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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 소식 듣고 음독

[[김삼웅의 인물열전] 독립운동의 선구 예관 신규식 평전 / 11회] "애꾸, 그렇다. 이 애꾸눈으로 왜적을 흘겨보기로 하자"

등록 2021.05.13 18:02수정 2021.05.13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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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한일의정서 강제 체결 후 촬영한 기념 사진 ⓒ 사진가 권태균 제공

 
1900년대 초 국가안위가 누란의 위기로 빠져들고 있을 때 조선의 의식 있는 사람들은 문명개화를 말하고 이에 기초한 산업부흥과 교육진흥을 통한 실력양성론을 역설하였다. 1900년 11월 서대문~청량리 노선의 전차가 개통되고 비슷한 시점에 서울 진고개의 일본인 상가에 민간 전등이 설치되었다. 1902년 3월에는 서울~인천 간 장거리 전화가 개설되었다. 

외국인들에 의한 이와 같은 '사건'은 엄청난 변화이고 문화적 충격이었다. 게다가 1904년 2월에는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섬나라 승냥이와 대륙의 북극곰이 저들 나라를 놔두고 조선을 전쟁터로 만들었다. 그리고 일본군이 서울에 진주한 가운데 한일의정서가 채택되었다.

신규식은 틈나는 대로 향리에 내려와 자신이 세운 덕남사숙 학동들에게 시국을 말하고 정세를 분석하였다. 그리고 손수 지은 노래를 가르쳤다. 

 아 대한국 만세
 부강기업(富强基業)은 국민을
 교육함 존재함일세
 우리는 덕을 닦고 길을 바로어
 문명의 선도자가 되어 봅시다.

 학도야 학도야 청년학도야
 나라의 기초는 우리 학도님
 충군신 애국성을 잊지맙시오
 활발히 경주하여 전진함에
 허다사업을 감당할려이면
 신체의 건장함이 청백이로다.

 천지도 명랑하고 평원광야에
 태극기 높이 달고 운동하여 보자. (주석 1)


이 시기 그는 대한제국의 장교 신분으로 1904년 4월 진위대 4연대 1대대를 견습한데 이어 10월에는 모교인 육군무관학교를 견습하였다. 그리고 1905년 3월 6품으로 승급하였다. 교육사업에 진력하면서도 무관학교와 끈을 잇고 있었다. 국가위난시 최후의 보루가 군인이라고 믿은 것이다.
  

덕수궁 중명전 전시관 내부 중 을사늑약 재현 ⓒ 덕수궁관리소 제공

 
1905년 11월 한민족의 치욕인 을사늑약이 강제되기에 이르렀다. 을사늑약은 조선의 목줄기에 비수를 드리대는 폭압이고, 수많은 조선인들의 운명을 바꿔놓은 노예계약 문서였다. 그 중에는 신규식도 포함되었다. 26세 때에 겪은 을사늑변은 그의 생애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당시 그는 덕남사숙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소식을 듣고 상경하여 거처하던 방의 문을 잠그고 3일 동안 단식을 하면서 자결의 결행을 준비하였다.

이튿날은 대소가의 어른들이 몰려들어서 문을 따라고 호통도 쳐보았지만 허사였다. 만 3일을 굶은 신규식의 가슴에 가득히 밀려드는 것은 암담이요 허무였다.

"죽자. 최선의 길은 단 하나, 죽음 뿐이다."

그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순국이란 소극적인 행동이 아니라 적극적인 투쟁의 일환이라 생각한 것이다.

"죽음은 거름의 역할을 하는 것 ㅡ 내 한 몸이 거름이 되어 무수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면"(『韓國魂』참조).
 
 

최익현의 병오창의(무성서원) 최익현은 을사늑약을 무효화시키기 위해 의병봉기를 하였다. ⓒ 태산선비문화관

 
생각이 이에 이르자 신규식은 벌떡 일어나서 감춰 두었던 독약을 꺼내 조심스레 탁자 위에 놓았다. 그리고선 두 무릎을 뚫었다. 그는 ㅡ 나라를 구하지 못한 죄를 2천만 동포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죄를 부모에게 ㅡ 빌었다. 창살이 훤히 비치는 새벽, 26세로서 세상을 하직하려는 신규식의 심정은 한점 동요도 없이 잔잔했다. (주석 2) 

그에게는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다. 운명의 여신은 할 일 많은 그를 데려가지 않았다. 서모 이씨가 문을 부수고 들어가 혼수상태에 빠진 그의 입에 냉수를 떠 놓고 곧 양의가 달려와 간신히 목숨을 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독약 기운은 오른쪽 눈의 시신경을 다쳐 그를 애꾸가 되게 했다. 기운을 차려 거울을 들여다 보던 신규식은 자조의 웃음을 띠었다. 

"애꾸, 그렇다. 이 애꾸눈으로 왜적을 흘겨보기로 하자. 어찌 나 한 사람만의 상처이겠는가. 이 민족의 비극의 상징이지 않는가."

흘겨볼 예(睨)자, 볼 관(觀)자, 예관(睨觀). 신규식은 예관으로 자호를 삼고 이 상처를 평생 기억하기로 했다. 일제가 준, 어쩌면 이등박문이가 준 이 선물을 받기로 하고, 그 답례는 10년이고 20년이고 아니 평생을 두고 갚기로 그는 마음먹었다. (주석 3)


주석
1> 이이화, 「신규식」, 『한국 근대인물의 해명』, 238쪽, 학민사, 1985.
2> 앞의 책, 234쪽.
3> 앞의 책, 235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독립운동의 선구 예관 신규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신규식 #신규식평전 #예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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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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