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5.13 07:13최종 업데이트 21.05.13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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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퇴임 후 첫 공개연설 하는 트럼프 ⓒ 연합뉴스

 
"켄터키 더비 우승 말도 마약쟁이였다니. 이건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상징한다. 국경을 넘는 난민 무리들, 가짜 대통령 선거 같은 걸 보면서 전 세계가 우리를 비웃고 있다!"

지난 일요일인 9일,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자신의 블로그에 '성명'을 올렸다. 150년 역사의 켄터키 더비에서 발생한 우승마 스캔들을 빗대 바이든 정부를 성토하는 내용이었다. 토크쇼 진행자들에겐 신나는 먹잇감이 떨어졌다. 


"뭐라는 거야? 그 우승 말이 안티파에게 양성반응을 보였다고 생각하나봐?"
"이게 전 대통령의 공식 성명 거리야?" 
"그가 전직 대통령이라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근데 레전드라는 거잖아."


덕분에 소문만 들었던 트럼프 블로그를 찾았다. 지난 1월 6일, 의사당 폭동 이후 일시 또는 영구 정지된 트럼프의 트위터, 페이스북, 유튜브를 대신해 만들어진 '도널드 J. 트럼프의 책상에서'라는 이름의 사이트다. 정치에 대한 훈수는 여전하고 트럼프가 지지하는 공화당 후보들의 이름도 올라와 있다.

바이든 정부 출범 100일이 지났지만 공화당 내 트럼프의 영향력은 건재를 넘어 당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발원지로 자리잡고 있다. 

공화당서 쫓겨나는 반 트럼프

"급진 정책으로 미국을 망가뜨리고 있는 민주당을 막기 위해 우리 공화당은 일치단결해 의장 소환 투표를 해야 합니다."

공화당 하원 서열 1위인 원내대표 케빈 매카시는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서열 3위 리즈 체니 의원을 축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 시간으로 5월 12일 열릴 소환 투표를 앞두고 공화당 의원 한 명 한 명에게 서한까지 보내 투표를 종용했다.

"좌파들과 달리 우리 공화당은 자유로운 생각과 토론을 포용합니다. 다양한 배경의 유권자들을 대표해서 우리는 선출됐지만 지도부는 우리의 일과 목표에 부합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케빈 매카시가 당 서열 3위 의원을 축출하겠다는 이유는 2020년 대선에서 광범위한 부정이 벌어졌다는 도널드 트럼프의 주장을 비판했다는 것이다. 리즈 체니 의원은 지난 1월 6일 미 국회의사당 폭력 사태를 선동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탄핵했던 공화당 하원 10인의 대표격이다. 

"미국 대통령이 폭도들을 불러 모아 공격을 명령했습니다. 대통령은 폭도들의 의회 공격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폭도들을 즉각 비난했어야 했습니다."

리즈 체니 의원은 트럼프 대통령 당시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트럼프의 정책에 찬성표를 던졌던 와이오밍 주 하원의원이었다. 그러나 의사당 폭동 이후 입장을 바꿨다. 공화당이 트럼프와 절연해야 제대로 된 보수 정당으로 외연을 넓혀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초기엔 대부분의 공화당 지도부도 그와 같은 입장이었다. 공화당 상원대표인 미치 멕코넬 의원이나 트럼프와 친분이 두터운 린지 그레이엄 의원은 물론이고 지금 리즈 체니 축출에 앞장서고 있는 케빈 매카시 대표도 트럼프 비난 대열에 함께 한 이들이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지금 모두 돌변했거나 침묵 중이다. 바이든 대통령 취임 이후에도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대선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트럼프의 영향력이 공화당 유권자들 사이에서 견고하자 비난의 목소리가 잦아든 것. 그들 대부분은 앞 다퉈 트럼프의 플로리다 별장으로 달려가 눈도장을 찍고 리즈 체니 축출에 함께하고 있다. 

아버지 딕 체니 전 부통령의 지원을 받으며 끝까지 트럼프와의 결별을 주장하던 리즈 체니는 지금 공화당 지도부 축출은 물론 다음 선거마저도 위험한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리즈 체니 공화당 상원의원 ⓒ 연합뉴스

 
"공화당 3~5년 안에 없어질 수도"

하지만 모든 공화당 인사들이 지도부와 뜻을 같이 하는 건 아니다. 지난 9일 <엔비시>(NBC) '미트 더 프레스'(Meet the Press)에 출연한 공화당 래리 호건 메릴랜드 주지사는 지금의 당 상황을 우려했다.

"우린 공화당 역사상 최악의 4년을 보냈고 지금 백악관과 상·하원을 모두 잃었습니다. 성공적인 정치는 뺄셈, 나눗셈이 아니라 덧셈과 곱셈이어야 합니다." 

음모론인 큐어넌 지지자를 비롯한 극우 성향 의원들이 '앵글로색슨의 이상을 실현하는 극우 모임'등을 조직하는 것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다. 백인 극단주의 세력들이 전 대통령을 업고 당내 파워를 키워 나가는 것에 대한 우려였다. 

부시 전 대통령도 공화당의 극우화 비난에 동참했다. 지난 5월 1일, 코로나로 숨진 텍사스 하원의원의 보궐선거를 앞두고 자신이 주지사로 있던 텍사스 유권자들에게 경고했다. 

"도널드 트럼프 지지자들의 우세는 공화당 스스로 멸종되기를 원한다는 말과 다름없습니다. 이런 분위기가 계속된다면 공화당은 3~5년 안에 없어질 수 있습니다."

친 트럼프화에 대해 공화당 내 조직적인 반발도 시작됐다. 리즈 체니 축출 투표 하루 전인 5월 11일, 전직 선출직 관료를 포함한 100여 명의 공화당원들이 목소리를 낸 것. 이들은 "민주공화국에서 음모와 분열 그리고 전제주의 세력이 발현할 때, 자유와 정의를 수호하기 위한 집단행동은 애국 시민들의 의무"라고 말한다. 따라서 당이 트럼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선택을 계속한다면 제3의 정당 구성을 준비하겠다고 주장한다.

트럼프 대통령 시절, 국토안보부 관계자로 트럼프 행정부를 비난하는 책을 쓰고 <뉴욕타임스>에 익명으로 기고하기도 한 마일즈 테일러가 이들을 대표해 경고했다. 

"나는 공화당이 진실과 이성을 버린 이후 간신히 버티고 있는 당원 중 하나입니다. 우리 공화당이 자유의지, 자유시장, 자유로운 사람들이 지지하는 합리적 정당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나를 포함해 많은 이들이 당을 떠날 것입니다."

로이터 통신에 의하면 테일러가 주도하는 이 성명에는 공화당 출신의 전 교통부 장관, 주지사, 다수의 하원의원들이 함께하고 있다. 
 

"트럼프가 선거에서 이겼다"... 맨해튼 거리에 쓰인 낙서. ⓒ 최현정

 
모두의 걱정

트럼프 시대로 돌아가는 공화당의 퇴행에 대해 합리적인 공화당 내부 인사는 물론이고 바이든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민주당 인사들도 걱정하는 분위기다. 팬데믹 상황에서 토론과 빠른 의사결정이 가능한 합리적인 야당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세계 최고 수치의 코로나 확진자와 사망자 발생이 1년 넘게 지속되는 와중이라 지켜보는 유권자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정당에 표를 주는 유권자보다 전 대통령의 심기가 더 중요해 보이는 공화당 지도부를 향해 <시비에스>(CBS) '더 레이트 쇼'(The Late Show) 진행자 스티븐 콜베어는 아래와 같은 트윗을 올렸다.  

"내전의 전리품으로 패배자의 동상을 세우려는 공화당이 난 너무 궁금해." 

대선에서 패배한 공화당이 내부의 합리적인 목소리를 제압하고 트럼프의 영향력에 매달리고 있다는 조롱과 우려의 비아냥거림이다. <워싱턴포스트>도 5월 10일 자 신문에 칼럼니스트 유진 로빈슨의 우려를 게재했다. 

'미국의 가장 큰 위협은 현실과 단절한 공화당이다.'
   
칼럼 제목처럼 유권자와 단절된 제1 야당을 둔 미국이 걱정스러운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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