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만5900원이 준 행복

등록 2021.05.12 14:19수정 2021.05.12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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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내와 두 아들과 한 달에 한 번 이상 충청남도 보령에 다녀온다. 장모님과 함께 맛있는 식사를 하고 마스크나 생활물품, 용돈을 드린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속담처럼 장모님이 손수 농사지어 수확한 쌀, 고추, 각종 채소와 들기름 등 더 큰 사랑을 받는다.


꽃샘추위가 여전하던 3월 어느 일요일, 대천 사는 장모님을 뵙고 군산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나는 국도를 애용하는 편이라서 서천을 지나야 했다. 예전부터 아내에게 서천 수산물 시장의 생선이 싱싱하다는 얘기를 들어왔다. 아이들에게 처음으로 킹크랩을 사주고 싶어 시장에 들렀다.

"사장님. 킹크랩 가격 어떻게 하나요?"
"3킬로 조금 넘네요. 킬로 당 10만 원인데, 그냥 30만 원만 주세요."


생선과 해산물에 대해 일체 모르는 나를 대신해 아내는 사장님께 대게 가격을 물어봤다. 킹크랩 가격과 비슷했다. 나는 아내에게 여기까지 왔으니 그냥 사 가자고 했다.

고민하고 있는 우리에게 사장님은 지금은 철이 아니어서 조금 비싸다며 대신 서비스를 잘 챙겨주겠다고 했다. "좀 더 돌아보고 올게요." 우리는 자리를 이동했다. 시장을 두세 바퀴 돌았지만 원하는 물건은 없었다. 아쉬운 마음을 안고 집으로 출발했다.

"4마리에 5만5900원. 고객님. 이 가격이면 꼭 구매하셔야 합니다."


가장 사랑하는 이들에게 꼭 맛있는 킹크랩을 주고 싶었던 나에게 드디어 기회가 왔다. 퇴근 후 아무 생각 없이 TV 채널을 돌리던 나는 홈쇼핑 쇼 호스트의 손에 있는 빨간 물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스마트폰을 들고 자동 주문을 했다. TV 화면에 나오는 다양한 랍스터 요리를 보며 택배가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내 마음이 설렜다. '애들과 아내가 진짜 좋아하겠다. 그나저나 랍스터는 그냥 기본으로 쪄 먹을까? 치즈를 얹어 먹을까? 랍스터 다리를 넣고 라면도 끓여 먹어야지.'

여행은 준비 과정이 더 설렌다고 했던가! 랍스터 도착 전까지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사실 아내와 아들들은 별다른 기대나 감흥도 없었는데 나만 조금 유난을 떨었다. 생애 첫 랍스터 시식 날은 금요일 저녁으로 결정되었다. 어머니께 큰 찜 솥도 미리 빌렸다.

평소보다 일찍 일을 마무리하고 칼퇴근을 했다. 먼저 퇴근한 아내는 냉동실에 하루 동안 고이 보관했던 랍스터 네 마리를 꺼내서 흐르는 물에 해동시키고 있었다.

"아직 안 삶았어?"
"조금 꽁꽁 얼었는지, 해동이 은근히 오래 걸리네."


예상했던 식사 시간보다 약 1시간 늦어졌지만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배고프면 더 맛있게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처음 구매해 본 랍스터 네 마리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홈쇼핑에서 처음으로 구매해서 삶았던 랍스터 ⓒ 오성우


아내는 이제 다 된 것 같다며 고무장갑 위에 일회용 장갑을 끼고, 가장 실한 놈 하나를 들고서 몸통 앞부분과 꼬리 부분을 비틀어 분리했다. 큰 꼬리살이 툭 튀어 나왔다. 한 입에 먹기 좋게 잘라 아이들에게 먹어 보라고 했다. 랍스터 살을 계속 발라내고 있는 아내의 입에도 한 점 두툼한 살을 넣어주었다.

"어때? 괜찮아?"
"어. 맛있다. 짭짤하고, 쫄깃하다."
"주영이랑 주원이는 어때?"


스마트폰에 집중하는 두 아들들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라면을 워낙 좋아하는 둘째는 얼른 랍스터 다리 넣고 라면을 끓여 먹자고 아우성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그림이 아니었다. 홈쇼핑에서는 우아하게 살을 발라 먹고, 요리를 해서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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랍스터 살 발라내기 아내가 직접 랍스터 껍질을 벗기로 살을 발라내고 있는 동영상 ⓒ 오성우

 
랍스터를 해체할 도구가 없었다. 집에 있는 가위와 내 손을 동원하여 힘들게 다리에 있는 살을 하나씩 발라냈다. 스마트폰에 집중하고 있는 애들 입에 하나씩 넣어주었다. 처음과 달리 진미를 알게 되었던지, 아이들은 나와 스마트폰 화면을 수시로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TV를 보며 상상했던 우아한 모습의 요리나 식사 장면은 아니었지만, 전혀 서운하지 않았다. 랍스터여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이들과 같이 먹고 나눌 수 있어서 행복했다. 4인용 식탁에 다 함께 둘러앉아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다는 게 중요했다.
#가족 #랍스터 #행복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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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에서 참여와 자치활동을 중심으로 청소년들을 만나는 일을 하는 청소년활동가이자, 두 아들의 아빠이며, 사랑하는 아내 윤정원의 남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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