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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가 일어서면 왜 이렇게 짓밟는지 모르겠어요"

[밍글라바 미얀마 ①] 미얀마인이 되고 싶은 민아웅씨

등록 2021.05.17 17:50수정 2021.05.21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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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의 현재는 과거 한국 민주주의 투쟁의 역사와 다르지 않습니다. 수원 지역에서도 매주 일요일마다 미얀마 이주민들이 현지 상황을 알리는 선전전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수원시민단체 활동가들이 '밍글라바 미얀마 : 미얀마 이주민 인터뷰 프로젝트'를 기획했습니다. '밍글라바'는 미얀마어로 '안녕하세요'입니다. [편집자말]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 한강 <소년이 온다> 중에서


2021년 2월 1일 이후 미얀마 군사정권을 잡기 위한 군부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은 희생자는 800명에 가깝다. 탈영병이 늘어나며 군부의 만행이 다소 누그러지는 듯 보이지만 여전히 시민들의 안전은 바람 앞의 등불이다. 미얀마 군부의 쿠데타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미얀마는 영국의 식민지를 시작으로 세계대전 속에 일본의 통치를 받다 1945년 해방됐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다시 영국의 손에 넘어간 미얀마는 1948년에 비로소 신생 독립국으로 일어설 수 있었다. 제대로 된 자유를 맛보지 못하고 3회에 거쳐 군부쿠데타를 겪으며 미얀마는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을 하고 있다. 지속적인 저항의 역사 가운데 민아웅씨도 있었다.

"아버지 임종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5월 9일 수원역에서 미얀마 민주주의를 위한 선전전에 함께 한 뒤 수원이주민센터에서 민아웅씨(가명)를 만났다. 그는 올해 35살로 한국에 거주한 지 13년째다. 135개 소수민족 중 '친족(버마어: ချင်းလူမျိုး, Chin)'으로 현재 한국에서 난민 재신청 중이다.

불교국가인 미얀마에서 친족은 소수민족이다. 친족 대다수는 기독교인이다. 민아웅은 신학대학교를 졸업한 후 필리핀으로 유학을 준비하던 중 우연히 산 속에 있는 군사 비밀기지를 발견하고 군 관련 자료를 입수하게 됐다. 이후 신분이 노출돼 양곤으로 갔다가 양곤에서도 안전하지 못한 걸 깨닫고 브로커를 통해 2008년 한국으로 왔다. 당시 미얀마는 군부독재와 샤프란 혁명(2007년)으로 불안정하던 시기였다. 군부와 얽힌 이상 모국은 민아웅에게 안전한 곳이 될 수 없었다. 

낯선 타국에서 '일, 이, 삼…'도 말할 수 없던 민아웅은 변호사의 도움으로 3개월 비자를 지속적으로 연장하며 2013년까지 지낼 수 있었다. 그는 미등록이주민으로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일하다 미얀마 동료가 그를 불법체류자로 신고하는 바람에 외국인 보호소로 이송됐다.


1년 8개월 동안 머문 화성 외국인 보호소는 그야말로 감옥이었다. 민아웅은 외국인 보호소의 담당관으로 인한 고통을 변호사에게 호소해 정신과 치료를 위해 2020년 3월 30일 보호소를 나올 수 있게 됐다. 그곳의 환경에 대해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1년 8개월 동안 감옥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운동장에 나갈 수도 없고 밖을 볼 수도 없었습니다. 한 방에 18명이 있는데 다들 바닥에 누워 잡니다. 보호소 담당관들이 욕을 하니 차라리 한국말을 몰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말을 못 알아듣는 외국인들이 부러웠습니다. 그곳에 있는 동안 몸무게가 13kg이나 빠졌습니다.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이전에 일하던 자동차 부품 회사 사장님이 보증금을 내주기도 했고, 변호사의 도움으로 보호소에서 임시로 나올 수 있게 됐습니다." 


그는 작년 9월 아버지의 부음을 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난민신청 신청 중이라 출국할 수 없었다. 코로나와 군부쿠데타로 고향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졌다.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도 보지 못한 채 어머니를 지켜드리지 못한 미안함과 가족을 향한 그리움은 기약 없는 약속이 되었다.

"이번 혁명은 승리해야 합니다"
 

매주 일요일 오후, 수원역 앞에서 미얀마 이주민들이 미얀마의 상황을 알리기 위한 행동을 하고 있다. ⓒ 다산인권센터

 
나는 민아웅씨에게 쿠데타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에 대해 물었다. 그는 2007년 샤프란 혁명 당시 미얀마에서 활동한 전력이 있다고 하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저는 미얀마가 민주주의의 싹을 틔웠던 2010년부터 2020년까지 한국에 있었습니다. 제가 미얀마에 있을 때 미얀마는 늘 군부의 독재 아래 있었습니다. 점차 민주주의에 가까워지는 미얀마를 보며 다시 돌아갈 희망을 가졌는데 코로나와 군부 독재로 인해 돌아가지 못하게 됐습니다. (민주주의가) 조금만 일어서려고 하면 왜 그렇게 짓밟는지 모르겠어요. 가족이 보고 싶습니다. 

원래는 제가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보호소를 나오고 나서 눈물이 많아졌어요. 누군가 눈물만 흘려도 같이 눈물이 납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그들의 죽음을 그냥 무의미하게 흘려 보내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번 혁명은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민아웅씨는 2021년 미얀마 쿠데타 이후 서울 미얀마 대사관과 중국 대사관, 러시아 대사관 앞에서 미얀마 사람들과 시위를 했다. 지금 미얀마에서 벌어지는 군부쿠데타는 모국에서 민주주의 경험을 하지 못한 그에게는 과거로의 회귀나 다름 없었다. 

통역을 한 미얀마인 메이타씨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동안 우리는 작고 크게 계속 저항해 왔습니다. 그중에서도 88항쟁(1988년)은 대규모 혁명이었죠. 그때는 소셜미디어도 없었고 40일 만에 끝났어요. 저항의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어요. 88항쟁 때는 3000여 명의 사람이 죽고 전 국민이 다 나왔지만 군부에서 공무원과 교사들 복귀하라고 할 때 사람들은 학교로 복귀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그들도(공무원과 교사들) 복귀 안 하고 시민불복종(CDM) 옷을 입고 있어요. 전 세계 미얀마 사람들이 어려운 가정에 돈을 보내주고 있어요. 희망이 있는 거죠."


광주민주화운동은 미얀마와 우리를 잇는 아픈 기억이다. 보편적 인류애 위에 공통의 경험이 더 깊은 공감과 연대를 만든다. 우리가 경험한 민주주의는 미얀마 사람들이 마땅히 누려야 했다. 어떤 단어로도 치환될 수 없는 '인간'이라는 공통분모 안에 그들과 우리 사이에 남아있는 양심이 지금의 싸움을 속히 종식시키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정서희 시민기자는 미얀마 이주민 시위에 연대하고 있는 시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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