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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남'만 있나? 진보 노인을 자처한 58년 개띠 남자

정년 퇴직한 전 기자 이필재가 책 '진보적 노인'을 쓴 이유

등록 2021.05.08 14:53수정 2021.05.08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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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진보적 노인'을 자처하는 사람이 있다. '진보'와 '노인'이라는 두 단어의 역설적 조합이 호기심을 자아내는가. 하지만 이 작가의 프로필을 보면 신선함은 의구심으로 바뀔지 모른다.

<진보적 노인>의 저자 이필재는 대한민국 남성, 58년 개띠, '서울 촌놈'으로 62년을 서울에 살다 작년 경기도 별내에 정착했다. 서울고를 나와 연세대에서 언론학 학사와 석사를 졸업하고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 언론사에 입사해 기자로 복무하다 2013년 쉰다섯에 정년퇴직했으며 기독교인이다.


나는 이런 분이 어쩌다가, 어쩌자고 자칭 "진보적 노인"이 되었는지 궁금해져 버렸다. 묻고 싶었다. "어르신, 아니지... 요즘 60대 초반의 사람을 '노인'이라 칭하기엔 영 어색하다. 선생님, 도대체 왜요?"

"가슴이 하는 소리를 외면하지 않고 싶어서""

《진보적 노인》이필재 지음(2021) ⓒ 몽스북

 
평생 언론인으로 살아온 저자는 어느 날 SNS에 '진보' 커밍아웃을 한다. 태극기 들고 광화문 광장에 나가지는 않더라도 대체로 보수 지향인 친구들과의 단톡방이나 SNS 혹은 정치를 주제로 한 대화에서 늘 반대 진영 친구들의 농담 혹은 조롱에 부딪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나이 먹어 머리가 잘 돌아가지도 않지만, 안 돌아가는 머리 굴리느라 '가슴이 하는 소리'를 외면하지 않기로 했다"고 말한다.

영국의 정치인 윈스턴 처칠의 명언, "젊어서 진보가 아니면 가슴이 없는 사람이고, 나이 먹어 보수가 안 되면 머리가 없는 사람이다"를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나로서는 저자의 이런 행동이 쉽게 이해되지는 않았다.

그 역시 나이 든 세대 가운데 당당하게 자신이 진보임을 밝힐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의문을 던진다. 그러면서도 '진보적 노인'은 일종의 '소수자'이지만 그렇다고 약자로 찌그러져 있으라는 법은 없다며 여성 차별과 성 소수자 문제 등 다양한 사회 문제를 다루면서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또 한국전쟁 참전 용사였던 아흔의 아버지를 모시고 살며 느끼는 바, '끝난 사람'이 아니라 현역으로, '신발을 신은 채 죽고 싶다'는 희망을 품고 사는 이가 '어떻게 나이 들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성찰도 책 곳곳에 담겨 있다.


책을 읽으면서, 읽기 전 품었던 '도대체 저자는 왜?'라는 의문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면 '진보적 노인'은커녕 당연한 것만 같았던 '진보적 젊은이'조차 점차 찾아보기 힘들어진 게 사실이다. '이대남(이십대 남자)'이니 '이대녀(이십대 여자)'니 하며 갈등을 조장하고 사회를 분열시키는 모습들도 볼 수 있다.

결국 매력적이지 않으면, 실익이 없으면 저자가 부르짖는 노인의 진보적 가치관이란 것도 그저 외로운 한 사람의 외침에 그치지 않을까, 우려 섞인 회의가 들기도 했다. 저자는 어떨까. 어쩌면 그는 우리 사회에서 자신과 연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찾지 않았을까? 하여 저자에게 직접 물어봤다.

"소박한 '방종과 탕진'을 목표로 하는 '방탕중년단'을 자처합니다만, 같이 나이 들어가는 동시대인, 시니어들이 성찰과 학습(특히 독서)을 하기 바랐습니다. 이 나라 60대 이상은 정치적으로는 보수로 기울어진 운동장입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이전 세대, 그래서 반공보수일 수밖에 없는 세대도 아닌데 말이죠.

제가 '진보적 노인'을 자처했지만 노인들이 진보 일색이기를 바라는 건 아닙니다. 사실 그러길 기대할 수도 없고, 그것이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저와 같은 베이비부머들이 보수와 진보 사이의 균형점을 찾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50·60세대가 정치적으로 균형을 이룰 때 정치권도 이들 세대에 귀를 기울일 것으로 봅니다. '이대남'뿐 아니라요."


진보적 노인의 성장기

'진보적 노인'이라는 말에서는 어쩐지 '미래'와 '희망'의 '재질'이 느껴진다. '진보적 노인'이 꿈꾸는, 희망하는 미래는 어떤 것일까?

"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며 노인들은 꿈을 꾸고 청년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 그레타 툰베리 같은 미래 세대가 기후 재앙을 예언합니다. 장혜영 정의당 의원 같은 청년들이 편견과 차별 없는 세상을 보여줍니다. 노인들은 그런 사회를 꿈꿔야 합니다. 내 손주든 남의 손주든, 손주 세대가 그런 세상에 살기를 바라야 합니다. 선거 때도 그런 세상이 되도록 투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보적 노인>에는 스스로를 "딸깍발이 기자"로 칭하며 평생을 언론인으로 살아온 저자가 과거 언론사 재직 시설 겪은 생생한 현대사가 녹아 있다. 더불어 보수 언론사에서 '본 투 비 반골', '지독한 원칙주의자'로서 결코 순탄치 않았을 그의 분투기 또한 담겨 있다. 이왕 저자를 인터뷰하는 김에 시민기자의 사심을 담아 그가 생각하는 기자란 무엇인가도 물어봤다.

"기자는 진실에 복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부, 거대 자본 등 모든 권력은 거짓말을 합니다. 책에서도 과거 언론사 재직 시절 후배가 쓴 기사 사례('자크 로게-청와대-김운용 위험한 3각 빅딜')를 소개했지만 기자는 이들 권력과 유착되지 않고 거짓을 밝혀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기자 출신 언론학자 고 리영희 선생이 '기자는 기본적으로 좌파여야 한다'고 했는데 기자는 약자 편에 서야 한다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언론이 사회의 어두운 면을 다루는 건 이 사회를 밝히기 위해서일 때만 정당화된다는 생각입니다. 또 강준만 교수가 얼마 전 기자의 덕목으로 신뢰, 실력과 더불어 겸손을 꼽았고 대학교수들이 제대로 못 하는 공공지식인의 역할을 기자들이 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 의견에 공감합니다."


<88만원 세대>의 저자 우석훈 교수는 이 책의 추천사를 통해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진보 노인 버전'을 보는 것 같았다. 늙어서 세상을 다시 만나게 되는 또 다른 성장기! 마음이 풋풋해졌다"라고 말했다.

30대인 나 역시 처음엔 호기심 반, '도대체 왜?'라는 의문 반으로 시작한 독서였지만, 책을 덮으면서는 어떤 노인으로 나이 들 것인가에 대해 처음으로 아주 구체적이면서도 희망적으로 그려보는 계기가 되었다. 
#진보적노인 #이필재 #몽스북 #에세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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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든 사람이든 평가보다 그만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데 애정을 쏟습니다. 책방 둘러보기를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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