프랑스어권이라는 식.) 한국어 학생이나 다문화 가정의 한국어를 관찰해보면,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지난 주, 나 할머니 만났어. 선물 할머니 줬어."


여러 언어를 쓰는 가정의 열 살 된 어린이가 나에게 한 말이다. 한국어 학생들의 말투도 비슷하다. 한국어만 주로 쓰는 어린이라면 아마도 '지난 주에 나는 할머니를 만났어요. 선물을 할머니께 드렸어요'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들은 복잡하고 다양한 어미와 조사, 높임법의 특수 어휘 등을 생략하여 핵심 의미 단어 위주로 말하고, 다른 언어를 섞어 쓰기도 한다.

예: 엄친(嚴親)께서는 이만큼씩이나 잡수셨겠더군그려. -> I think 아빠 this much 먹었어.

이렇듯 외국어 화자들의 한국어는 문법 요소를 극도로 줄인 피진어의 특성을 담고 있다. 이러한 언어의 만남이 계속되면 언젠가는 한국어 기반 피진을 쓰는 어린이들에 의해 한국어 기반의 새로운 크레올어가 탄생할 수도 있겠다.

언어의 탄생을 목격할 수 있다?


지난 기사에서 문법 언어의 탄생이 오랜 수수께끼였다는 이야기를 했다. (관련 기사 : 최초의 문법 언어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타임머신을 타고 7만년 전으로 돌아가 문법 언어가 탄생하는 순간을 지켜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린이들에게 문법 언어를 창조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어른이 개입하지 않고 어린이들만 언어가 없는 상태에 두면,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른이 어르고 달래며 양육하지 않고 어린이들끼리 고립, 방치하고서 지켜보는 잔인한 실험을 수행할 수는 없는 일이다. 자, 놀라지 마시라. 그런 비인간적인 실험이 진짜 존재했다. 

13세기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시칠리아, 독일, 예루살렘 국왕이었던 프리드리히 2세. 본인이 여러 언어에 능통했고 다방면에 학문적 관심이 있었다. 이 황제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에게 신이 했던 말(즉, 신이 모든 사물에게 붙여줬을 바로 그 말)을 알아내고 싶어서 실험을 고안했다.

아이들을 신생아 때부터 기존 언어와 격리해서 키우면, 아이가 말문이 트일 만큼 컸을 때 입에서 나오는 말을 보고서 인류의 태생적 언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는 유모들과 양육모들에게 아기들을 먹이고 씻길 수는 있으나 절대로 소리를 내거나 말을 건네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래야 그 아기들이 말하는 언어가 히브리어인지(히브리어가 1순위였다), 그리스어인지, 라틴어인지, 아랍어인지, 아니면 아기를 낳은 부모가 쓰는 언어인지를 알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프리드리히 2세의 실험은 어떤 언어학적 결과도 낳지 못하고 비극으로 끝났다. 아기들은 한 마디 소리를 내기도 전에 모두 죽었다.

그렇다. 이런 실험은 불가능하다. 인류의 모든 문화권은 이미 성숙한 언어를 갖고 있다. 그러니 언어가 없는 상태에서 어린이들에 의해 언어가 탄생하는 현장을 어떻게 관찰할 수 있겠는가? 언어의 탄생이란 희귀한 현상을 목격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니카라과 수화의 탄생 

1970년대 이전에는 니카라과 청각장애인들은 서로 고립되어 각자 집에서 간단한 자체 수화로 가족과 단순한 의사소통만 하고 있었는데, (예: 입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배고픔' 또는 '맛있음'는 뜻) 단순히 동작으로 대상을 대충 지시할 뿐 문법을 갖춘 언어를 배우지 못했다.

이런 상황은 1977년에 청각장애인들의 특수교육 센터가 세워지면서 갑자기 바뀐다. 수백 명의 청각장애 어린이들이 한데 모여 난생 처음 다른 청각장애인을 만났다. 처음에는 스페인어 발성법과 입술을 읽어 말을 이해하는 독순술, 손가락으로 알파벳을 그려서 단어를 표현하는 방법 등을 가르쳤고, 교사들은 수업 중에 제스처를 금지했다.

청각장애인을 스페인어 사용 언중으로 흡수통합하려는 이 교육방법은 성공률이 낮았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스페인어 단어를 충분히 습득하지 못했던 것이다. 대신 이 학생들은 쉬는 시간이나 등하교 시간, 주말에 서로 손짓 몸짓으로 대화했다. 교사들은 이들이 스페인어를 배우는 데 실패해서 원시적인 몸짓을 하는 줄로만 알았다.

1986년 니카라과 교육부 장관이 미국 MIT의 수화전문가 주디 케글(Judy Kegl)을 초빙하였다. 주디 케글은 노엄 촘스키의 보편문법이론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청각장애 학생들이 스스로 언어를 창조하는 환경에 놓여서 매우 풍부하고 정교한 문법을 갖춘 수화를 만들어냈음을 곧 알아보았다.

놀랍게도 교실 밖에서 자기들끼리 의사소통을 시도하면서 학생들이 자기 집에서 썼던 단순한 수화 요소들을 결합하고 통합하여 하나의 체계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수화를 이해하지 못한 교사들의 눈에는 그저 유치한 제스처로만 보였지만 알고 보니 풍성한 어휘와 문법을 갖춘 언어가 탄생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언어가 없던 백지상태에서 새로운 언어가 창조되는 모습을 언어학자들이 실시간으로 관찰할 수 있게 된 건 기적에 가깝다. 어린이들을 언어가 없는 상태에 두고 그들이 언어를 만들어가는지 관찰하는 실험, 일부러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그 실험이 우연히도 실제 진행된 것이다.

처음 청각장애 학교에 온 10대들은 집에서 쓰던 단순한 제스처를 서로 따라하는 수준에 그쳤다. 그런데 10세 이하의 어린이들은 본능적으로 그 제스처들에서 언어적인 규칙성을 추출하려했다.

손을 굴리는 동작은 '구르다'는 의미인가? 손을 아래로 쭉 뻗는 동작은 '내려간다'는 의미인가? 이렇게 규칙성을 찾으려 애썼다. 원래 모든 아기는 규칙을 찾고 피드백을 통해 자기가 창조하는 언어를 모어와 맞춰간다. 

니카라과의 청각장애 어린이들은 세상의 모든 어린이들이 언어를 습득/창조할 때처럼, 자신이 발견한 의미와 규칙성이 맞는지 확인하려 10대 학생들을 쳐다보며 피드백을 구했다. 그런데 니카라과 수화의 경우 피드백을 할 기존 언어가 없었다! 맞춰볼 답안지가 없다면? 빙고! 어린이들이 문법의 빈 자리를 채워 새로운 문법을 창조한다.

연구 결과, 문법을 만들어내는 힘은 10세 이하에게서만 나타났고, 더 어릴수록 그 힘이 더 강했다. 더 어린 아이일수록 복잡한 문형을 자유자재로 쓰며 이 새로운 수화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청소년기부터 니카라과 수화를 접한 1세대들은 문법 언어보다는 제스처에 좀 더 가까운 수화를 구사한다. 

사실 언어를 새로 배우는 능력은 어른이 되어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어린 시절에만 존재하는 것은 언어를 창조하는 능력이다. 타고난 언어 습득 본능으로 모든 어린이는 자신 안에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는데, 대부분의 경우 어린이가 창조한 '나만의 언어'는 모어와 피드백을 하면서 점차 모어와 일치해간다.

만일 여러 언어 사이에서 피진을 접하면서 자라면 어린이가 창조한 언어는 크레올이 된다. 니카라과 수화처럼 허공에서 언어가 탄생하는 희귀한 경우에는 어린이가 창조한 언어가 새로운 언어가 된 것이다.
#제네바 #니카 #청각장애 #니카라과수어 #니카라과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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