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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자유민권운동단체인 독립협회 참여

[[김삼웅의 인물열전] 독립운동의 선구 예관 신규식 평전 / 6회] 그는 종래의 봉건군주체제의 신민(臣民)의식에서 탈피하게 되었다

등록 2021.05.08 16:18수정 2021.05.08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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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협회 창립총회 터. 서울 광화문광장 북쪽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자리다. ⓒ 김종성

 
그가 관립한어학교 3년을 마쳤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학교 학감의 부정을 비판하는 동맹 휴학을 주동하여 졸업을 하지 못했다는 것과, 1888년 후반에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적극 참여하느라 스스로 그만두었을 것이라 한다. 

신규식은 역사상 최초로 서재필의 주도로 조직된 자유민권운동 단체인 독립협회와 근대적인 시민운동의 효시인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여 열렬히 활동하였다. 이승훈ㆍ허위 등 당시 명사들과 나란히 재무부과장 등 부장급으로 활동한 것이다. 

여기에 참여하면서 그는 종래의 봉건군주체제의 신민(臣民)의식에서 탈피하게 되었다.

"예관은 여기서 문중청년인 신흥우, 신채호와 뜻을 같이하여 활동하는 한편 후일 함께 국권회복운동에 종사케 되는 나철, 이승만, 안창호, 양전백, 이승훈, 이동휘, 박은식 등과도 친분을 맺게 되었을 것이다. 만민공동회의 자유민권운동에의 참여활동으로 인해 그가 관립한어학교를 정식으로 졸업하여 출사할 수 없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주석 1)


그가 종래의 군주제에서 이념적ㆍ사상적으로 탈각하게 된 독립협회는 1896년 7월 2일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사회정치단체로 창립되었다. 독립협회는 '독립협회 규칙'을 제정하고 임원을 선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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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공원에 있는 서재필 동상, 독립협회 주도 인물 중 하나. 미국으로 밀항하여 가장 성공한 동양인 젊은이가 되었고, 이름도 필립 제이슨으로 바꾸었다. 죽을 때까지 미국인으로 살았다. 독립공원에 있는 서재필 동상, 독립협회 주도 인물 중 하나. 미국으로 밀항하여 가장 성공한 동양인 젊은이가 되었고, 이름도 필립 제이슨으로 바꾸었다. 죽을 때까지 미국인으로 살았다. ⓒ 신병철

 
회장 안경수, 위원장 이완용, 위원에는 김가진ㆍ김종한ㆍ민상호ㆍ이채연ㆍ권재형ㆍ현흥택ㆍ이상재ㆍ이근호, 감사원 송현빈ㆍ남궁석ㆍ오세창 등 10명이 선임되었다. 서재필은 국적이 미국으로 되어 있어서 간부나 회원이 되지 않고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독립협회는 첫 사업으로 독립문과 독립관, 독립공원의 건립을 확정하고 각계의 지원과 회원가입을 호소하는 「독립협회 윤고(輪告)」를 채택하였다. 독립협회는 몇 갈래 세력이 연대하여 조직되었다. 온건개화파인 건양협회세력, 주로 외교계 관료들로 구성된 정동구락부 세력, 이 두 세력에 가담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독립개화정책을 지지하던 독립파 관료세력이다.

"독립협회는 이상의 3개의 흐름의 세력을 모아서 창립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위의 세 흐름의 세력과 독립협회와의 관계는 창립당시의 발족 위원들에 한정된 것이지 그 이후의 독립협회 조직의 발전과는 별개의 것임을 주의해 둘 필요가 있다." (주석 2)



독립협회의 목표는 일차적으로 독립문ㆍ독립공원ㆍ독립관의 건립 등 창립사업에 주력했지만, 기본적으로는 국민계몽ㆍ민력조성ㆍ민력단합을 통한 자주국권에 의한 근대적인 독립국가의 건설이었다. 이를 위해 민주주의사상, 자강개혁에 의한 문명국가를 세우고자하는 근대화운동의 추진에 목표를 두었다.

독립협회를 주도한 주요 회원들의 사상적 계보와 인적 계보를 보면 독립협회의 조직이 연합운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중에서도 가장 뚜렷한 두 개의 흐름은 ① 서구시민사상을 도입하여 그 영향을 크게 받은 세력이고, ② 다른 하나는 개신유학적 전통을 배경으로 동도서기파에서 한 단계 더 발전한 국내사상의 성장의 흐름이다. 이밖에 위정척사파와 동학과 기독교의 영향도 있으며, 인적 계보로 볼 때에는 신지식층 이외에 시민층ㆍ농민층ㆍ노동자층 및 해방된 천인층 등이 직접 대표위원으로 선출되어 주도회원이 되기도 하고, 이동휘 등 개화파 무관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주도회원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은 당시에 새로이 성장하고 있던 신지식층이며 박은식이 지적한 바와 같이 독립협회는 '유식한 신사의 조직'이었다. (주석 3)

독립협회는 한 때 회원수가 2,000명을 돌파하였으며 여러 지역에 지회를 설치할만틈 세력이 확대되었다. 주요 활동은 ① 애국계몽운동 ② 국권수호운동 ③ 국토수호운동 ④ 국가이권수호운동 ⑤ 인권신장운동 ⑥ 개화내각 수립운동 ⑦ 국민참정권 운동 ⑧ 정치개혁운동 등을 꼽을 수 있다. 독립협회는 개화시기의 대표적인 시민사회단체로서 민주공화주의사상을 처음으로 제기하였다.

독립협회가 창립되어 자주독립 정신이 강화되고 있을 때인 1897년 2월 20일 고종이 '아관파천'의 수모를 끝내고 환궁하여 같은 해 10월 12일 백성들의 상소에 따르는 형식으로 새로 지은 환구단에 나아가 이른바 '광무개혁'을 선언하였다.

고종은 조선이 청나라의 제후국과 같은 위치에서 벗어나 자주독립국임을 내외에 선포하면서, 국호를 대한제국, 청나라의 연호를 버리고 독자적으로 광무라는 연호를 사용하고, 임금의 칭호도 황제로 격상하는 건원칭제의 칙령을 발표하였다. 

광무개혁은 황제권과 자위군대의 강화에 역점을 두었다. 그동안 독립협회에서 줄기차게 주창해온 국가개혁에는 크게 미치지 못한 채 자신의 통치권  강화에만 비중을 둠으로써 시대정신에 따르지 못한다는 비판을 불러왔다.
  

독립문 바로 앞에 있는 영은문 주초. 서울시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다. 현재는 영은문 전체가 남아 있지 않고 그 일부인 주초만 남아 있다. 사진 왼쪽 하단의 비석에 ‘영은문 주초’라고 쓰여 있다. 영은문은 처음에는 명나라 사신에 대한 환영의 뜻으로 세운 문이다. 나중에 인조정권과 그 후계자들은 청나라 사신에 대한 환영의 뜻으로 이 문을 활용했다. ⓒ 김종성

 
이즈음에 독립협회는 자주독립국가의 결의를 다지고 위상을 강화하는 상징물로서 독립문을 세우기로 하였다. 이는 독립협회의 주요 목적사업이 되었다. 전통적으로 청국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이 헐린 장소인 서대문구 현저동에 독립문을 세우기로 하여 고종황제의 동의를 받았다. 1896년 11월 21일 정초식을 거행하여 1년 뒤인 1897년 11월 20일 완공을 보았다. 

처음에는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모방하여 독립문을 짓고자 하였으나 예산과 기술이 이에 미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화강석으로 쌓은 구조물은 중앙에 홍예문이 있고 내부 왼쪽에 정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으며, 정상에는 돌난간이 둘러져 있다.

홍예문의 이맛돌에는 조선왕조의 상징인 이화문장(李花紋章)이 새겨져 있고 그 위의 앞뒤 현판석에는 각각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이라는 글씨와 그 좌우에 태극기가 새겨져 있다. (주석 4)


'독립문'이라는 현판 글씨는 그동안 이완용이 썼다는 주장이었으나 근래에는 당대의 명필이었던 김가진의 작품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현존하는 독립문은 사적 제33호로 지정되고, 박정희 정부가 1979년 7월 성산대로 공사를 하면서 원위치에서 서북쪽으로 70m 떨어진 지점으로 옮겨 오늘에 이른다. 독재정권은 자주독립의 상징물인 독립문의 위치까지 옮기는 만용을 서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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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문 앞에 중국 사신들을 맞이하던 영은문(사진 아래)의 주춧돌이 서있다. ⓒ 김종성. 자료사진

 
독립문이 건립되었을 때 『독립신문』에는 이를 경축하는 '독자투고'가 실렸다. 백성들이 좋아했던 일면을 보여준다. 내용 중에 '연주문'은 영은문의 별칭이다. 

 양성 김석하 독립문가

 우리 조선신민들은 독립가를 들어보오
 병자지수 설치하고 자주독립 좋을시고 
 독립문을 지은 후에 독립가를 불러보세
 우리 조선신민들은 진충보국 하여보세
 우리 성주 유덕하여 자주독립 좋을시고
 연주문을 쇄파하고 독립문이 높아지네
 우리 성주 수만세요 우리 창생 화합이라
 오백년래 좋은 일은 독립문이 좋을시고. (주석 5)


주석
1> 강영심, 앞의 책, 27쪽.
2> 신용하, 『독립협회연구』, 84쪽, 일조각, 1976.
3> 앞의 책, 104~105쪽.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7)』, 62쪽. 
5> 『독립신문』, 1896년 7월 16일치.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독립운동의 선구 예관 신규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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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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