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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에서 몰래 팔린 유골가루... 알고보니 민간인학살 피해자

[한국전쟁 민간인희생자 진주유족회 이야기] 아버지 얼굴도 못 본 정연조

등록 2021.05.17 07:27수정 2021.05.17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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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명석면 관지리에서 벌어진 개토제(2021.5.7) 맨 우측이 정연조 회장. 출처: 구자환 영화감독

 
1951년 여름. 산골짝의 해거름은 일찍 찾아왔다. 경남 진주시(당시 진양군) 명석면 용산리에 사는 허진원(가명)은 산에서 내려오는 물체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어두컴컴한 상태에서 움직이는 물체가 사람임을 알아채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허진원이 "큼큼" 하자 내려오던 사람들도 화들짝 놀랐다. 놀라기는 허진원도 마찬가지였다. 작년 여름에 이곳에서 사람 수백 명이 학살됐는데 낯선 사람들이 나타났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허진원이 낯선 이들에게 "누구시오?"라고 물었지만 그들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게를 지고 있었는데 무언가 담은 듯한 볼록한 마대자루가 실려있었다. 지게를 진 두 사람은 황급히 큰길로 향했고 마치 쫓기는 사람처럼 가끔 뒤를 쳐다보았다. 허진원은 '뭐하는 사람들이지' 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유골을 훔친 도둑

도둑 고양이같았던 그들은 정말로 도둑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훔친 것은 금괴나 현금이 아니라 사람의 뼈였다. 도둑들은 마대자루에 담아간 유해 십여구를 어디에다 썼을까? 도둑들은 유골을 집으로 가져가 절구에 빻았다. "그기 뭔교?" 절구질하던 노민석(가명)은 아내의 물음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 양반이 뭘 훔쳐 먹었는교? 왜 이리 놀라노!" "시끄럽다 마. 싸게 들어가소."

다음 날 아침 노민석은 곱게 빻은 유골가루를 들고 진주 시내 서부시장 한약방 거리로 갔다. ××약방이라 쓰인 곳으로 첩보작전 하듯이 들어간 노민석은 약방 주인에게 유골가루를 담은 자루를 슬쩍 건넸다. "고생했네." 한약방 주인은 현금 봉투를 내주었다.

1950년대 당시 민간에서는 간질, 한센병(문둥병), 폐결핵 환자에게 사람 뼈가 좋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런 연유로 한약방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민간인 집단학살지에서 유해를 몰래 수거해 만든 유골가루를 사들였다.

1950년 7월 말 진주시 보도연맹원들과 진주형무소 재소자들이 명석면 용산리와 관지리, 문산읍 상문리, 마산 진전면 여양리에서 대한민국 군경에게 학살되었다. 1년이 지난 1951년 여름, 용산리 용산고개에서 산사태가 일어나 학살자들의 유해가 드러났다. 두개골이 나뒹굴고 있다는 말을 들은 한약방 주인들이 사람을 시켜 사들인 것이다.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 법한 이 이야기는 사실이다. 당시 전국 각지에서 이같은 일이 벌어졌다.


충북 영동군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영동군 보도연맹원들이 1차로 학살된 상촌면 상도대리에서는 아침마다 손절구와 막걸리를 들고 숯가마로 올라간 이가 있었다. 

"상촌면 상도대리 양〇범은 40대 중반으로 한국전쟁 전에 타지에서 이사를 온 사람여. 대장간 일을 했던 사람인데, 학살 사건 이후 매일 아침 손절구를 들고 산으로 올라갔어. 그는 숯가마와 학살 현장에서 큰 뼈들을 모아 손절구로 빻아 한약재상에게 팔아 넘겼지." (정병재. 1922년생. 충북 영동군 상촌면 상도대리)

"너거 오빠는 관지미에서 죽었을 끼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난 후 한달이 안 된 1950년 7월 16일. 경남 진주시 대평면 대평리에서도 보도연맹원 예비검속이 시작되었다. 정종화, 노명수, 정우영 등 18명이 대평지서로 갔다. 정종화(당시 28세)는 동아일보 진주지국에서 일하다가 고향으로 와 농사를 지었다. 

이날 대평지서에 소집된 보도연맹원들은 진주형무소로 이송되었다. 그곳에서도 돈을 쓴 이들은 풀려났다. 대평리 정우영과 노명수, 면소재지에 살았던 하인근과 윤수복이 그랬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던 정종화는 트럭에 실려 관지리로 갔다. 그 트럭이 출발하는 모습을 윤수복이 숨죽이며 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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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보도연맹원들과 진주형무소 재소자들이 학살된 용산고개에 선 정연조 회장 ⓒ 박만순

 
진주형무소와 진주경찰서에 구금되었던 진주지역 보도연맹원들과 형무소 재소자들은 7월 중·하순에 걸쳐 명석면 관지리, 용산리, 우수리, 문산읍 상문리, 마산 진전면 여양리에서 후퇴하는 대한민국 군경에게 학살되었다. 보도연맹 피해자는 400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대평면 피학살자만 약 40명인데, 그 중에서도 대평리는 16~17명이 학살되었다.

군경은 피학살자 가족에게도 처형 장소를 알려주지 않았고 정종화가 죽은 곳을 알리 없는 가족들은 명석면 용산리로 갔다. 정종화의 아내 이춘영과 동생 정기화가 용산고개에 갔을 때는 이미 시신은 부패한 상태였다. 엎어져있는 시신을 바로 눕히려고 팔을 잡아 당기면 팔이 쑥 빠지는 형국이었다. 시신에서 흘러내린 피는 잔디를 홍건히 적셨다.

"헉" 하며 이춘영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시신 썩는 냄새 때문에 쑥을 비벼 코를 막았지만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팠고, 코피가 주르륵 흘렀다. "형수요,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삽시다"라며 정기화가 잡아끌었다. 결국 그들은 시신도 수습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시간이 흐른 후 정종화의 여동생 정금화에게 사람이 찾아왔다. 정종화와 함께 진주형무소로 끌려갔던 진양군 대평면 윤수복이었다. "너거(너희) 오빠는 관지미(관지리)에서 죽었을 끼다." "아재는 그걸 어째 아요?" "내도 형무소로 끌려갔다 아이가. 근데 아무도 안 지키길래 도망쳐 나왔대이. 나오기 직전에 느그 오빠가 탄 트럭이 간지미로 갔다 아이가." 하지만 그때는 정종화의 시신을 수습하기에 너무 늦어버린 후였다. 

노가다 일당 40일 치 주고 사우디에 가다

정종화가 죽임을 당했을 때 아내 이춘영의 뱃속에는 5개월 된 태아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 정연조는 아버지의 얼굴도 못 본 유복자로 태어났다. 정연조가 3세 때 어머니 이춘영은 친정으로 갔고 그때부터 그는 할머니 밑에서 형과 함께 자랐다. 한평초등학교를 나와 한평고등공민학교를 다닌 것이 전부인 그는 살아오면서 신원조회를 세 차례나 당했다.

정연조가 1972년 군에 입대해 강원도 양구에 자대 배치를 받았을 때의 일이다. 사단사령부 행정병이 될 뻔했던 그는 신원조회에 걸려 2사단 32연대 5중대 화기소대로 보내졌다. 보안대에서 찾아오긴 했지만 만 3년 군복무 동안 별 탈은 없었다.

군 제대 후 결혼했는데 집안 재산이라고는 논 700평, 밭 500평이 전부였다. 농사를 지어 처자식을 먹여 살릴 수는 없었던 정연조는 1978년 5월 치러진 공무원시험에 응시했다. 경남 진양군에서 하천감시청원경찰을 공개 모집했다. 5명 모집하는 데 25명이 응시했지만 정연조는 3등의 성적으로 1차 시험에 합격했다.

정연조는 진양군 산림조합장을 하던 당숙(5촌 아저씨)을 찾아갔다. "당숙, 제가 청원경찰 시험쳤는데요." "내도 안다." "근데 신원조회 때문에 걱정됩니더." "경상남도 치수과장에게 말할께로." 하지만 며칠 후 술에 취한 당숙이 한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연조야. 미안테이. 니는 절대로 공무원이 될 수 없대이. 내 농사(논과 밭) 다 줄 테이 농사나 짓고로." 연좌제(신원조회) 때문에 정연조는 공무원도 될 수 없었다.

이후 중동 바람이 불자 정연조는 사우디아라비아행을 결심한다. 1979년에 현대건설에 입사했지만 사우디에 가기 직전 또 신원조회에 걸렸다. 그는 진주경찰서 구내 이발소를 하던 유청길을 찾아가 방법을 상의했다. "니 내일까지 10만 원 갖고 온나." 건축노동자 일당이 2500원이었던 시절이었으니 10만원은 무려 40일 치 일당에 해당하는 큰 돈이었다. 어렵사리 장만해 간 돈의 위력(?)으로 그는 무사히 사우디아라비아에 갈 수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레이트에서 벌어온 돈으로 1983년에 그는 경운기와 논, 과수원을 샀다. 1994년 남강댐 건설로 과수원은 수몰됐지만 2021년 현재에도 딸기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다.

낡은 컨테이너 박스에 안치된 유해들

"유세차 신축년 5월 7일 진주지역 민간인희생자 유족들은 엎드려 비옵니다"로 시작된 개토제(開土際)의 축문은 진주시 명석면 관지리에서 학살된 이들의 운명을 보고했다.

정연조(1950년생. 진주시 대평면 대평리) 진주유족회 회장의 사회로 시작된 이날 개토제는 진주유족회원들과 발굴단, 진주시청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발굴은 진주시와 경상남도의 지원으로 5월 6일부터 12일까지 이루어졌다. 칼빈 탄피와 탄두가 나왔고 유해 25구와 버클, 단추 등의 유품이 나왔다.

발굴단 책임연구원 노용석 박사(부경대 글로벌지역학연구소 교수)는 "발굴 결과 가해자는 대한민국 경찰이고 피해자는 민간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라고 밝혔다. 노용석 박사는 '두개골이 나왔냐'는 기자의 질문에 "두개골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학살 후에 누군가 훼손했을 것으로 보입니다"라고 했다. 단, 관지리 피학살자들의 두개골이 한국전쟁 직후에 한약재상들에 의해 훼손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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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명석면 용산고개 컨테이너 박스에 안치된 유해를 살피는 정연조 회장. ⓒ 박만순

 
진전면 여양리와 명석면 용산리에서 나온 유해는 현재 용산고개 컨테이너 박스에 안치되어 있다. 이번에 관지리에서 발굴된 유해도 그곳에 안치될 예정이다. 71년 전 국가폭력에 의해 학살된 이들의 유해가 낡고 초라한 컨테이너 박스에 안치되어 있다는 사실은 안타깝기 그지 없다.

물론 2021년 현재 민간인학살 유해 안치 지원을 하는 곳도 진주시가 전국에서 유일하다. 보다 쾌적한 공간에 유해를 안치한다면 우리의 역사의식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은 진주시가 2021년 가을에 '한국전쟁 민간인희생자 추모탑'을 건립할 예정이라는 점이다.

그간 진주유족회는 지역구 국회의원과 지자체에 유해 안치시설과 추모공간을 줄곧 요구해왔다. 하지만 국회의원은 예산부족을 탓하고, 지자체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그러던 차에 조규일 진주시장의 추모탑 건립 약속은 큰 의미가 있다. 역사의 상처를 기억하고 인권과 평화의 소중함을 공유하는 것은 비단 유족들만의 몫이 아닌 지자체와 시민들의 공동 과제다.
#유해바굴 #진주보도연맹원 #진주형무소 #신원조회 #위령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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