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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드모델을 위해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화가, 그 이유가

[서평] 책 '뜻밖의 화가들이 주는 위안'

등록 2021.05.07 12:06수정 2021.05.07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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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1881~1973년)는 평소 "사랑은 인생의 가장 위대한 청량제"이며 "섹스와 예술은 같은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고 하죠. 피카소는 미성년자, 그리고 수많은 여성과 동시에 관계를 맺거나, 이들을 '뮤즈'라는 미명으로 제멋대로 갈아치우는 등 여성 편력으로 유명하죠. 실제로 피카소의 작품에 수많은 여인이 창조력의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고 평가되고 있고요.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혹은 자기합리화 아니었을까요?

피카소는 여성들이 자신의 자식을 낳은 것을 알고도 거두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위대한 예술가로 칭송받지만, 인간적인 측면에선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그런 삶을 살았던 겁니다. 아래는 피카소처럼 예술이라는 미명으로 여성들의 인권을 짓밟는 것을 당연시하는 사람들이나 그런 사회를 비판하는 의미를 담은, <포즈가 끝난 후에>라는 작품입니다.


그가 예의를 다 하는 방식 
 

리하트트 베르그, <포즈가 끝난 후에>, 1884년, 캔버스에 유채, 200X145cm, 말뫼미술관 ⓒ 출판사제공

 
이 그림은 1884년 파리의 살롱전에 전시되면서 사람들에게 처음 소개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파리와 스웨덴의 미술비평가들을 당황하게 한 작품이라고 해요. 그럴 수밖에요. 언뜻 사랑하는 그녀에게 바이올린 연주를 해주는 남자와 그런 남자에게 감동한 여성을 그린 것 같지만, 실은 화가와 누드모델 사이에 벌어지는 수많은 일을 이야기하는 그림이기 때문입니다.

그림 속 여성은 누드모델입니다. 그것이 일 때문일지라도 알몸을, 그리고 은밀한 곳까지 남에게 보여야만 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겠지요. 더욱이 그림이 그려진 1884년 무렵은 여성 인권이 전혀 보호되지 않던 때였습니다. 당시 여성의 참정권이 없는 나라도 많았으니까요. 그럼에도 누드모델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돈'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화가의 화실에선 종종 문제적인 일이 발생하곤 했다고 합니다. 누드모델을 앞에 두고 그림을 그리면서 감정이 생겨 사랑으로 이어지고 결혼까지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스캔들로 끝나거나 강압적인 관계로 발전하는 일이 훨씬 더 많았다고 해요. 뻔뻔하게도 '예술적 영'감 혹은 '창조력의 원천' 운운하며 미화되거나 합리화되기도 하면서 말이죠.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스웨덴 출신의 '리하르트 베르그(1858~1919년)'입니다. 베르그는 그런 시대 상황에서도 모델에 대한 예의를 다했습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 긴장했을 모델을 위하여, 작업이 끝난 후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옷을 입고 긴장을 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색한 분위기를 전환시키기 위해 몸소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는 것이죠. 모델은 자신에게 시선을 두지 않고 묵묵히 바이올린을 켜는 화가를 보며 감동에 젖은 듯합니다. 이 그림에서 예술을 완성하기 위해 화가와 모델은 공생관계이지 상하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화가는 몸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화가의 배려하는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도 있다면 가끔 뉴스에 나오는 수많은 성추행 사건도 없을 것이고, 미투 운동도 줄지 않았을까요. - <뜻밖의 화가들이 주는 위안> 222쪽

말하자면 이 그림은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그릇된 욕망으로 모델들을 농락하는 화가들과 당연시되거나 만연하는 사회에 "모델은 그림을 위한 소품이 아니다. 당신들의 작품을 도와주는 협력자이다. 그러니 예의를 갖춰 정중하게 대해야 한다"고 비판하는 동시에 경고하는 그런 그림인 것입니다.

화가들은 물론 화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눈감거나, 예술성과 연결해 미화하는 것으로 협력자가 되었던 미술비평가들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요.
 

<뜻밖의 화가들이 주는 위안> 책표지. 책에 의하면 그림 속 여성은 국소성 긴장 이상증을 앓고 있다. ⓒ 푸른길

 
뭐든 알고 볼 때와 그렇지 않고 볼 때의 느낌이나 의미는 많이 다른데요. 창작자의 주관성이 강한 예술작품들은 작품이 나온 배경이나 작가의 삶을 알고 접하면 이해도 훨씬 쉽고 특별하게 와 닿기도 하죠. 그림은 특히 더 그렇고요. 그래서 명화를 설명하는 책들이 꾸준히 출간되어 여간 반가운 게 아닙니다.

그런데 종종 아쉬움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간 읽은 명화 관련 책 대부분 이미 많이 알려진 그림이나, 반 고흐, 모네, 피카소, 렘브란트 등처럼 유명한 화가들이 위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그림에 초점을 맞춘 책들이 대부분입니다.


물론 같은 대상을 두고 사람마다 시각과 느낌이 다른 만큼 얻어지는 것들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보다 많은 그림들과 그 주변을 알고 싶은 호기심을 충족하기에는 아무래도 아쉽더라고요. 책 <뜻밖의 화가들이 주는 위안>은 같은 아쉬움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흥미로운 책이 될 것 같습니다.

세계적으로는 유명하지만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화가와 대표적인 그림, 유명한 화가의 알려지지 않은 그림,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분야의 그림이나 사회적 어떤 전환점이 된 그림 등 의미 남다른 화가와 작품들을 색다른 시선으로 소개하고 있어서입니다.

우리가 몰랐던 회화의 세계

우리에게 유명한 화가들 대부분 서양미술의 주류인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스페인 화가들인데요. 책은 리하르트 베르그처럼 우리에게는 다소 낯선 동유럽이나 북유럽, 그리고 남미의 화가들을 주로 소개한답니다. 책에서 만난 화가들 중 그래도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화가는 발레리나 그림이나 <14세의 어린 댄서>란 조각상으로 유명한 에드가 드가(1834~1917)정도이니 어떤 책인지 충분히 짐작되지요?

그동안 미술 관련 책들에서 거의 다루지 않은 화가들과 그림들을 주로 다루기 때문인지, 이 책을 읽을 땐 어떤 사실을 처음 알 때 느끼는 신선한 감동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책 덕분에 처음 알게 됐습니다, 종군화가들이 있었다는 것을. 그들은 카메라가 보편화 되기 전 전쟁 현장에서 전쟁을 기록했다는 것을요.

인상 깊게 와 닿은 전쟁 그림 중 하나는 러시아의 '바실리 베레샤긴(1842~1904년)'의 <중단된 편지>라는 제목의, 4장으로 된 연작 그림입니다. 필리핀 독립전쟁 당시 전쟁에 투입된 한 미군 병사가 필리핀의 어느 야전병원에서 간호사에게 자신을 대신에 고향의 어머니께 편지를 써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몇 줄밖에 적지 못할 정도로 짧은 문장을 말하다, 중상의 고통으로 죽고 마는 상황을 그림에 담았는데요. 영화 <장사리 : 잊혀진 영웅들> 속 한 어린 병사가 어머니께 쓴 편지를 누군가 대신 전해주길 바라며 손에 쥐고 죽은 장면이 떠올라 울컥했습니다.

일부 사람들의 허황되고 그릇된 욕망에서 비롯된 전쟁은 이처럼 무고한 생명들을 죽이는 인류 최대의 악입니다. 전쟁 그림의 대가인 베레샤긴은 단순한 종군화가가 아니랍니다. 그는 러일전쟁 중 러시아 함대에서 일본의 공격으로 전사했는데, 죽기 몇 년 전인 1901년에 노벨평화상 첫 후보자로 지명될 정도로 전쟁의 비극과 폐해를 알린 반전화가로도 당시 유명했다고요.
 

토마스 에킨스, <애그뉴 박사의 클리닉>,1889년, 캔버스에 유채, 2142X300.1cm, 필라델피아 미술관(펜실베니아주) 책에 의하면 '수술을 할 때 수술복을 입어야 한다는 규정을 만들게 한 작품이 되었다'이다. ⓒ 출판사제공

레옹 리르미트, <너무 짜!>,1882년,캔버스에 유채, 215X272cm, 오르세 미술관(파리) ⓒ 출판사 제공

 
이외에도 과거의 의료현실을 아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되는 여러 편의 수술실 현장 그림, 결핵으로 죽어가는 사람들 모습을 담은 그림, 여러 유형의 정신질환자들 초상, 성매매로까지 이어지던 발레리나의 현실을 그린 그림, 고난을 지혜로 극복한 그림 등. 처음 접하는 그림들이 많아 책을 읽는 내내 뭔가를 알아가는 게 유독 많았습니다.

​​​​​​코로나19로 일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이 책은 미술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미술에 대한 사랑으로 지난날 수많은 미술관을 찾아다니며 만난 작품들을 바탕으로 대중적인 글쓰기를 해온 두 사람(김규봉, 박광혁)이 썼습니다.

코로나 장기화로 예전처럼 미술관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림을 통한 코로나 극복과 치유, 그리고 위로를 전하고자의 취지로 출발했다고 합니다. 이런 취지가 많은 사람에게 가 닿아, 삶의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얹어봅니다.

뜻밖의 화가들이 주는 위안 - 힘을 주는 명화

김규봉, 박광혁 (지은이),
푸른길, 2021


#뜻밖의 화가들이 주는 위안 #박광혁(저자) #김규봉(저자) #미술 관련 책 #푸른길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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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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