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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홍콩 영웅들은 돈보다 '의리'가 중요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유덕화를 스타로 만들어준 도박 느와르 <지존무상>

21.05.15 10:38최종업데이트21.05.15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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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5년 프로야구 스타 선수들의 원정 도박파문이 KBO리그를 강타했다. 이 때문에 통합 5연패를 노리던 삼성 라이온즈는 주력 투수 3명(윤성환,안지만,임창용)을 제외한 채 한국시리즈에 임했고 결국 시리즈 전적 1승4패로 두산 베어스에게 우승을 내줬다. 시즌이 끝난 후에는 세이브왕 임창용이 방출됐고 함께 도박 혐의에 연루된 일본 프로야구의 세이브왕 오승환은 아시아를 떠나 미국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도박이 가진 불건전성을 떠나 도박에 대한 대중들의 호기심은 결코 작지 않다. 도박을 소재로 한 최동훈 감독의 영화 <타짜>는 "나 이대 나온 여자야", "동작그만! 밑장빼기냐?", "마포대교는 무너졌냐?", "예림이, 그 패 봐봐" 같은 명대사를 남기며 개봉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명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실제로 화제성만 놓고 보면 최동훈 감독이 연출해 1000만 관객을 돌파한 <도둑들>이나 <암살>보다 <타짜>가 더 높다.

한국보다 영화 산업이 먼저 성행한 홍콩에서는 이미 80년대 후반부터 도박 소재 영화들이 많이 제작됐다. 주윤발이 기억상실증에 걸린 도박의 신으로 등장하는 <도신-정전자>와 도박과 코미디를 절묘하게 조합하며 당시 홍콩 영화의 흥행기록을 갈아치웠던 주성치의 출세작 <도성>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홍콩에서 도박 영화의 시작을 알린 작품은 역시 느와르와 도박물을 적절하게 조화시킨 유덕화와 알란 탐 주연의 <지존무상>이었다.
 

<지존무상>은 단관개봉 시절이었음에도 서울에서만 25만 가까운 관객을 동원하며 큰 사랑을 받았다. ⓒ 태흥영화(주)

 
홍콩의 고독한 터프가이, 유덕화 전설의 시작

유덕화는 홍콩 방송국 TVB의 연예인 훈련반 10기(한국의 '공채 탤런트'와 비슷한 개념으로 배우 양가휘가 유덕화의 동기다) 출신으로 데뷔 초 <신조협려>, <녹정기> 같은 시대극 드라마에 출연했다. 1985년 가수로 데뷔한 유덕화는 영화에도 꾸준히 얼굴을 내밀었지만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유덕화는 주윤발처럼 기골이 장대하지도 않고 고 장국영처럼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꽃미남도 아니며 성룡처럼 뛰어난 무술의 소유자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덕화는 1989년에 출연한 영화 <지존무상>으로 '인생역전'을 만들어냈다. 사실 <지존무상>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홍콩의 '국민가수' 알란 탐이었고 유덕화는 영화 중·후반부에 죽음을 당하며 스토리라인에서 하차하는 서브주인공이었다. 하지만 유덕화는 <지존무상>에서 친구와의 의리를 위해 사랑도 포기했던 고독한 '아시아 제일 손' 아해를 멋지게 표현해내며 관객들을 열광시켰다. 

<지존무상>은 지금은 영화역사관이 된 종로의 단성사에서 단관 개봉해 25만 관객을 동원하며 크게 흥행했다. 만약 요즘처럼 대형 배급사의 지원을 받아 수백 개의 스크린에서 상영됐다면 <지존무상>은 수 백만 관객을 모았을 수도 있다. <지존무상>으로 한국에서 인지도가 급상승한 유덕화는 <천장지구>, <아비정전>, <화소도>, <도협>에 연이어 출연하며 사랑을 받았다. 1991년에는 장국영에 이어 국내 초콜릿 제품의 CF 모델로 나서기도 했다. 

홍콩에서 가수와 배우로 동시에 사랑 받은 유덕화는 장학우와 곽부성, 여명과 함께 '홍콩의 4대천왕'으로 군림했다. 하지만 이는 현지 한정이었고 국내에서는 홍콩 4대천왕을 '유덕화와 아이들'로 불러도 될 만큼 유덕화의 인기는 절대적이었다. 유덕화는 한창 국내에서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1991년 내한공연을 했을 당시 1만50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올림픽 공원 체조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홍콩 영화의 전성기가 빠르게 저물면서 유덕화 역시 슬럼프를 겪었지만 2002년 <무간도>를 통해 홍콩 느와르의 부활을 알리며 건재를 과시했다. 지난 2010년에는 공연 도중 경호원에게 끌려가는 팬을 보고 무대에서 내려와 경호원과 언쟁을 벌이며 팬을 보호하기도 했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훈훈한 외모를 자랑하는 유덕화는 올해도 <쇼크웨이브2>에 출연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돈으로 절대 살 수 없는 친구와의 '의리'
 

유덕화는 친구의 애인을 구하기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의리를 보여준다. ⓒ 태흥영화(주)

 
재미 삼아 친구와 가족끼리 강원랜드나 경마공원을 가본 사람이라면 도박에 빠진 사람은 탐욕에 가득 찬 눈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지존무상>의 두 주인공 아해(유덕화 분)와 아삼(알란 탐 분)도 홍콩에서 알아주는 프로 도박 콤비지만 <지존무상>은 느와르의 정서가 짙기 때문에 영화는 두 주인공의 우정에 큰 비중을 둔다. 특히 아해는 친구를 위해 사랑하는 여자도 양보하고 자신의 모든 것이나 다름없던 왼손도 포기한다.

미야모토 부자로부터 청부 폭력을 의뢰 받은 무리의 습격으로 위기에 빠진 아삼을 구하기 위해 당구장으로 뛰어든 아해는 왼손으로 칼을 잡아 손을 희생하며 아삼을 위기에서 구한다. 아삼을 습격한 무리의 대장도 "아삼, 좋은 친구를 둬서 부럽다"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뜬다. 친구를 구한 대가로 아해는 왼손으로 계란조차 제대로 집을 수 없게 되고 도박꾼으로서의 인생도 사실상 끝나게 된다.

아해는 마지막 '한 방'을 위해 아삼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이미 장인에게 도박에서 손을 씻기로 약속한 아삼은 아해의 부탁을 거절한다. 아해는 동전 던지기를 통해 결정을 하자고 제안하고 아삼은 아해의 속임수를 눈치챈다. 하지만 아해가 떠난 후 확인한 동전은 양 쪽 모두 아삼이 도박을 하지 않는 쪽을 가리키는 앞면이 그려져 있었다. 결국 아삼은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하던 친구를 믿지 못한 꼴이 되고 말았다.

<지존무상> 최고의 명장면은 역시 유덕화가 독이 든 술잔을 골라 미야모토 부자 일당에게서 탈출하는 장면이다. 아해는 독이 든 술을 마시지만 고통을 참고 아삼의 약혼녀이자 남몰래 좋아하던 카렌(진옥련 분)을 구해낸다. 그리고 "당신을 구한 것은 당신이 아삼의 약혼녀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인들이 내가 죽는 것을 알면 내 죽음은 무의미해 집니다"라는 <지존무상> 최고의 명대사를 날린다. 이제 남은 것은 친구 아해를 위한 아삼의 치밀한 복수 뿐이다.

<지존무상>이 국내에서 큰 인기를 얻자 <지존무상>의 속편을 자처한 영화들이 대거 개봉됐다. 알란 탐과 유덕화를 다시 캐스팅한 <지존계상>은 개봉 당시 <지존무상>의 속편으로 알려졌지만 내용은 전혀 이어지지 않는다. <도신-정전자>와 <도성>의 세계관을 결합시킨 유덕화, 주성치 주연의 <도협> 역시 한국에서는 한동안 <지존무상3>라는 제목으로 알려졌다. 1991년 <지존무상2-영패천하>라는 이름으로 소개된 작품 역시 전편과는 무관하다.

사랑 위해 목숨 버린 비운의 청순여신 관지림
 

관지림은 <지존무상>에서 큰 눈과 청순한 매력으로 많은 남성관객들을 사로 잡았다. ⓒ 태흥영화(주)

 
<지존무상>은 남자들의 의리와 우정을 주제로 하는 영화로 여주인공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다. <지존무상>에서 두 주인공 아해와 아삼의 사랑을 동시에 받는 카렌을 연기한 배우는 국내에 크게 알려지지 않은 진옥련이다. 드라마 활동 시절부터 유덕화와 함께 호흡을 맞춰온 진옥련은 1993년 <변성낭자> 이후 활동을 중단했다가 2008년 <천수위의 낮과 밤>에 출연했다. 2011년에는 유덕화의 콘서트에 게스트로 출연해 우정을 과시했다.

<지존무상>에서 주인공 알란 탐보다 서브 주인공 유덕화가 더 빛났던 것처럼 여주인공 역시 메인이었던 진옥련보다 서브 헤로인이었던 관지림이 남성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 잡았다. 교도소에서 출소하는 유덕화를 차에 태우며 등장한 보보는 거친 사내의 마초적인 매력을 가진 아해를 좋아한다(물론 아해가 왼팔을 못 쓰게 된 줄 뻔히 알면서 트럼프 박스를 선물할 정도로 '나쁜 여자'의 기질도 가지고 있다) .

보보는 아해가 아삼의 약혼녀 카렌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손을 다친 아해의 재기를 적극적으로 돕는다. 그리고 아해가 카렌을 구하러 갔다는 사실을 알고 아해를 구하기 위해 총을 들고 아해의 뒤를 따른다. 하지만 보보는 미야모토의 아들 타로(용방 분)가 쏜 총을 맞고 허무하게 세상을 떠난다(그리고 얼마 후 아해 역시 독이 든 술을 마시고 곧 보보의 뒤를 따른다).

관지림은 1986년 성룡과 함께 한 <용형호제>를 통해 스타덤에 오른 후 <지존무상>에서도 청순한 매력을 뽐냈다. 관지림은 <황비홍>, <동방불패>같은 시대극과 <정고전가>, <호문야연>, <천장지구3> 같은 현대극이 모두 잘 어울리는 배우로 유명하다. 2004년 <헤어드레서> 이후 배우로서 사실상 은퇴상태인 관지림은 뛰어난 부동산 투자로 인해 오늘날 한화로 약 700억 원이 넘는 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지존무상 유덕화 알란 탐 관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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