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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날 천릿길 떨어진 묘지를 홀로 다녀온 이유

[아이들은 나의 스승] '제2의 5·18 묘지'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 추모 방문기

등록 2021.05.09 20:43수정 2021.05.09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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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심란하거나 위로받고 싶을 때, 나는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찾는다. 자동차로 채 10분도 걸리지 않을 만큼 가까워, 평소에도 동네 마실 가듯 다녀오곤 한다. 앉아 쉴 수 있는 벤치도 곳곳에 마련돼 있어서, 주말이나 휴일 가족 나들이에도 이만한 장소는 없지 않나 싶다.

사람 많은 주말과 휴일이나 평일 퇴근길에는 문안 인사하듯 휙 둘러보고 나오지만, 여유가 있을 땐 누군가의 무덤가에 앉아 한참을 '멍 때리곤' 한다. 좀 이상하게 들릴 테지만, 내가 질문을 하면 무덤은 늘 듣고 싶은 대답을 건넨다. '말하지 않는 것과의 대화'인 셈이다.

묘역을 거닐다 갑자기 묻고 싶은 내용이 떠오르는 건, 묘비에 새겨진 글귀 때문이다. 사실 난 묘비에 적혀 있는 사연을 만나 위로를 받고 힘을 얻는다. 유가족이 쓴 비통한 심정도, 동지들이 남긴 헌사도, 하다못해 잠든 이의 그 짧은 생몰년도 적지 않은 울림을 준다.

무덤가에 앉아 있는 내 모습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묻힌 이의 유가족인 줄로 알 거다. 유가족이기는커녕, 사실 묘역에 잠들어 있는 그 많은 이들 중에 내가 안다고 할 수 있는 분은 몇 안 된다. 묘비를 읽고 무덤가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우린 동지가 되고 가족이 된다.

지난 6일엔 큰맘 먹고 경기도 남양주 모란공원 묘지를 다녀왔다. 지도를 열어 보니 얼추 천릿길이다. 쉬지 않고 내달려도 족히 다섯 시간은 걸리는 거리다. 이 와중에 사람들로 북적일 주말이나 휴일에 찾아가긴 어려워 부러 평일에 날을 잡았다. 당일은 개교기념일이었다.

대학 재학 시절에는 과나 동아리에서 이따금 찾곤 했는데, 지방에 내려와 산 뒤로는 해외보다 가기 힘든 곳이 됐다. 부끄럽지만,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김근태 전 의원이 돌아가셨을 때 찾아간 게 최근이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그곳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젊은 시절 그곳은 불의한 권력에 대한 분노로 가슴에 불을 지르고 저항 정신을 담금질한, 말 그대로 민주화의 성지였다. 그곳에서 선후배들과 함께 팔뚝질하며 노래를 부르노라면 죽음조차 겁나지 않았다. 그것은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겠다는 그들과의 약속이자 다짐이었다.


'제2의 5·18 묘지'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 입구에 설치된 '오월 걸상'의 모습. 찾는 발길이 뜸해선지 먼지가 수북이 쌓여있다. ⓒ 서부원

 
불요불급한 여행을 삼가라는 공문까지 내려온 터라, 선뜻 길을 나서기 조심스러웠다. 스스로 몇 가지 조건을 달아 전날 학교장께 승낙을 얻어냈다. 당일치기로 다녀올 것과 도시락, 간식을 따로 챙겨 차 안에서 먹을 것. 이는 현지 주민들과의 접촉을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번잡한 고속도로 휴게소도 피하고, 한산한 졸음 쉼터를 이용했다. 차가 여러 대 세워져 있는 곳이라면 그마저도 피했다. 화장실을 자주 찾게 될까 싶어 운전하는 내내 커피는 물론 물조차 마시지 않았다. 하이패스 덕에 통행료 징수원과 얼굴을 마주할 일조차 없었다.

경기도에 들어서자 평일이었는데도 도로는 주차장을 방불케 했다. 내비게이션은 도로 상황을 반영해 수시로 다른 길을 안내했지만, 익숙하지 않은 길을 따라가는 게 더 곤욕이었다. 국도인지 고속도로인지 알 수 없는 길을 헤매다 예정보다 두 시간이 더 걸려 간신히 도착했다.

가는 내내 도로를 깔고 아파트를 세우는 등 곳곳이 공사 중이었지만, 모란공원 묘지는 10년 전 모습 그대로였다. 관리사무소 너머 안쪽이야 지금껏 가본 적이 없으니 얼마나 변했는지 알 길 없지만, 적어도 입구의 민족민주열사 묘역만큼은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난 10년 동안 이곳에 모셔진 분들의 무덤 말고 달라진 게 있다면, 묘역 입구에 설치한 '오월 걸상'이 전부인 성싶다. '오월 걸상'은 5·18 정신을 계승하고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세운 상징적 조형물이다. 2018년 목포와 부산, 2019년 명동성당 앞에 세워졌으며, 지난해 5·18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경기도에서 도청과 이곳 모란공원 묘지에 설치했다.

사실 5·18과 모란공원 묘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문익환 목사와 박용길 장로 부부, 박종철 열사, 김근태 전 의원을 비롯해 최근의 노회찬 전 의원과 백기완 선생에 이르기까지 5·18 진상규명을 위해 헌신했던 분들이 영면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을 '제2의 5·18 묘지'로 부르는 까닭이다.

이곳은 사설 공원묘지 내 일부로, 여느 국립묘지처럼 봉분이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지 않다. 이곳에 묻힌 이들 모두가 민주화운동에 관련된 것도 아니다. 멸사봉공의 삶을 살다 간 분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다 보니 자연스레 민족민주열사 묘역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나는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지
 

노회찬 전 의원의 묘소. 다른 곳과는 달리 봉분 대신 덮개돌을 얹었다. 놓여있는 꽃이 시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직도 그를 잊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 서부원

 
사람들은 이곳에 오면 문안 인사하듯 묘역 전체를 둘러보게 된다. 나 역시 당장은 노회찬 전 의원과 백기완 선생의 묘소에 술 한 잔 따라드리고 싶어 왔지만, 두 분만 뵙고 발길을 돌릴 순 없다. 내게 절할 시간에 옆에 누운 동지의 삶에 귀 기울이라고 등 떠미는 것만 같아서다.

언뜻 묘역이 무질서하게 보여도 추모를 위해 닦아놓은 동선은 있다. 묘역 주위에 둘러쳐진 울타리 곳곳에 틈이 있어 어디로든 들어갈 순 있지만, 대개는 계훈제 선생의 묘소를 입구로 삼는다. 그는 평생을 일제와 독재정권에 맞서 싸웠고, 통일운동에 헌신한 민주화운동의 대부다.

지형을 따라 부채꼴 모양으로 봉분이 늘어서 있어, 동심원을 그리며 좌우로 오가는 편이 좋다. 부채의 손잡이에 해당하는 곳에 노회찬 전 의원이 있고, 양쪽 끝에 문익환 목사와 그의 동생인 문동환 목사의 묘소가 묘역을 품듯 자리하고 있다. 맨 위에는 박종철 열사의 초혼 묘와 아버지 박정기 선생의 묘소가 나란히 있다.

그들을 점으로 연결하면 납작한 마름모꼴이고, 그 중심이 전태일 열사와 백기완 선생의 묘소다. 두 분이 잠든 터가 실상 묘역의 안마당이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 유신 정권에 고문사 당한 최종길 교수, 5·18 진상규명을 외치며 분신한 박래전 열사, '중대 재해기업 처벌법' 제정의 도화선이 된 김용균님의 묘소 등이 한데 모여 있다.

'불꽃처럼 살았다.' 이곳 모란공원 묘지의 묘비에 가장 많이 새겨진 글귀다. 오래 살았든 요절했든 그들의 생애는 '불꽃'이라는 단어 말고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그들의 목숨 건 투쟁은 우리 사회의 빛과 소금이었고, 곡절 많았던 우리 현대사를 이끌어온 끌차였다.

범상치 않은 삶도 삶이지만, 이곳에서 옷깃을 여미게 되는 건 그들이 숨졌을 때의 나이가 도무지 믿기지 않아서다. 36세, 33세, 25세, 22세, 심지어 15세까지. 그들은 이미 죽었고 나는 아직 살아 있지만, 이곳에선 지금의 나보다 나이가 많은 이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누구라도 그들 앞에 서면 지나온 삶을 성찰할 수밖에 없다. 대학 시절의 약속과 다짐을 잊지 않았는지, 일상에 치여 소중한 것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과연 나는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지 자문하게 된다. 그들보다 두세 배나 더 살았는데도 '나잇값' 못하고 있다는 자책에서다.

그게 싫어서일까. 듣자니까, 기념일이나 기일이 아니면 평소 5·18 묘지나 이곳을 찾는 발길이 거의 없다고 한다. 평일인데다 코로나 때문이기도 할 테지만, 머물렀던 세 시간 동안 묘역에서 마주친 이라곤 딸과 손주의 손을 잡고 찾아온 어느 할아버지 가족이 전부였다.

방문객이 뜸해선지, 먼지 수북한 묘비와 곁에 세워놓은 플라스틱 표지판은 색이 바랠 대로 바래 만지면 부스러질 것만 같았다. 군데군데 무덤의 주인을 찾는다는 안내문까지 펄럭이고 있어 비감하기까지 했다. 화창한 봄 날씨였지만, 언뜻 을씨년스럽게 느껴진 이유다.

언젠가는 깨닫게 될 날 오리라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의 중심에는 전태일 열사와 백기완 선생의 묘소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그 너머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의 도화선이 된 김용균님의 묘소가 보인다. ⓒ 서부원

 
"나라에서 훈장을 주고 국립묘지에 묻힌다고 해도,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아요. 저분들은 '짧고 굵게' 살았지만, 저는 '가늘고 길게' 살려고요."

언젠가 5·18 묘지로 소풍 갔을 때, 아이들끼리 키득거리며 건넨 이야기다. 묘비마다 적혀 있는 희생자들의 삶을 존경한다면서도 내심 불편해 했다. 그들을 기억하는 것과 본받아 사는 건 별개라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아이들이다. 기억이 다짐으로 승화되지 못하는 셈이다.

마음이 심란할 때 부러 5·18 묘지를 찾는 나를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하물며 두 분 묘소를 찾아 절하려고 홀로 왕복 10시간 넘게 운전하는 건 바보 같은 짓으로 치부했다. 한 아이는 구글을 통해 둘러볼 수 있는데 굳이 돈과 시간 들여서 갈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젊은 동료 교사들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다. 시대가 변했고, 그들의 불꽃 같은 삶이 주는 교훈도 달라졌다고 말했다. 지금 우리 사회가 그들의 희생에 빚진 건 맞지만, 그들이 잠든 묘소를 찾아 깨우침을 주려는 건 요즘 아이들의 정서와는 사뭇 동떨어진 교육법이라고 말했다. 세대 차이로 눙친다면, 아이들과 젊은 교사들 사이가 더 가깝다.

솔직히, 5·18 묘지와 모란공원 묘지는 여전히 내가 첫손에 꼽는 소풍과 수학여행 장소다. 지금이야 아이들이 마뜩잖게 여기지만, 가랑비에 옷 젖듯 언젠가는 깨닫게 될 날이 오리라 믿는다. 나중 사회에 나가 삶이 버겁다고 느낄 때 이들의 생애를 떠올리게 될 테니 말이다.

아직 떼조차 덮이지 않은 백기완 선생의 묘소 옆에서 한참을 '멍 때렸다.' 예전엔 앞이 환하게 트였는데, 지금은 고층 아파트가 가리고 섰다. 돌아보니 야트막한 산마루 뒤도 아파트 차지다. 그렇듯 강산의 변화 속에도 이곳만큼은 오롯이 남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그의 묘비명을 통해 5·18과 이곳 모란공원 묘지가 연결되어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오월 걸상'에서 시작된 당일치기 모란공원 묘지 참배는 <임을 위한 행진곡>의 노랫말을 쓴 백기완 선생의 '묻엄' 앞에서 마무리됐다. 이제 광주로 돌아갈 시간이다.
 

백기완 선생의 묘비에는 <임을 위한 행진곡> 노랫말의 첫 구절이 새겨져 있다. 모란공원 묘지는 5·18 묘지와 그렇게 연결되고 있었다. ⓒ 서부원

 
#모란공원 묘지 #국립 5.18 민주묘지 #노회찬 #백기완 #임을 위한 행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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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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