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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들이 여자라고 하찮게 봤지만..." 광장으로 나온 엄마들

[리뷰] <좋은 빛, 좋은 공기>

21.05.16 12:44최종업데이트21.05.16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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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좋은 빛, 좋은 공기> 포스터 ⓒ 반달

 
'좋은 빛, 좋은 공기' 

분명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그와 비슷한 아르헨티나 군부 독재가 자행한 대규모 학살사건(일명 콘도르 작전)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로 알고 있었는데, 제목이 좀 많이 특이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한국과 아르헨티나 두 나라의 아픈 현대사를 다룬 영화의 제목이 어떻게 '좋은 빛, 좋은 공기' 일 수 있을까. 참고로 광주의 다른 이름은 빛고을, 좋은 빛을 뜻하며,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좋은 공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비념>, <위로공단> 등 미술계와 영화계를 오가며 활발히 작업하는 임흥순 감독의 2020년작 <좋은 빛, 좋은 공기>의 시작은 5.18 당시 암매장 장소로 추정되는 옛 광주교도소 주변 발굴조사 현장이다. 수많은 취재진이 몰렸던 5.18 실종자 유골 수색에 이어 5.18로 가족을 잃은 유족들의 사연에 귀를 기울이는 영화는 이내 1980년 5월 광주와 비슷한 아픔을 가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향한다. 

여전히 5.18 실종자 수색에 난항을 겪고 있는 광주와 아예 시체조차 찾지 못하게 비행기에 사람들을 태워 바다에 버리는 등의 방식으로 대규모 학살을 벌였던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거울처럼 맞닿아 있다. 1977년부터 1983년까지 대대적으로 벌어진 아르헨티나 군부 학살사건이 한없이 낯선 한국 관객들에게 영화는 지금까지도 곳곳에 박혀있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아픔이 5.18 광주의 비극과 다르지 않음을, 그리고 80년대 광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끝나지 않는 현재진행형의 사건임을 보여주고 들려준다. 

영화에는 광주와 아르헨티나에서 벌어진 군부 독재의 학살로 가족을 잃은 유족과 생존자 그리고 수많은 시민들의 목숨을 앗아간 학살의 장소가 연이어 등장한다. 국가 폭력에서 살아남은 자와 세상을 떠난 이들이 남긴 증언과 흔적들은 당시의 현장을 경험하지 않았던 후세대에게 그들이 겪었던 폭력의 순간을 환기하고 간접적이나마 경험하게 한다. 영화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1980년의 광주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일어났던 학살의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일종의 비전을 제시하고자 한다. 

복원: 학살과 항쟁의 흔적을 기억하다 

"2000년도 20년이 지난 시점에 망월동 묘지에 묻혀 계셨던 아들의 유전자 검사를 통해서 본인의 아들임을 확인을 하게 되잖아요. 지금 그 당시(5.18 민주화운동)를 겪었던 분들이 살아 계신데 그리고 끝나지 않은 역사인데 이 어머님들 사연을 들을 때 저희들이 (구 전남도청) 복원을 제대로 안할 수가 없는 그런 거죠." (김도형 문화체육관광부 옛전남도청복원추진단장) 

"(학살 장소에서 발견된) 유물들이 국가 폭력에 대한 기억을 후대에 전달할 수 있는 생생한 자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유물이 아픔을 고치고 치유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거죠." (라우나 두기네. 기억의 공간 '클럽 아틀레티코' 발굴 고고학자 )

여전히 학살의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광주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둘러싼 수많은 이야기 중 영화가 가장 많은 관심을 할애하는 것은 대규모 학살과 이에 맞선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이 벌어졌던 장소를 기억하고 보존하는 방식에 대한 문제다. 영화에 따르면 5.18 당시 시민군 항쟁의 최대 격전지였지만 국립 아시아 문화전당(ACC)로 개조되면서 원래의 모습을 상당 부분 잃어버린 구 전남도청은 '역사성, 상징성, 장소성'을 훼손한 역사 유적지 보존의 최악의 사례로 거론될 만하다. 

반면 당시 아르헨티나 군부 독재 학살 생존자, 유족들을 중심으로 수많은 민주 투사들을 감금하고 고문 했던 해군기술학교(ESMA)를 기억과 인권 공간으로 조성하는데 합의한 기억의 공간 'Ex-ESMA'는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하는 방식을 택한다. 학살 생존자와 유족들이 자신들이 겪었던 지난날의 아픔을 되새기며 필사적으로 죽음의 공간을 기억하려는 이유는 단 하나. 국가 권력으로 희생된 사람들이 남긴 상처, 고통, 죽음 등으로 점철된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함이다. 

이렇게 제대로 된 보존에 실패하고 이후에도 복원에 대한 끊임없는 문제제기를 낳았던 옛 전남도청과 정치적으로 필요한 요소를 고려해 이해관계자 간에 합의를 만들어내는 공간을 구축하되, 현재의 담론을 반영하기 위해 건물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한 'ESMA'의 사례는 구 전남도청과 함께 5.18의 주요 사적지 중 하나인 구 국군광주병원 옛터를 '어떻게' 보존하고 기억해야하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광장으로 나온 여성들, 학살 진상 규명의 중심에 서다 
 

영화 <좋은 빛, 좋은 공기> ⓒ 반달

 
"아들을 잃고 3개월 동안 그렇게 드러 누웠다가 언능 머리에 스쳐간 거야. 우리 재학이가 폭도? (중략) 그래서 구속자 엄마랑 망월동에 아들 묻은 아줌마하고 이렇게 만나서 우리가 투쟁을 하러 다녔지. 그러고 아주 말도 못 하게 댕겼어." (김길자, 5.18 민주유공자 유족회, 옛 전남도청 복원을 위한 농성장 지킴이) 

"아이들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는데 아무 답변이 없으니까 광장으로 간 거였어요. 거기서 엄마들이 하나 둘 셋 모이기 시작해서 기념비 주위를 돌며 행진을 했죠. (중략) 군인들은 우리가 여자라고 하찮게 봤어요. 완벽한 오판이었죠."(5월 광장 어머니회 회원) 

그간 역사 서술에 있어 주변부에 머물렀던 여성을 주체적인 화자로 내세워 새로운 시선에서 한국 현대사를 바라보고자 했던 임흥순 감독답게 <좋은 빛, 좋은 공기>에는 5.18과 아르헨티나 군부 독재 학살 진상 규명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여성들이 등장한다.
 

영화 <좋은 빛, 좋은 공기> ⓒ 반달

 
대부분 학살 피해자의 어머니로 구성된 광주의 '5.18 구속자가족회(현 오월어머니집)'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오월광장 어머니회'는 이들의 활동을 폄하하는 군부 독재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학살 진상규명에 앞장선 인권운동의 중요한 사례로 평가받는다. 가족을 잃은 아픔을 딛고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거리에 나선 유족들의 투쟁은 41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광주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주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후세대가 학살의 역사를 기억하는 법 

"친구들과 대화를 하면서 느꼈어요. 모두가 흉터가 아니라 상처라고 이야기했어요. 과거가 남기고 간 아문 흉터가 아니라 치유해야 할 상처말이에요." (광주-부에노스아이레스청소년영상교류 워크숍 중에서)

한편 <좋은 빛, 좋은 공기> 제작 중 광주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거주하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워크숍 프로그램을 진행한 제작진은 참여 학생들이 각자가 살고 있는 공간, 흔적, 일상을 촬영해 서로에게 보내주고 상대방에게 받은 촬영 소스로 각자 편집과 내레이션을 입어 완성해 보는 시간을 갖게 한다.

학생들이 직접 VR 등 디지털 영상 매체를 활용하여 구 전남도청, 국군광주병원 옛터 등을 체험하게 한 이 영상교류워크숍은 과거 양국이 겪은 아픔을 공유하는 과정을 통해 미래 세대가 학살의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실마리를 찾게 한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아픈 역사로만 기억되는 5.18과 아르헨티나 군부 독재 학살. 하지만 영화는 말한다. 1980년 5월의 광주는 피비린내 나는 잔혹한 학살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전남도청을 중심으로 벌어진 항쟁이 지속될 수 있도록 함께 싸운 여성들의 활약과 함께, 어김없이 시장은 운영되고 있었고 푸른 생명들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고 말이다.

학살과 죽음을 상징하는 붉은색과 자연, 생명을 상징하는 연두색의 양면성을 골고루 보여주며 광주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다양한 모습을 기억하고자 하는 <좋은 빛, 좋은 공기>는 5.18 41주기를 앞두고 절찬 상영 중이다. 
 

영화 <좋은 빛, 좋은 공기> ⓒ 반달

 
좋은 빛 좋은 공기 광주민주화운동 아르헨티나 군부 독재 학살 임흥순 감독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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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지금 여기에서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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