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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되찾기 위해 300km를 걸어온 아버지가 건넨 한 마디

[김성호의 씨네만세 320]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 <아버지의 길>

21.05.08 12:00최종업데이트21.05.09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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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의와 염치를 아는 인간이 길바닥에서 담요를 덮고 잔다. 그는 이름 모를 시민이 놓아준 음식을 입 안에 게걸스럽게 채워넣다가 복받치는 감정에 엉엉 울고 만다. 사내가 울고 있는 자리는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의 삐까뻔쩍한 보건복지부 청사 앞이다. 그마저도 건물 경비에 의해 청사 뒤편 남들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쫓겨난 형편이다.

사내의 이름은 니콜라(고란 보그단 분), 자식을 빼앗긴 아버지다. 아동보호센터가 그의 어린 아들과 딸을 위탁가정으로 보내버렸다. 아이를 양육할 능력이 없다는 게 이유다.

영화 첫 장면은 충격적이다. 한 여인이 초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오누이를 데리고 철망 앞을 바삐 걷는다. 감독은 이 장면에서 인물들을 화면 왼편에서 오른편이 아닌,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걸어가게끔 담는다. 때문에 이들의 걸음은 어딘지 불편하고 불안하게 느껴진다.

이유는 곧 드러난다. 여자는 아이 둘을 데리고 철망으로 둘러싸인 공터로 들어선다. 사내 몇이 모여 일하는 그곳은 어느 회사의 공장이다. 공장 안쪽으로 깊이 들어가지도 못하고 넓은 마당 앞에 선 여인이 외친다.

"내 남편 니콜라의 월급과 퇴직금을 주세요. 이제 더는 먹을 게 없어요. 버틸 수가 없어요. 주지 않으면 아이들과 분신하겠어요. 정말이에요."

 

▲ 아버지의 길 포스터 ⓒ JIFF

 


모두가 그녀를 바라보지만, 어느 하나 나서지 못한다. 여인은 들고 온 페트병 뚜껑을 열어 아이의 몸에 액체를 뿌린다. 흠칫 놀란 아이들이 뒤로 물러서자 여인은 제 몸에 휘발유를 들이붓는다.

니콜라가 보건복지부 청사 앞에서 담요를 덮고 누운 것은 그날의 결과다. 사건이 일어난 직후 니콜라가 달려간 공장엔 아내도 아이들도 없었다. 아내는 병원에 입원했고, 자식들은 아동보호센터가 데려갔다고 했다. 아이들을 되찾기 위해 센터에 가보았지만 어려운 법률 용어를 들이대며 아이들을 돌려줄 수 없다고 했다. 법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니콜라는 센터의 심사를 잘 받기 위해 분주히 일했다. 낡은 집에 수도를 고치고 전기를 연결하고 페인트를 칠했다. 센터 직원들의 눈높이엔 턱없이 못 미쳤으나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러나 센터의 잣대로 재면 그는 아이를 방치하고 있는 가난한 일용직 노동자일 뿐이다.

니콜라는 항변한다. 하라는 것은 모두 했다고, 냉장고를 구했고 벽에 페인트를 발랐으며 수도와 전기까지 연결했다고 말이다. 그러나 직업만큼은 구할 수가 없다며 사정사정한다. "요즘 같은 세상에 정규직을 구하는 건 불가능해요" 니콜라는 말한다. 그러나 그건 니콜라의 사정일 뿐이다.
 

▲ 아버지의 길 스틸컷 ⓒ JIFF

   
자식 잃은 아버지가 길을 떠난 이유

아이를 돌려주지 않는 센터장 앞에서 니콜라는 단식을 하겠다고, 애들을 돌려주기 전에는 센터를 나가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런 그에게 다가선 건물 경비원은, 센터장이 자기 고향으로 위탁아동을 보내고 있고 거기서 30%의 수수료를 받아 챙기며, 모두가 그 사실을 알지만 무서워서 입에 올리지 못한다고 귀띔해준다. 센터의 결정에 이의신청을 할 수는 있겠으나 그 이의를 다루는 것도 센터장이라고며 단식하고 시위를 해봐야 소용이 없을 거라고 말한다. 니콜라가 300km를 걸어 수도 베오그라드로 향한 건 그래서였다.

사정을 아는 이들은 니콜라를 뜯어말린다. 버스비도 없이 맨몸으로 베오그라드까지 걷는 건 미친 짓이라며, 가다가 죽을 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니콜라는 베오그라드로 간다.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직접 이의신청서를 건내면 뭐라도 바뀌겠지 하는 생각 뿐이다.

<아버지의 길>은 아버지가 자식을 되찾기 위한 여정이다. 가진 돈 한 푼 없이 걸어서 저 먼 도시를 향해 가는 과정이며, 그 여정의 끝에서 그가 만난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감독 슬로단 보르보비치는 감정에 기대지 않는다. 자식을 잃은 아비의 여정으로부터 간편한 감동을 끌어내는 대신, 부조리함을 표현하는데 온 역량을 집중한다. 이 같은 태도야말로 <아버지의 길>이 귀한 작품이 될 수 있는 결정적 요인이다.
 

▲ 아버지의 길 스틸컷 ⓒ JIFF

 
국가와 제도는 자격이 있는가

영화는 니콜라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려 노력한다. 니콜라는 가난해선 안 될 사람이다. 아니, 가난하더라도 존엄을 잃고 비참해져선 안 될 사람이다. 어느 사회라도 니콜라와 같은 사람으로부터 아내와 자식을 앗아간다면, 그리하여 300km를 가로질러 휘황찬란한 청사 앞에서 노숙하게 한다면, 존재할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영화는 입증하려 한다.

니콜라는 예의와 염치를 아는 인간이다. 갖은 이유를 들어 아이를 돌려주지 않는 센터장에게, 심지어 그가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낼 때조차 니콜라는 점잖게 항의한다. 센터장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기물을 파손하는 대신 단식을 하겠다고,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가 소리를 높이는 건 센터 직원들이 아이를 강제로 차에 태우려고 할 때, 단 한 번 뿐이다. 그마저도 아이와 포옹한 뒤 차에 타고 가라고, 곧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떼어놓는다.

니콜라의 여정은 서글프다. 어느 마을을 지나다 만난 비루한 강아지에게 니콜라는 제가 먹을 빵 한 조각을 떼어 던져준다. 그러고도 허기가 져 저를 쳐다보는 강아지를 내치지 못해 고생한다. 한 밤 중 추위를 피해 그의 품을 파고든 강아지를 껴안고 니콜라는 밤을 지샌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차에 치여 숨을 거둔 강아지를 발견하고는 땅을 파다가 펑펑 눈물을 쏟는다.

베오그라드에 간다며 비운 집이 탈탈 털렸음을 알고, 빼앗긴 세간 하나하나를 되찾아오던 니콜라의 모습은 또 어떠했나. 제 물건을 허락 없이 털어간 집에 들어설 때조차 그는 문 앞에 놓인 카펫에 먼지 묻은 신발을 문지르고서야 문고리를 잡는다.
 

▲ 아버지의 길 스틸컷 ⓒ JIFF

 

니콜라 앞에 펼쳐진 세상은 참담하다. "이런 일엔 돈을 받지 않네"라며 무료로 이의신청서를 써준 옛 공장 동료는 니콜라와 함께 퇴직금도 받지 못하고 해고된 상태다. 니콜라에게 창고를 내주고 빵과 음료까지 가져다 준 편의점 청년은 고급차를 타고 주유하러 온 다른 청년들에게 놀림거리가 된다. 니콜라를 따르던 강아지는 한밤중 차에 치여 죽는데, 그 강아지를 치고 간 이들은 강아지를 묻어주지도 않는다.

베오그라드 보건복지부의 문턱은 얼마나 높았나. 공무원과 기자들은 그에게 얼마나 관심을 가졌던가. 다시 돌아온 센터에서 마주한 벽은 얼마나 두터웠나. 그가 비운 집을 깡그리 털어간 마을 사람들은 도대체 얼마나 비겁하고 치졸했나.

영화는 니콜라의 처절한 여정으로부터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역설한다. 감독은 니콜라가 거듭 물을 찾고 묵묵히 빵조각을 베어 물고, 오직 가족만을 바라보는 모습을 통해 선한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먹고 마시고 제 가족을 꾸릴 울타리만 있다면, 니콜라와 같은 인간은 300km를 걸어 가보지 못한 도시를 찾지 않았을 것이다. 선한 이의 아내는 제 아이의 몸에 기름을 들이붓지도, 제 몸에 불을 붙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토록 선하며 예의와 염치를 아는 인간에게 생명을 걸고 300km 황무지를 가로지르게끔 하는 사회라면, 그런 법이라면, 존재할 자격도 가치도 없다.

한 아버지의 처절한 여정이 얼핏 혁명적으로까지 느껴지는 건 이 영화가 그 길 이면에서 흔들림 없이 사회와 제도를 겨누고 있기 때문이다. 세르비아의 얘기만은 아니다. 세월호 침몰 참사 유가족과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및 유가족,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산업재해 희생자들이 울음을 멈추지 않고 있는 2021년 대한민국 역시도 <아버지의 길>이 겨눈 총구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은 아닌지.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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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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