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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레이건, 5.18 담긴 인권보고서 감추려 했다

보고서 원본 사진·한국 외무부 문건 입수... 전두환과 정상회담 앞두고 의회에 비공개 요구

등록 2021.05.18 07:32수정 2021.05.18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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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2월 10일 발표된 미국 국무부의 '1980년 인권보고서' 중 한국 부분의 원본 사진(Country reports on human rights practice - The Republic of Korea). ⓒ 5.18기념재단

 
로널드 레이건(Ronald W. Reagan)이 대통령으로 있던 1981년 미국 정부가 전두환 등 신군부의 문제점이 담긴 자국 국무부의 '1980년 인권보고서' 발표를 무산시키려 했다는 정황이 확인됐다. 취임 후 첫 방미 인사로 전두환을 택한 레이건 정부는 5.17비상계엄, 5.18민주화운동, 김대중 내란음모조작사건 등이 담긴 인권보고서의 발표를 지연시키다 결국 전두환이 한국으로 돌아간 후에야 이를 공개했다. 

<오마이뉴스>는 ▲미국 국무부의 1980년 인권보고서 중 한국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는 부분의 원본(Country reports on human rights practice - The Republic of Korea) 사진과 ▲ 한국 외무부가 전두환이 방미 중이던 1981년 2월 초 생산한 여러건의 대외비 문건을 입수했다. 이에 더하여 ▲ 당시 미국 언론의 기사 ▲ 인권단체의 발표문을 확인해 당시 상황을 재구성했다.

현직 대통령이던 지미 카터와의 대선에서 승리해 1981년 1월 취임한 레이건은 취임 다음날인 1981년 1월 21일 전두환 방미 일정을 발표했고, 전두환은 1월 28일~2월 7일 미국을 방문했다. 2월 2일엔 전두환-레이건의 정상회담도 진행됐다. 쿠데타와 자국민 학살 등을 통해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을 미국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자리였다.

레이건 취임 후 첫 정상회담 상대는 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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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2월 2일(현지시간) 미국 백악관에서 진행된 전두환-레이건의 한미 정상회담. ⓒ 국가기록원

 
이때 막후에서 문제가 된 것이 미국 국무부가 매해 생산하는 인권보고서였다. 세계 각국의 인권 실태가 정리된 인권보고서는 통상 전년도 내용을 정리해 1월 말~2월 초에 발표했다(최근엔 3월 발표). 즉 전두환이 방미 중이던 1981년 1월 말~2월 초는 1980년 내용을 담은 보고서가 이미 작성돼 발표를 앞두고 있었던 시점이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1979년 12.12군사반란에 이어 1980년 5.17비상계엄, 5.18민주화운동 탄압 등을 통해 정권을 찬탈했다. 당연히 인권보고서에도 1980년 한국은 어두운 시기로 표현돼 있다. 그 내용 중 일부다.
 
"5월에 이르러 정치 개혁 과정에 대한 일부의 초조감 및 군부의 세력 확장에 대한 우려가 겹쳐 서울에서 대규모 학생시위가 벌어졌다. 정부는 5월 17일 계엄령 선포, 국회 해산, 주요 정치 지도자 감금, 엄격한 언론 검열, 모든 정치활동 금지 조치를 취했다."

"5월 18일 광주에서의 학생 시위와 이에 대한 군부의 가혹한(heavy-handed) 대응은 200여 명이 목숨을 잃은 광주를 사실상 반란(insurrection) 상태로 몰고 갔다. 당시 광주에 있던 사람들은 사망자 수가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정부는 5월 사태에 관한 혐의로 기소된 사람들에게 가혹한 조치를 취했다. (5.18 전에) 김대중은 이미 구금돼 있었으나 (이후) 사형을 선고받았고 기타 23명의 피고인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광주에선 5명이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7명이 무기징역, 163명이 5~20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정부가 6월 시작한 광범위한 사회 '정화' 작업(A sweeping process of "purification" of society)은 정치인, 언론인, 학자 등의 권리를 심하게 제한했다. 8월에 '정화'가 마무리됐고 전두환 장군이 최규하 대통령을 대신하게 됐다."
 
발표 연기에 <뉴욕타임스> <워싱터포스트> 비판

그런데 미국 국무부는 이러한 내용이 담긴 인권보고서의 발표를 돌연 늦추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윌리엄 다이어스(William J.Dyess) 공보담당 차관보는 1981년 2월 2일 정오 기자들과 만나서 아래와 같은 대화를 나눈다.

- 오늘 인권보고서를 발표할 건가요?
"발표는 정부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국무부는) 보고서를 의회로 넘겼고, 보고서의 발표는 의회의 결정할 일입니다."

- (인권보고서가) 의회에 얼마나 머물게 되나요? 
"음, 잘 모르겠습니다. 2~3일 정도 된 것 같아요. 다만 제가 이 말씀은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 국빈(dignitary)이 방문해 있다는 사실과 과거 이 보고서가 종종 논쟁의 여지가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의회에 전했습니다."

다이어스는 "의회의 역할"이란 원칙론을 이야기하며 즉답을 피하면서도, 전두환이 방미 중인 사실을 거론하며 한미 정부가 인권보고서 발표를 불편해한다는 인상을 강하게 내비췄다. 다이어스는 이어지는 기자들의 질문에 "우리는 논란이 많은 보고서의 공개가 좋은 외교 관행이 아니라고 확신한다"라고 못박았다.
 

1981년 2월 6일 <뉴욕타임스>의 사설은 "미국의 인권에 대한 헌신이 전두환의 레드카펫에 쓸려버렸다"라며 "인권 문제는 당파적이거나 이념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 뉴욕타임스

 
이러한 발표에 미국 주요 언론의 비판이 쏟아졌다. <뉴욕타임스>는 2월 6일 사설을 통해 "미국의 인권에 대한 헌신이 전두환의 레드카펫에 쓸려버렸다"라며 "인권 문제는 당파적이거나 이념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워싱턴포스트>의 존 코쉬코(John M. Gochko) 기자도 2월 10일 칼럼을 통해 "(레이건 정부가 인권보고서 발표를 연기하면서) 전두환의 군사정권은 '기본적인 정치적 자유와 권리'를 박탈할 수 있는 억압적인 '법과 질서'에 의한 정책을 펼칠 수 있게 됐다"라며 "레이건은 2월 2일 백악관에서 열린 회담에서 전두환을 옆에 두고 그에 대한 찬사를 보냈고, 인권 기록에 비춰봤을 때 아무 자격도 없는 전두환 정권을 강하게 지지하겠다고 발표했다"라고 꼬집었다.

미국 인권단체 북미한국인권연대(North American Coalition for Human Rights in Korea)도 소식지에 "한국의 대통령인 전두환 장군이 국가 원수로선 처음으로 레이건 대통령을 만났다. 정부는 고의적으로 인권보고서를 의회에 붙잡아뒀다"라는 내용을 실었다.

"레이건 행정부는 보고서가 공개되지 않는 방향으로..." 
 

1981년 2월 7일 생산된 한국 외무부(현 외교부)의 문건. 주미대사가 장관에게 보낸 이 문건엔 "리건(레이건) 행정부는 (인권)보고서가 공개되지 않는 방향으로 의회 측과 협의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 외교사료관


레이건 정부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한국 외무부의 대외비 문건에 따르면 미국 국무부는 인권보고서 발표를 미루는 것을 넘어 보고서를 아예 공개하지 않는 것까지 고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1981년 2월 7일 주미대사가 외무부장관에게 보낸 전보에는 "레이건 행정부는 보고서가 공개되지 않는 방향으로 의회 측과 협의하였으나 의회 측은 현행법상 공개가 불가피하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라고 적혀 있다.

레이건 정부는 왜 스스로 만든 인권보고서를 그토록 감추려고 했을까. 다이어스가 기자들에게 말했듯, 우선 표면적으로 전두환의 방미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냉전'이었던 당시 국제정세를 고려해보면 미국에게 소련·중국·북한과 인접한 한국은 자본주의 진영의 마지노선과도 같은 존재였다.

특히 레이건은 한국을 비롯한 동맹국 내지 우호적인 국가를 상대로 민주주의보다 안보를 훨씬 더 강조했다. 그런 맥락에서 쿠데타를 일으키고 자국민을 학살한 전두환도 레이건에겐 그저 '냉전의 전사'로서 필요한 인물이었다. 때문에 전두환의 아킬레스건인 인권보고서를 그가 미국을 방문 중일 때 굳이 공개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좀 더 내밀히 들여다보면 집권 1년차였던 레이건은 전직 대통령이었던 카터의 흔적을 지우고 싶어 했고 그 일환으로 인권보고서 역시 짓누르고 싶어 했다. 성과에 대해 여러 평가가 나오지만 카터는 인권을 전면에 내세운 대통령이었다. 인권보고서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도 카터 정부 1년차이던 1977년부터 시작됐다. 

한국 외무부도 이러한 정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앞서 소개한 외무부 문건에는 레이건 정부가 인권보고서 발표를 공개하지 않으려고 한 이유를 "보고서가 카터 행정부의 견해에 따라 작성된 것(이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레이건 정부가 국무부 인권담당 차관으로 어네스트 르페버(Ernest W. Lefever)를 지명한 것도 상징적이다. 국무부 인권담당 차관은 카터 정부의 중요한 자리 중 하나였는데 그 자리에 극우논객인 르페버를 앉힌 것이다.

앞서 르페버는 1980년 6월 18일자 <뉴욕타임스> 칼럼을 통해 5.18민주화운동을 폭동이라고 주장해 파문을 몰고 온 인물이다. 특히 칼럼에는 '권위주의 통치가 잠시 이완된 사이 좌파 학생세력이 준동해 폭동을 일으켰으며 한국은 아직 민주주의로 이행할 준비가 덜됐다'는 내용이 담겨 미국 진보진영과 인권단체들의 강한 비판을 받았다. 인권 담당 차관에 반인권적인 사고를 가진 인물을 앉히려고 해다가 결국 상원의회의 반대에 부딪힌 레이건은 그의 지명을 철회했다.

"레이건 정부, 자국 이익이라면 독재도 허용"

결과적으로 해당 인권보고서는 1981년 2월 10일에서야 공개됐다. 전두환이 방미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간 지 3일 후의 일이다.

5.18 연구자인 최용주 전 5.18기념재단 비상임연구원은 "미국의 동북아 정책에 있어 한국의 위치가 대단히 중요한 상황에서 레이건 정부는 인권보고서를 발표해 (방미 중인) 전두환의 심기를 건드리거나 외교적 마찰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라며 "또한 카터 정부가 해왔던 인권 정책에 대한 불만이 표출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레이건 정부에서 유엔(UN)대사를 지내며 네오콘의 대모로 불린 진 커크패트릭(Jeane Kirkpatrick)이란 사람이 있는데 그가 주장한 커크패트릭 독트린, 즉 자국의 이익이라면 제3세계 독재정권과도 함께할 수 있다는 기조는 레이건 정부의 기본 외교정책이었다"라며 "당시 미국은 특정 세력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길 원했고 (정권을 장악한) 군부에 강력한 지지를 보내야 소련의 남방정책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라고 분석했다. 
#5.18민주화운동 #레이건 #전두환 #인권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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